나는 엔터를 누르지 못하는 사람이다

by 도쿄프리 Tokyofree


나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불편을 주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일을 몹시 불편해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고, 살다 보면 누군가의 사정이 누군가의 일정에 영향을 주는 일쯤은 얼마든지 벌어진다는 것을. 나 또한 남의 그런 사정을 보며 살아왔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꼭 내 일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부터 나는 사실보다 남의 반응을 먼저 상상하기 시작한다. 혹시 곤란해하지는 않을까. 속으로는 안 좋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를 유난스럽거나 민폐인 사람처럼 여기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한 번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도 나는 쉬이 입을 떼지 못한다. 참 피곤하게도 사는 성격이다.


최근에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다시 한번 아주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올해 말까지 이어지는 프리랜서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원래 내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일은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의 추천으로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일을 하게 된 만큼 나름대로 의욕도 있었다. 돈을 받고 다니는 동안에는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괜히 추천해준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게 잘 적응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출근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할머니의 부고는 분명 슬픈 일이었다. 동시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머리로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픔과는 별개로 다른 걱정이 먼저 따라붙었다. 출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3일장을 치르기 위해 휴가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마치 내가 큰 민폐를 끼치는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다. 가족의 부고 앞에서까지 그런 걱정을 먼저 한다는 것이.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그랬다.


다행히 이번 직장의 팀원분들과 팀장님은 좋은 분들이었다. 휴가를 써주시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상 잘 치르고 마음 잘 추스르고 돌아오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3일 동안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장손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어느 정도 마친 뒤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 나는 다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다음에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또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라는 것을. 회사 사람들 또한 생각보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깔끔하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의 부고로 3일장을 치르고 왔는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할아버지의 부고로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팀장님과의 카톡창을 열어두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부고 소식을 적어두고도 엔터를 누르지 못했다. 정말로 30분이 넘게 그랬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에게 괜히 상담을 하고, 내가 예민한 건지, 그래도 말은 드려야 하지 않겠는지, 머리로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들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팀장님과 다른 팀원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곤란해하지 않을까. 속으로는 좋지 않게 보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잦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때의 나는 이미 벌어진 일보다, 아직 오지도 않은 타인의 판단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렵게 엔터를 눌렀고,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팀장님은 잘 다녀오라고 말씀해주셨고, 다녀온 뒤 다시 출근했을 때도 팀원분들은 크게 다른 모습 없이 나를 받아주셨다. 호들갑도 없었고, 불필요한 거리낌도 없었다. 그냥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을 겪고 돌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를 너무 자주, 너무 일찍 걱정해왔다는 사실이다. 아직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는데 혼자 먼저 움츠러들고, 아직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혼자 먼저 변명할 준비를 하고,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혼자 먼저 나를 검열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고 배려겠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살다 보면, 이미 내가 받아들인 나조차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안다. 세상 모든 일이 이번처럼 좋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정말 곤란해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든 겉으로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설명했을 때조차 끝내 이해받지 못하는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세상이 늘 선의로만 돌아간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이미 지났다. 나라고 그런 가능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좋지 않은 반응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도 이번에 같이 알게 되었다. 내가 먼저 겁을 먹는다고 해서 나쁜 결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먼저 나를 검열한다고 해서 타인의 판단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다 보면, 상대가 나를 밀어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접어버리게 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혼자서 죄인처럼 굴고, 설명해야 할 일 앞에서도 사과부터 준비하고, 어쩔 수 없는 일조차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끌어안게 된다. 그건 남을 위한 배려라기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를 먼저 희생시키는 버릇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부고도, 할아버지의 부고도, 그리고 내가 쉽게 바꿀 수 없는 내 모습도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이거나, 내 힘으로 당장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일을 체념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은 고치면 된다. 내가 더 배려할 수 있는 부분은 배려하면 된다. 내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면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분명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막을 수 없는 일, 내가 혼자서 전부 책임질 수 없는 일, 그리고 내가 쉽게 바꾸지 못하는 내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조차 남들의 반응이 두려워 자꾸 숨기려 했다. 남들이 불편해할까 봐,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혹은 나를 좋지 않게 볼까 봐 먼저 겁을 먹었다. 그렇게 계속 숨기고 눌러두고 조심하기만 하다 보면 결국 남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남의 이해를 받기 위해 사는 삶은 결국 내가 나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기 쉽다. 상대가 선을 넘기 전부터 내가 먼저 한 발 물러서고, 말해야 할 순간에도 괜찮은 척 넘어가고, 설명해야 할 일 앞에서도 죄인처럼 굴게 된다. 그 끝에는 남들보다도 내가 먼저 나를 하찮게 대하는 일이 남는다.


애초에 남들의 이해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상식적인 선에서 행동하고, 할 수 있는 설명을 하고, 해야 할 예의를 지키는 것까지다. 그 이후에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해석할지, 얼마나 이해할지, 혹은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는 내 몫이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배려가 나를 지우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내게 무례해지거나, 내 사정을 가볍게 여기거나, 내 몫이 아닌 죄책감까지 떠넘기려 할 때는 저항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냥 가만히 듣는 대로만 해주다 보면 내 안의 나는 조금씩 좀 먹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지는 나를 끝내 책임져줄 사람은 없다.


결국 나를 책임지는 것은 나밖에 없다. 남들의 판단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나를 챙겨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까지 남의 반응을 먼저 두려워하며 나를 숨기지는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정말 좋지 않은 결론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먼저 접어버릴 이유는 없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남들의 거부 그 자체라기보다, 그 거부를 상상하며 내가 다시 나를 버리게 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는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붙들고 있으려 한다. 항상 결론이 좋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바꿀 수 없는 일과 쉽게 바꿀 수 없는 나를 남들이 어떻게 볼지 두려워하며 먼저 숨기지는 않겠다고. 그 정도는 이제 내가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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