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나의 소녀시대(8)
오늘은 일본의 80-90년대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일전에 <요술공주 밍키>에서 밝혔듯 80년대 일본의 여성들은 직장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키가 작고 안경을 쓰거나 살집이 많은 여성들을 서점과 같은 서비스 직종에서 반기지 않아 국회에서까지 논의가 되었다고 전했던 적이 있다. 1985년 일본은 드디어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을 제정하고 1986년부터 이 법이 시행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된다. 그때까지 샐러리맨과 주부들이 상반된 소비의 주체였다면 80년대 소비의 주체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20대 여성들로 바뀐다. 당시 최고 인기 스타는 현재 왕비인 마사코 비였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일했던 그녀는 학력으로 보나, 커리어로 보다 80년대 젊은 여성들이 가장 동경하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패션은 수많은 패션지에 게재되었고, 바지에 블레이저 재킷을 입고 스커프를 맨 그녀의 스타일이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1991년에 제작 방영되어 호평을 받은-특히나 젊은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도쿄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리카 스타일의 원조격이 바로 현 왕비인 마사코 스타일이다. 블레이저 재킷을 입고 고가의 스카프를 두른 여주인공 리카는 남주인공 간치에게 “간치 섹스하자!”고 소리친다. 방안에서 속삭이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다 있는 길거리에서 소리를 친다. 이런 장면을 여권 신장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대사였고, 한편으로는 이런 대사가 통하던 조금은 열려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비의 주체는 금세 10대로 연령대가 낮아진다. 거품경제가 붕괴하며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벽이 생겨버린 것이다.
1993년 여고생들이 입고 쓰던 교복, 체육복, 하다못해 속옷까지 판매하는 블루세일러숍(체육복 블루머, 세일러복 등을 판매한다는 뜻)이 적발되면서 ‘여고생’이란 단어와 ‘갸루’란 단어가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여고생 문화도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여고생의 문화란, 루즈 삭스 양말을 신고 교복 스커트 허리춤을 접어서 미니스커트처럼 보이게 입으며, 삐삐나 휴대폰(PHS)로 정보를 공유하고, ‘초 베리 구(초 베리 굿=몹시 좋다, 훌륭하다, 대단하다는 듯)’와 같은 10대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층이었다. 소비 자체가 20대 여성에서 10대 여성으로 연령층이 더 낮아지는 계기를 만들어낸 세대다.
가수 아무로 나미에게 인기를 끌면서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하는 ‘아무라’라 불리는 여성들이 다수 등장했고, 하라주쿠의 다케시타 거리와 시부야의 109백화점에는 이런 ‘아무라’들이 넘쳐났으며, 반면 우라하라주쿠라는 하루주쿠 뒷거리에서는 남녀구분이 없으며 패셔너블한 옷들을 파는 가게들이 터를 잡으면서 ‘우라하라주쿠계’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아무라들은 아무라들끼리, 우라하라주쿠계는 우라하라주쿠계끼리, 코스플레이어들은 하라주쿠 역 주변에 코스플레이어들끼리 모였는데, 조금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했으며, 동시에 패션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비슷한 패션을 한 10대들끼리 연대를 유지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갸루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갸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의 설문조사에서 “자유롭고 즐겁고 정보 발신 등을 통해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으며(스기나미구, 하마마쓰시 설문조사 1999-2000), 강하고 자유로운 셀프 이미지에 수많은 10대-20대 여성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갸루를 받아들였고, 갸루가 되는 것이 꿈인 소녀들도 등장했다. 반면에 20대 중반만 되어도 더이상 갸루 패션을 즐기고 그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청소년도 많아, 젠더적인 측면에서 연령과 여성의 문제에서 그녀들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갸루를 포함한 10대 후반-20대 초반 여성들은 90년대 중반부터 소비의 주체임과 동시에 생산의 주체이기도 했다. 잡지 <폽틴(Popteen)>(1999년 11월호)이 시부야 갸루 500명을 대상으로 동경하는 인물 인기 조사를 실시했다. 1위는 이지마 사유리(여고생), 2위 모리모토 요코(109 백화점 점원), 3위 폽틴 모델, 4위 가게 점원, 5위 나카네 레이코(109 백화점 점원)으로 3위의 모델을 제외하면 모두 일반인이다. 요즘인 일반인 인플루엔서의 시대라면, 그 시초쯤으로 되는 일반인 인기인들은 90년에도 존재했다. 연예인이나 아이돌이 아니라, 나만의 스타일을 가진 나와 연령대가 비슷하고 나와 내 친구들과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크게 주목을 받았던 시기이며, 즉 소비의 트렌트를 통해 생산 트렌드에도 갸루가 영향을 준 시대였다.
