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43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오늘은 저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어릴 때 저에겐 방이 있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방은 아빠에겐 서재였고, 저에겐 제 방이었습니다. 낮에는 그 방에서 책을 읽었고 밤에는 그 방에서 잤습니다. 저 혼자 또는 동생과 함께. 그 방은 안방 정도로 넓었어요. 책장만 있던 간소한 방이었습니다. 아빠가 만화를 좋아했는데, 80년대 한국만화란 보물섬,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소년소녀를 위한 잡지에 실린, 주로 아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방에서 그런 만화책을 보면서 한글을 떼었어요. 100권짜리 동화 전집을 읽었고, 백과사전에서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시골 마을이라 친구를 만나려면 오래 걸어야 해서, 주로 그 방에서 보냈습니다.
그 집에서 이사를 한 후엔, 아파트 한 켠에 남동생과 함께 이층침대를 쓰는 방에서 지냈습니다. 남동생은 위에서 저는 아래서 잤어요. 초등학교 시절이었죠. 그 침대와 남동생 책상과 제 책상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저는 남동생을 늘 귀찮겨 여겼는데, 밤에 잘 때는 그래도 남동생이 위에서 자고 있단 안심감을 느꼈어요.
그 집을 떠난 후 저는 오랫동안 제 방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시곤 늘 좁은 집에서 살았고 일본에 와선 엄마와 저와 동생과 함께, 원룸에서 생활했습니다. 로프트가 있어서 로프트 위가 저와 남동생의 방이었습니다. 저도 남동생도 고등학생이어서 불편하기도 했는데, 저는 기특하게도 엄마와 동생이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에 많이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가지 않았어요. 친구가 원룸에 사는 절 우습게 볼까봐. 제가 원룸에 산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왜 친구를 데러오지 않느냐고 했는데, 저는 절대로 친구를 데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요즘은 '미니멀리즘'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네, 일본은 311 동일본 대지진 후, 물건을 소유하는데 대한 부담감에 푹 절어 있는 상태입니다. 물건이 많으면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불리해요. 유리접시 하나라도 깨지면 무기가 되니까요. 하이힐보다는 단화가 있어야 해요. 스타킹따윈 필요가 없고 두꺼운 양말이 필요하죠. 그 어떤 명품 가방보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플라스틱 물통이 더 중요한 그런 절실한 순간이 있다는 걸, 일본인들은 2011년 3월 11일에 또한번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 대두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집이 좁은 사람들에게 미니멀리즘은 사치에 지나지 않아요. 엄마와 동생과 원룸에 살 때, 엄마는 정리를 잘 하는 편이어서 집이 늘 깔끔했지만, 그래도 물건은 쌓이게 마련이었어요. 엄마는 티슈며 비누, 샴푸, 간장, 소금 등이 떨어지지 않게 준비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런데 그런 엄마가 늘 탐탁치 않았죠. "엄마, 집도 좁은데 뭘 이렇게 사두는 거야?"라고 너무나 쉽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이런 걸 사둬야 마음이 편해."라고 엄마는 말했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서운하고 섭섭했을까요? 네, 저희집은 좁아서 티슈며, 비누며 삼푸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았고, 저는 그런 것이 원룸 어느 곳에 놓여서, 그야말로 '생활감'이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상태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작년이었어요. 일본의 NHK 티비가 한 여고생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어요. 저처럼 원룸에서요. 그녀는 모자 가정의 빈곤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지만 대학엔 진학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 방송을 보고 "집 안에 물건이 저렇게 많은데 어디가 가난하냐? 그래도 밥은 먹고 살지 않느냐?"고 방송에 따져 물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녀의 이야기를 보면서, 고교시절 제가 생각났습니다. 네 가난은 그런 것입니다. 물건이 넘쳐납니다. 그걸 어디 치우고 둘 곳이 없거든요. 먹고 잘 공간도 부족한데 수납은 당연히 부족하지요. 미니멀리즘은 집이 넓고 수납이 충분할 때나 가능합니다. 부자들이 사는 큰 집이 깔끔해 보이는 건 그네들에겐 수납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제 방이 있습니다. 결혼하고 집을 마련하면서(주택론이지만), 남편은 방 네 개 중 하나를 당연하듯 저에게 선사했습니다. 책장 하나를 두었고 책상은 남편이 직접 만들어주었습니다. 별 거 아니예요. 제가 잘 어지르는 사람이라 커다란 나무 판자를 두 개의 작은 책장 위에 올린, 간단한 것입니다. 저는 그 책상에서 글도 쓰고 차도 마시고, 가끔 햇볕을 받으며 머리를 올려 놓아 보기도 해요. 아이가 셋이라 제 방을 아이들에게 양보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른이 되어서 제 방이 있다는 건, 아이일 때 제 방이 있는 것보다 더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입니다.
왜 그런데 그 방에서 글을 안 쓰고 셰어 오피스를 빌렸냐고요? 작가님도 아시듯 집에 있으면 집안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빨래도 개야할 것 같고 저녁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것 같은 잡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빌린 셰어 오피스는 일본답게 개인주의적인 곳입니다. 서로 인사는 나누는 사이지만, 점심을 같이 먹는 일도 없고, 딱히 교류를 하는 곳도 아니예요. 자기 일을 하고, 좋은 정보가 있으면 공유를 하고, 서로 세미나 정도 열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편하게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여하튼, 마흔의 저에겐 저만의 방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 방에 갈 새도 없지만, 그냥 거기 제 방이 있다는 그런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김민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