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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응답하라 <케빈은 12살>

너와나의 소녀시대(5)

by 김민정

드라마에 열광하는 일인으로서 한드, 일드, 미드 수없이 봐 왔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래> <모래시계> <토지> <여명의 눈동자> 등은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드라마일 것이고, <어글리 베티> <위기의 주부들>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드라마를 보며 같이 청춘을 누리고 주부의 삶을 산 여성들이 있을 것이며, 일드에 빠져 지낸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미드를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케빈은 12살> 마지막 회를 보며, 골방에서 혼자 눈물을 펑펑 쏟던 중학교 시절 기억은 아직 남아있다.


<케빈은 12살>(The Wonder Years)는 미국에서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방영된 청춘물로 총 6개의 시리즈로 구성되며 115회나 되는 길고 긴 드라마이다. 매회 25분, 인트로에는 달 착륙 장면,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마틴 루터 킹 같은 한국인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게 분명한 사람들의 얼굴이 나온다. 미국의 현대사를 공유하던 시절이다.


이 드라마를 보지 못한 분들에게 소개하자면, 1968년 12세인 케빈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스토리를 담았다. 케빈 가족은 6.25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아빠(전자제품회사 사원), 주부인 엄마, 그리고 히피를 동경하는 고교생 누나, 말썽꾸러기인 형이다. 공부를 잘하고 알러지가 심한 유대인 친구 조쉬가 케빈의 단짝이며, 케빈은 위니를 짝사랑하고 있다. 이미 성인이 된 케빈이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의 자신을 회상하는 스토리로, 성인 케빈의 내러이션이 스토리를 끌고 나간다. 68년에 12살인 설정이니, 88년 방영 당시에 성인인 케빈은 32살일 것이다.


제 1화의 테마는 베트남 전쟁이다. 소꿉친구로 커온 케빈와 위니는 이웃사촌인데다 학교에서도 자주 붙어다니다 보니, 형 웨인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연인사이라며 웃음거리가 되는데, 케빈은 겨우 12살이다. 아무리 위니가 좋아도 연인사이 운운엔 부끄럽고 짜증이 난다. 이럴 때 신사적으로 굴거나, 당당하게 위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드라마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케빈은 소심남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발뺌하다가 결국엔 위니를 싫어한다는 과잉반응까지 보인다. 고백도 안 하고 차인 위니는 그 날 오빠까지 잃게 된다. 위니의 오빠는 동네 남학생들이 모두가 동경하던 잘생기고 멋진 ‘엄친아’이었다. 그런 위니의 오빠는 베트남 전쟁에 가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다. 이 드라마는 결코 달콤한 청춘물이 아니다. “나는 스물이었다. 그 때를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말하는 이는 그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아덴 아라비아)라고 폴 니장이 썼듯, 청춘은 그렇게 밝고 신나고 행복한 시기만은 아니다. 다만 젊을 뿐이다. 케빈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열 둘이었다. 그 시기를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무려 2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에 미군 등이 파병을 하면서 전쟁은 점점 골이 깊어갔고 국제전으로 커져갔으며 1968년, 이제 전쟁은 미국의 한 가정에도 침투해버린 것이다. 평범하지 않게 시작한 드라마는 그 후 인간관계, 인종문제, 입시, 우정, 연애 등 10대가 겪는 다양한 사안들을 깨알같이 포착해 내러이션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보여준다. 작품 자체가 1968년 이후의 미국이다 보니, 어딘가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한국과 엇비슷한 곳이 많아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제2화에서는 위니의 오빠 브라이언 쿠퍼의 장례식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혼란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변화와 혼돈 속을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브라이언 쿠퍼를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용감한 젊은이라 칭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가 무의미한 전쟁 때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라고 칭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죽음은 없습니다”라는 신부님 말씀으로 막을 연다. 그리고 성인이 된 케빈은 “아이는 언젠가 사람이 훅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실을 모르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회상한다. 물론 화면에는 12살 케빈의 얼굴만 비춰진다. 우리는 32살이 된 케빈이 어떤 사람인지 영상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12살 케빈을 회상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반듯한 어른으로 자라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1973년으로 넘어가자. 여성문제도 당연히 이 드라마의 주제 중 하나다. 미국에 우먼 리브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거리로 나선 시기다. 케빈의 엄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가족에게 전한다. 그러자 큰아들 웨인은 “엄마에겐 일이 있잖아요, 우리를 돌보는 일”이라고 응수한다. 아빠는 “그럼 우리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어때?”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엄마는 스스로 신문 광고를 보고 아빠보다 높은 급여를 주는 컴퓨터 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러자 아빠는 대뜸 “양말에 구멍이 났다”고 트집을 잡는다. 케빈의 여자친구 위니는 대입을 앞두고 케빈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케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애초에 케빈은 귀여운 위니가 자기보다 점수가 좋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위니 역의 대니카 매켈러는 실제로 UCLA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키스 마이 매스(수학이 쉬워지는 마법 노트>라는 책도 썼다). 그리고 아빠와 케빈은 엄마와 위니를 데리고 볼링장으로 향한다. 볼링으로 어떻게든 여자를 이겨보자는 속셈이다.


