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나의 소녀시대(10)
드라마 <파친코>의 선자는 1920년대 한국의 바다마을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고, 솔로몬은 1989년의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이방인으로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드라마 속에는 1989년 당시의 일본의 모습이 마치 그물처럼 촘촘하게 제대로 묘사되어 있다. 남자들이 입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양복, 보기 드문 여성 사원과 그녀의 배경, 열 명 이상이 타도 여유가 남는 엘리베이터, 고층 건물과 화려한 야경, 바와 댄스홀, 그리고 파친코 역시도 1989년 당시의 모습이 살아있다. 왜 하필이면 1989년일까? 물론 선자의 나이를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1986년이나 1987년이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민진 작가는 1989년을 택했다. 일본의 1989년은 어떤 한해였을까?
1965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을 치르고 1975년 주요 7개국 회원국이 된 일본은 꾸준한 경제 성장 가도를 달린다. 1989년에는 1인당 GDP가 미국의 약 80% 정도에 도달했으며,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32만 1000엔 (내각부 자료), 샐러리맨의 평균 연봉은 414만 3300엔이었다(후생노동성 자료). 경제 대국 미국은 1987년 주가 폭락으로 주춤한 상황이었고, 일본은 치고 나오는 나라였다. 그 이듬해인 1990년에는 세계 5대 은행을 일본의 은행들이 장악한다. 솔로몬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다. 당시 대졸 취업자들이 가고 싶어하던 인기 기업 10위원내에는 지금은 통폐합 되거나 사라진 산와은행, 후지은행, 미쓰비시 은행 등이 올랐다. 대졸자의 취업율은 약 80%, 2000년대에 약 55-60%를 오간 것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시대였다. 미쓰비시 지쇼가 그해 10월 미국의 록펠러 센터를 구매한 것은 전세계를 놀라게 한 뉴스였다. 물론 무엇보다도 파친코가 흥했던 시절이다. 1970년대에 전국에 만 여건이던 파친코 점이 80년대 말에는 약 17000점으로 늘었고, 시장 규모도 10조엔 이상으로 추정되던 시절이다.
일본이 미국을 앞지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시절, 일본 국내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 히로히토 일왕이 오랜 암투병 끝에 숨졌다. 수많은 한반도 사람들을 일본으로 건너오게 만든 후, 그들을 방치한 인물이 사망한 해가 1989년이었던 것이다.
1989년은 히로히토 일왕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가 1월 7일에 사망하고 아키히토 일왕이 탄생하고 일본의 연호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변경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기대감은 더 커갔다. 소니가 워크맨으로 일본의 기술력을 전세계에 자랑한 후, 그해에 핸디캠이라는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를 내놓았고 닌텐도가 게임보이로 그 뒤를 잇고 있었다. 남자들의 로망은 아르마니의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는 것이고 여자들의 로망은 샤넬 정장을 입어보는 것이었다. 특히나 아이 입학식 때 샤넬 정장을 입고 가는 것은 결혼에 성공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드라마 ‘파친코’ 속 1989년의 인물들은 이자카야나 회전초밥집이 아니라 고층에 있는 바나 댄스홀에서 교류를 나누고,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에서 샴페인을 터뜨린다. 1989년을 거기 가져다 놓은 것처럼 제대로 표현했다. 솔로몬이 매고 있는 에르메스 넥타이는 성공한 남자의 인증이자 솔로몬의 목을 죄어오는 자본주의의 맛이다.
솔로몬의 동료, 나오미도 빠뜨릴 수 없다. 그녀는 해외에서 공부한 인재지만 일본의 은행에서는 성공가두를 달리기 어렵다는 판단에 외자계 은행에 취직했다. 만일에 나오미가 일본 은행에 취직했다면 아무리 유능해도 은행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을 것이다. 안으로 말아넣은 컬, 몸에 붙는 스커트 정장도 80년대를 연상시킨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 초반, 여성들의 우상은 현재의 왕비인 ‘마사코’비였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외교관이 되어 일을 하다가, 왕자의 간택을 받은 여성. 당시의 패션 잡지에는 그녀의 출근룩이 화제가 되었고, 나오미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의 마사코 비와 몹시 닮아있다. 1985년 남녀고용균등법이 시행되면서, 여성들이 직장으로 나와 일을 하기 시작했고, 소비의 주체가 젊은 여성들로 옮겨가고, 야심과 야망을 품은 여성들이 사회에 갓 진출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이 바로 나오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려한 시대를 살아가던 재일동포들은 어땠을까? 먼저 재일동포란 누구인가부터 잠시 확인을 하자. 그들은 전쟁 전, 전쟁 당시, 전쟁 직후, 또 한국정부가 세워지기 전의 혼란한 상황에서, 또는 육이오 때 일본으로 건너온 수많은 사람들을 말한다. 크게 1989년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 시절 이후에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을 신정주자(뉴커머, 비자로 봤을 때 정주비자, 영주비자 등)라고 부르고 그보다 수십전 전에 마치 선자처럼 건너온 사람들이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한 경우 구정주자(재일동포, 비자로 보면 특별영주비자, 일본국적자 등)로 나뉜다.
