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나의 소녀시대(9)
엄마는 자기가 어렸을 때 ‘다방구’를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다방구’가 어떤 놀이인지 모른다. 검색의 시대다. 그래서 검색창에 다방구라고 쳐본다. ‘대한민국 어린이 놀이 중 하나로 술래잡기와 닮아있다’고 나온다.
우리 시대엔 경찰과 도둑, 얼음 땡 같은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술래가 그림자를 밟으면 아웃인 그림자 놀이도 했고, 술래가 어떤 색을 말하면 주변에서 그 색을 찾아 터치를 하는 색깔놀이도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아카시아 이파리를 따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가장 먼저 이파리들을 따낸 사람이 이기는 놀이도 했다. 세상 천지가 놀이터고, 세상 모든 게 놀이들이었다. 바닥에 선을 긋고 숫자를 쓴 후 돌멩이를 던져 노는 사방치기는 또 왜 그리 재미가 있었는지. 동그란 원 하나 그려 놓고 깡총깡총 한 발로 뛰면서 친구 발을 밟는 무자비한 게임도 있었다. 그 시절엔 밟고 밟히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고무줄 놀이는 또 어떤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불러대고 “딱다구리구리 마요네즈”라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노래들을 부르며, 쉬는 시간 10분마다 운동장에 나가 하루 종일 뛰고도 모자라, 학교가 파하고도 운동장에서 놀았다. 겨울이면 주머니에 삶은 밤을 넣어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밤을 까서 먹기도 했다.
대부분의 놀이들은 서너 명만 모이면 가능한데, 다수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놀이가 있었느니 바로 ‘오징어’였고, 남녀 관계 없이 같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했다. 바닥에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두 편으로 나뉘어, 한 편은 오징어 머리 부분에서 오징어 허리를 지나 꼬리에서 몸 안으로 들어와 오징어 머리까지 가는 공격을 맡고, 또 한 편은 그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오징어 몸 밖에 있는 사람들은 깨금발로만 다녀야 하고, 수비들은 공격팀을 밀어내기도 해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놀이다 보니, 격정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게 다치는 이도 없었지만, 사람이 좀 많이 모였다 싶으면 한 번쯤 하는 놀이였다. 안타깝게도 이 놀이는 생각보다 단순한데다 온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아이들도 많지 않아, 끝을 보는 일이 거의 없는 놀이이기도 했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친 아이들이 다른 놀이를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처럼 강요나 의무가 아니면 아마 끝까지 남아 이 놀이를 온 몸으로 부딪혀가며 할 아이는 없지 않았을까?
80년대에 이렇게 놀던 아이들은 90년대가 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오징어나 고무줄 놀이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그 원인을 1995년 8월 16일 경향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광복 50년 놀이 50년, 흙과 함께 어느날 사라진 것들>이란 기사에는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거리와 농촌 마을 어귀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낭랑한 음성은 이제 추억 속에서나 떠올릴 수 있다. 그곳에서 팽이를 돌리고 딱지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사라진지 오래다. 전자오락과 컴퓨터 게임에 심취하는 아스팔트 위의 동심들에게 그러한 놀이는 구 시대의 유물로 전해질 뿐이다. 아파트 숲은 모든 놀이의 공간이었던 땅을 없애 버렸고 노동과 놀이가 하나였던 우리의 민속놀이는 외래문화의 범람 속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우리 엄마가 어릴 때 하던 다방구, 땅따먹기, 팽이치기, 제기차기를 내가 어린 시설에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듯, 내가 어린 시절에 했던 오징어, 고무줄, 사방치기는 90년대가 되면서 절로 사라져버린 듯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니 안타까워할 것까지는 없다. 새 세대의 아이들은 새 세대의 놀이를 즐기며 클 게 분명하니까.
여하튼 아파트 숲이 들어서고 땅이 좁아지고, 자동차들이 여기저기를 오가게 되고, 학교가 보안을 위해 수업 이외의 시간에 문을 걸어잠그면서 아이들은 놀이는 밖이 아니라 안으로 바뀌었고, 나이가 든 어르신 중에는 아마 어린 시절의 놀이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그 분처럼. 어른이 되어 다시 해보는 놀이는 어쩐 일인지 시원찮다. 다이어트도 겸하고 아이들에게도 알려줄 겸 고무줄 놀이를 해 봤는데, 몸도 예전같지 않아 5분도 뛰지 못했으며 왜인지 흥이 나질 않았다.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닌 이상 어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내건 것이 456억원이란 상금일 것이다. 그 상금을 걸고 목숨까지 내걸고 한 번 해보자. 그렇게 나의 동심을 찾아보자. 그게 그 분의 생각이었겠지.
80년대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군사정권이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오랜 통금이 해제되고, 데모는 극심해지고, 금지가들은 해금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이 87년에 모두 끝난 것도 아니다. 그 후에도 학생들은 계속 거리에 있었고, 밖에 나갈 때마다 서있는 전경들과 최루탄 냄새는 어린 나에게도 각인될 정도로 강한 이미지이자, 두려움이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형제복지원의 인권 유린과 폭력의 실태도 이제서야 들어 났지만, 삼청교육대 같은 곳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갔다는 사실은 교사 김진경이 자신의 책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에서도 증언한 바 있다.
1988년 11월 20일 한겨레 신문은 <삼청 후유증으로 고교생 사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까닭도 모른 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지병을 얻어 집에 돌아온 고등학생이 병이 악화돼 숨진 사실이 가족들의 진정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80년 당시 부산상고 3년생이었던 문 모(당시 17세)군은 그해 11월 5일 아침 7시 집에서 등교 준비를 하다 경찰에 연행돼 B급 판정을 받고 삼청교육대에 입소, 1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다 결핵성 범발성 복막염이란 병을 얻어 82년 2월 귀가 조치 됐다. 문 군은 집에 돌아온 뒤 2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으나 84년 1월 17일 숨졌다는 것이다”. 경찰이 어느날 주로 학생을 어딘로가 데리고 가는 일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던 장면이었다. 당시의 권력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만든 컨텐츠에서도 역시나 권력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며 실태를 파악할 수 없고, 절대 도망칠 수 없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 <지옥>은 제도나 사회가 절대로 구해줄 수 없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그 권력이란 어마무시하여, 아무도 반기를 들 수가 없다. 하루 아침에 삼청교육대나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사람들을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징어 게임>에 붙들려간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하고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가족도 법도 제도도 구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금 오징어 게임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지옥>의 구세주 정진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를 좀 바꿔보고자 한다. 그는 복잡다양한 인물이다. 하지만 <지옥>에서 악마들의 지목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 예언을 부정할 수 없다. 지옥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아무 잘못이 없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오징어 게임>의 등장인물도 <지옥>의 등장인물도 너나 할 것 없이 평범한 서민들이란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두 드라마의 제작진들은 70년생들이며 그들이 어릴 때 자라면서 본 권력이란 바로 그렇게 어마무시하고 견고하고 강건한 것이었을 게 분명하다.
한국에만 사회의 모순을 다룬 컨텐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인물들이 사회에 나와 만든 컨텐츠들 중에 권력의 따끔한 맛을 그린 것들이 유독 많고, 자신들의 고뇌와 인생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서 더 신뢰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들은 넷플릭스가 잔인한 드라마는 한국에게, 성적인 묘사를 그린 드라마는 일본에게 맡겨 놓았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 잔인한 권력을 그려낸 드라마들이 앞으로 바뀌려면 사회도 제도도 계속 바뀌면서 더 많은 이들을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