그러나 “엄마가 던진 볼은 핀을 향해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느린 스피드로 천천히 하지만 정확하게 나아갔다. 마치 여성들의 발걸음처럼”. 그 화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된다. “여자가 사회에 나가 성공을 하고 정치도 하고 좋지 않은가, 하지만 여자가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유치함에 있어서는 남자가 몇 배 위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시민권법이 마련되어 인종,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국가 등을 이유로 고용차별을 할 수 없도록 했다. 한국에서는 1988년 남녀고용균등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여성이 기업에 입사하기는 쉽지 않았다.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3년째인 올해 기업체 신입사원 채용에서 모집 대상을 남자로 제한하는 경우는 사라졌다. (중략) 근로조건, 승진에서 여성 차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게 여성단체나 노동계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번 취업 시즌 동안 대졸 여성의 경우 취업희망자 9만 7천여명 가운데 합격의 관문을 뚫은 사람은 25% 남짓한 2만 5천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잠정 추산되고 있다”(1990년 11월 15일 조선일보)


115회의 모든 에피소드를 여기 적을 순 없으니, 마지막회에 대해 언급해 둔다.


마지막회는 1973년 여름이며 “그해 여름에는 자기를 찾는 여행이 유행이었다. 비틀즈를 사랑하던 세대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스타일로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났다”로 시작된다. 미국의 1973년은 마치 한국의 1993년 같지 않는가. 1989년 한국에서 드디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1989년 이상은 주연의 <굿모닝! 대통령>에서는 여자 대통령을 꿈꾸는 이상은이 등록금을 들고 유럽 배낭여행에 오른 모습을 담았다. 1990년 4월 29일 동아일보는 “배낭 하나만 메고 훌쩍 세계여행을 떠난다”며 “해외여행은 몇년전만 해도 일부 부유층이나 전문무전여행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지난해 과외해제로 대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 이들의 해외배낭여행이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1993년 6월 6일 마찬가지로 동아일보는 무려 컬러로 대문짝만하게 <나는 누구인가, 자아찾기 행렬>이라는 제목으로 건전한 배낭여행이 증가했다고 적었다. “신세대에게 외국여행이란 아득한 환상만은 아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법에 의해 출국이 불가능했떤 88년 이전의 선배들과 달리 이들은 가겠다고 마음 먹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든 월급을 모아서든 어떻게든 떠나고 만다. 동화책을 보며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소망을 제 힘으로 이루는 첫번째 자아실현이 셈이다”고 보도했다. 같은해 경향신문은 동남아와 유럽을 여행하고 <부겐빌레아 피는 천국>이라는 시집을 출간한 숭의여전 구미리내 씨가 <올해의 여행인상>을 수상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여행인클럽이 제정했다는 올해의 여행인상이 아직 무사한지 모르겠지만, 해외여행이 막 시작되고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외로 터져나가던 시절에 바로 이 여행인상이 제정되었다.


115회로 돌아가자. 17살이 된 케빈은 아빠 회사 공장에서 가구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위니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른 주의 호텔로 찾아간다. 케빈 혼자 떠난 독립을 위한 첫 여행, 나를 찾기 위한 첫 행보다. 그러나 위니는 케빈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불편해한다. 케빈은 그런 위니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오고 함께 마지막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를 본다. 그 후 위니는 파리로 미술사를 배우러 떠나고, 케빈도 동네를 떠난다. 아빠는 돌아가시고 형이 아빠의 가구 공장을 물려받으며 엄마는 커리어우먼으로 승승장구 한다.


그리고 8년 후 위니가 파리에서 돌아온 날 케빈은 공항으로 나간다. 아들과 아내와 함께. 드라마는 한 아이의 목소리로 끝이 난다. “아빠 공놀이하자”로 말이다. 12살 케빈은 그렇게 어른이 되고 아이를 가졌다.


“나는 평범한 마을에서 자랐다. 어디에나 있는 집,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마다 선명히 떠오른다, 그 아름다운 시절이…….”


어린 케빈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지만 20년이 지난 후 케빈은 과거를 회상하고, 그날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추억을 끌어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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