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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과 김동화

너와 나의 소녀시대(2)

by 김민정

현재라는 상황을 글로 쓰는 것, 그것도 일기처럼 개인적인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는 글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여러모로 거리끼게 되는 일이다. 말로는 할 수 있는 지금 나의 상황이 글로 남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까닭이다. 글은 조금쯤 소화를 시키거나 소화된 무언가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8090 노스탤지어’를 기획했다. 벌써 5-6년은 더 된 일이다. 대중문화, 하위문화로 본 8090년대의 한국을 서술하고 싶었다. 1부는 공공의 기억으로 이주일, 올림픽, 정수라, 이지연, 강수지, 나미, 김완선, 이선희, 전영록, 심형래, 김청기, 최진실 등의 한국을 대표하는 당시의 인물들과 마돈나, 신디로퍼, 비틀즈, 글렌 메데이로스, 워크맨, 나이키, 우리들의 일으러진 영웅, 인간시장,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우리들의 천국, 뉴키즈 온더 블록, 인디아나 존스, 구니스, 그렘린, 주최측의 농간이다 등등 당시 한국 사회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런 얘기를 할 생각이었고, 2부에선 개인적인 기억을 쓰려고 했다.


당시엔 신정과 구정이라 불렀고, 스웨터를 풀어서 다른 스웨터를 뜨기도 했으며, 이불청을 꿰매 썼고,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남학생은 반장, 여학생은 부반장이었고, 생일파티에 가는 것이 소소한 꿈이었으며, 여성지에는 홈드레스가 실려있었고, 경양식 집에서 햄벅스테이크 같은 것을 먹었으며,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와 같은 노래를 들으며 여자란 대체 무엇인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알지 못했다.(참고로 목차를 뒷편에 달아두겠다. 책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목차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추억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럼 오늘은 만화방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한다.


내가 일본에 왔을 때 나는 고1이었는데, 일본은 거품 경제가 끝난 무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거품 경제 시절 일본은 도서관, 콘서트 홀, 아동관 등을 확충했고, 우리집 근처에는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그 벚꽃들을 창밖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다. 한국 책 코너도 의리쩡쩡하여, 수많은 한국의 저서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기서 나는 김홍신의 인간시장 시리즈를 섭렵했고,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고, 한국 대표 작가들의 단편선을 한 권씩 읽어나갔다.


나는 한국학교에 다녔는데 우리반 반장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그 아이가 써온 독후감을 공유하기도 했다. 해외에 나간 사람들이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일본은 어디가 다른가? 어디서 문화차이를 느끼는가”와 같은 것이다. 사실 문화차이를 느끼려면 적어도 3년은 살아봐야 한다. 그 이전에 느끼는 감각들은 그저 주관이나 감각일 뿐이다. 여하튼, 문화차이를 느꼈다기보다 나는 한국어라는 것을 잃었다는 감각에 피폐한 상태였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국어’였다. 물론 국사나 세계사 점수도 좋았고 지리도 그러했으며 이래 봬도 수학까지 잘하는 처지였고 왜인지 물리 점수가 우리반에서 가장 높은 문과였지만, 여하튼 그건 내가 국어를 특출나게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내가 국어를 못했으면 내 수많은 친구들처럼 이과에 가서 나도 의대에 진학하지 않았을까는 어디까지나 뇌피셜이다).


여하튼 그런데 일본에 와서 아무리 한국학교라지만 나는 일본대학에 진학하는 반이었고 일본어로 시험을 치르고 일본어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한국어를 잃어야 한다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루 아침에 빼앗긴 사실에 한숨부터 나왔다. 그런 나를 살게 해준 것이 바로 동네 일본도서관의 한국어 서가였다. 고교 3년간 도서관의 모든 한국어책을 섭렵하며, 나는 조금 덜 외로웠고, 조금 덜 불행했으며, 조금 더 당당해졌다. 책은 그렇게 누군가를, 이를테면 나처럼 해외에 사는 동포(?)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살아가게 해준다.