“90년대를 통해 미디어는 여자고교생에게 소비문화의 새로운 리더(주체)로서의 역할을 기해다고 ‘강하고 자유로운’ <여고생>을 그려냈다. 갸루계 잡지 구독자들은 그런 ‘여자고교생’ 이미지를 지탱하는 가치관(자유로울 것, 자기 주장을 할 것, 개성적일 것, 주목을 끌 것)에 더 강하게 끌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소녀들이다. 그녀들에게 성적 관심을 가지는 성인남성들은 그러한 그녀들의 모습에 반응해, 말을 걸거나 돈으로 유혹하려는 행동을 취한다. 그럼으로써 모두로부터 요구되고 선망되는 ‘강하고 자유로운 주체’라는 셀프 이미지는 한층 강화된다. 이런 순환기구가 갸루계 잡지 구독자 분석으로부터 보여진다”(사토 리카 논문 ‘갸루계’가 의미하는 것, 2002).
‘갸루’라고 불리던 일반 여고생들보다 조금더 개성인 강한 10대들도 성적대상화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원조교제란 단어가 생겼으며, 자유롭고 강한 여성상의 갸루의 이미지는 결국 성적 자기결정권이 이미 그녀들에게 있어서 성행위를 해도 된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남성들이 등장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하여 1987년 여고생의 성경험율은 9%였으나 1999년에는 24%까지 증가했다. 사토 리카는 “90년대 일본의 고등학교 여학생 성행동의 변용은 70년대 미국과 같은 젊은이의 기득권력에 대한 도전의 일환이라 생각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세대간 가치관의 부딪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원조교제 자체가 성인 남성과 사춘기 소녀라는 다른 세대의 공범관계상 성립되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갸루는 정말로 극보수적인 일본사회에 반기를 드는 문화였을까? 일단 90년대 일본이 극보수적 사회였는가도 한 번 확인해 봐야 한다. 1996년 일본에서는 사회민주당 정권이 탄생했다. 신자유주의 옹호 보수 노선인 자민당과 정반대의 중도 좌파라 불리는 당이었다. 거품경제가 붕괴한 직후였지만 2000년대처럼 엄청난 취직 빙하기도 아니었다. 아직은 불경기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일본에서 국기국가법이 정비된 것은 1999년이다. 그전까지는 아직 일장기와 기미가요가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극보수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일본에서 30년을 살면서 그 90년대가 너무나 자유로웠기에 나는 일본에서 사는 길을 택했다.
갸루가 기성세대와 대립되는 구도를 만들어내고, 자신들만의 패션과 문화와 정체성, 그리고 연대를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대두한 10대 여성들을 성적인 면에서 성인으로 간주하고 원조교제를 제안하며, 실제로 원조교제에 뛰어든 여성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갸루 역시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당시 나는 갸루는 아니었지만 루스 삭스를 신고 고등학교에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모범생, 전학생, 불량학생 상관없이 모두가 루즈 삭스를 신었다. 당시엔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평범한 학생이고, 스커트를 발목까지 오게 신으면 불량학생이었는데, 미니스커트 족도 롱 스커트 족도 모두 루즈 삭스를 신었고, 루즈 삭스를 신는다는 것은, 10대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얼마전 트위터를 보니 루즈 삭스를 신어서 가는 발목을 가리는 것이 성적대상화를 피하기 위한 도전쯤으로 생각하던 사람도 있던데, 당시 우리가 그 양말을 신은 것은 첫째도 유행, 둘째는 동질감, 셋째는 발목을 가리면 오자형 다리나 엑스자형 다리가 일자 다리처럼 보인다는 생각에서였다. 목폴라(터틀넥)을 입으면 목덜미가 감춰져 성적대상화를 피할 수 있다는 말처럼 황당하게 들린다.
다만 그렇게라도 여성의 패션을 긍정해석해야만 하는 시대라는 또다른 방증인지도 모른다. 갸루도 여고생도 강하면 강해서 약하면 약해서 개성이 있으면 개성적이어서 개성이 없으면 없는대로 성적대상화가 되는 사회는 90년대도 그러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꾸만 ‘갸루’를 사회에 저항한 인물들도 해석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다고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보다 복잡 다양성을 띈 한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