한글을 어떻게 깨우쳤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빠가 만화팬이어서 만화책을 보며 익혔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한글을 읽는 유치원생이 되어 있었고 우리집 서재에서 <소년중앙> <새소년> <보물섬> 등을 읽으며 자랐다. 아빠는 이런 소년소녀 잡지들이 나오는 당일에 한꺼번에 다 사오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이런 만화들을 나눠 읽었다. 여름에는 별책부록으로 ‘세계7대 불가사의’가 달려오거나,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들을 번역한 책자가 달려오기도 했다. 잠들기 전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특히 버뮤다 삼각 지대를 생각했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언제 돌아올까, 이 세상이 아는 또다른 세상이 있을까. 상상력은 무한했다(고 쓰기엔 빈약하겠지만 당시엔 그러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우리집에서 더이상 소년소녀 잡지를 사는 사람은 없어졌다. 나는 가끔 서점에 가서 그런 잡지들을 슬쩍 보고 오기도 했지만, 정말 이상한 일인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대부분의 소녀소녀 잡지들은 폐간을 했다. 새소년이 1989년에, 소년중앙이 1994년에, 보물섬도 격주를 오가다 페간되었다. 어깨동무는 아예 아빠가 돌아가신 1987년 그해에 폐간되었다. 그러나 나의 만화사랑은 버릴 수가 없었고, 나는 동네의 책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초6의 내가 책대여점에서 빌려보던 책은 미하엘 엔데의 <기관차 대여행>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책대여점을 드다들다 만난 것이 김동화였다. ‘요정 핑크’는 알고 있었지만, ‘내 이름은 신디’ ‘아카시아’ ‘에반젤린’ 등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었다. 연극 배우가 되려는 고교생을 그린 ‘내 이름은 신디’, 과거의 인연이 현대로 넘어와 사랑과 질투로 이어지는 ‘아카시아’, 부잣집 딸과 그 집의 일꾼의 국경을 넘나드는 기나긴 연애를 그린 ‘에반젤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주인공들은 모두 그야말로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으며 다행스럽게도 모든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꿈이 하나 생겼는데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김동화의 그림들을 베껴그리는 것이었는데, 딱히 재주는 없었다. 참,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도 꿈이었다. 당시의 드라마, 영화, 만화 속 여주인공들은 연약하고 어딘가 아팠다. <우리들의 천국>의 최신실이 그랬다. 가냘퍼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하지만 절대 날아가지 않고 아주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 한 손을 덥썩 잡아주는, 그런 비련의 여주인공 말이다. 하지만, 비련의 여주인공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꿈도 떠나 보내고 이번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당시엔 문방구에 가면 종이인형을 팔았다. 하지만 그 종이인형들의 옷은 말도 못할만큼 촌스러웠다. 대부분이 드레스였는데 일상생활에서 그런 드레스를 입을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이인형의 옷을 디자인해보기로 했다.


김동화의 만화 속 옷들을 그려서 입혔다. 나중에는 색종이로 패턴을 만들거나, 잡지나 달력의 옷으로 쓸만한 곳을 오려 두었다가 붙여서 쓰기도 했다. 옷의 앞면만 있는 종이인형이 대부분이었는데, 사실 패션에선 뒷모습도 중요하지 않은가. 그래서 뒷면도 있는 옷들을 만들어 입혔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집중도 잘 되고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 현실이란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우리집이 더이상 부유하지 않다는 초6의 내가 짊어지기엔 너무나 큰 현실이었다. 아직도 그 시절에 그린 종이인형을, 더 정확하게는 옷을 가지고 있다. 디자이너인 지인이 큰 패널로 만들어주어 우리집에 전시되어 있다.


“저는 손으로 만든 게 좀 무서워요.”

“네, 손으로 만드는 것에는 어쨌든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든 깃들기 마련이에요.”

내가 아직 기자이던 시절에 일본에서 활약 중인 보자기 디자이너를 만났을 때 했던 얘기다. 한땀한땀 손으로 만든 것들에는 개성이 있지만, 그 개성이란 것 자체가 누군가의 희노애락이고 영혼인 것이다. 보자기의 경우엔, 수백년 전 여성들, 집밖에조차 나갈 수 없는 여성들이, 천도 넉넉하지 못해 자투리천을 이용해 이어붙여가며 울분을 삭이고, 기쁨을 표현하던 수단이기도 했다. 트위터 등을 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성들이 요즘은 뜨개질을 한다. 그 뜨개질에도 아마 영혼이 담겨 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노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일상, 소소한 기쁨……. 상상력을 집중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주로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만화가 그렇고 디자인이 그렇고 뜨개질도 그렇다. 나는 모든 현실을 쉽게 잊을 수 있는 인형옷 만들기를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고 어떤 면으로는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아마 그 시절에 만든 인형옷들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코로나가 조금 나아지면 아이들을 모아 인형옷 만들기 체험을 해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흠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변덕스럽고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을 위한 체험강좌 같은 것을 하고 싶은 게 다이지만 말이다.


결국 비련의 여주인공도 되지 못했고 멋스러운 디자이너도 되지 못했다. 그 시절 읽었던 수많은 책과 수많은 만화들이 내 안에서 쌓여 가끔 이렇게 글을 쓰고 살고 있다. 그 시절 만화들 중에는 이렇게 끝나는 만화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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