1980년대에는 ‘외국인 지문날인’제도가 있어서 16세 이상의 모든 외국인은 일본 지자체에 가서 자신의 지문을 등록해야 했다. 일본국적자는 하지 않아도 되는 지문날인을 외국인들은 꼭 해야 했고 재일동포도 마찬가지였고, 사실 이 지문날인 제도에 해당하는 외국인의 90%가 재일동포였다. 1980년대 각지에서 지문날인에 반대하는 동포들이 생기고, 이후 지문날인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고, 93년에 이 제도는 폐지된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들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16세가 되면 일본인과는 달리 지자체에 지문을 등록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이방인으로 보는 일본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 제도는 당연히 차별적인 제도였다.
한편 외국적자는 지방공무원이 될 수 있지만, 승진을 할 수 없다거나 국가공무원이 될 수도 없었다. 재일동포를 단순한 외국적자로 볼 수 있을지 그 또한 문제가 되었느나 일본정부는 그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지문 날인 반대 운동에 합세했으며, 재일동포들의 지위를 위해 꾸준히 연대했다.
동포들은 취업에서 큰 차별을 겪었다. 파친코로 큰 성공을 거둔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음식점과 술집 등이었고, 파친코도 그러했다”고 답했다. 1989년 일본경기가 흥하면서 파친코 앞에는 개점 전부터 고객들이 줄을 섰지만, 파친코를 즐기면서도 일본인들은 파친코 경영자들을 얕잡아 봤고, 재일동포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면서도 그들이 돈을 버는 것을 얄밉게 생각했다.
동포들의 역사를 전시한 신오쿠보 <고려 박물관>의 초대 관장 송부자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1인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백화점에 취직했지만 재일동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쫓겨난 이야기, 그 후로는 취업을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끄러워서 한복도 입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한글도 히라가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세대들이었고, 이런 동포들의 이야기는 매우 흔하게 널리 퍼져있다. 솔로몬이 찾아간 재일동포 할머니는 곧 죽어도 땅을 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초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고 자랑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학교>에는 글을 배우지 못한 재일동포 여성들이 일본의 야간 중학교를 다니며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를 배우는 모습이 등장한다. 의무교육에서 제외되어 왔던 그녀들이 성인이 되어 일본어로 쓰고 읽는 법을 배우고, 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민단의 어학교나 지역의 한국어 교실을 찾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단순히 ‘반일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까?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이 데이터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여성상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도 마치 데이터를 이용해 만들어낸 가장 보편적인 재일동포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수많은 동포들이 걸어온 길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어떤 일본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덕분에 한국이 문명화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에 기찻길이 놓인 것도 광산이 개발되고 농지가 개척되면서 배불리 먹고 살게 된 것도 모두 일본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은 영토확장을 위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고 말이다. 식민지는 피지배층을 걱정하고 위로하려고 삼는 것이 아니다. 지배 받을 사람들의 건강과 교육과 문명을 위해, 어떤 깨우침을 주기 위해 식민지로 삼는 것이 아니다.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착취받는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기찻길을 만들고 광산을 개발하고, 농지를 개척하게 하고,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밖에 그 노동력의 댓가를 주지 않는 것이 식민지이다. 이 드라마의 어느 부분을 반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은 가해의 역사 때문인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은 물론이고, 무려 일본에서 일어난 일들(선자가 일본에 건너온 이후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역사)도 일본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또 일본 사회가 만일 재일동포들을 더 먼저 생각하고 감쌌더라면, <파친코> 같은 작품들이 일본인의 손에서 태어나고 그들 손에서 작품화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가 일본땅에서 계속되는 한, 그것은 결국 엔터테이먼트의 세계에도 그늘을 만들 게 분명하다.
솔로몬. 그는 해외에서 공부한 재일동포다.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제삼자처럼 살고 있다. 그가 아무리 유능해도 일본에서는 그를 재일동포라며 믿을 수 없다고 하고, 미국에서는 아마도 아시안이기에 승진이 어렵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그러한 씁쓸함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독하다. 일본의 경기가 좋았던 80년대, 어느 정도 부를 쌓은 재일동포가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자녀를 구출하고자 미국으로 보냈을 것이란 상상은 충분히 이해가능한 영역이다.
솔로몬 왕이 아이를 안고 온 두 엄마에게 그 아이를 잘라 보라고 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솔로몬은 선택하는 자를 말한다. 그것도 그 선택은 항상 현명해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 속 솔로몬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두 할머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자유롭고자 미친 듯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일본의 불경기가 30년을 넘어가면서 파친코 사업도 요즘에는 주춤한 상태다.
이제 동포들은 어떤 길을 걸어갈까. 그들의 어느 나라 국적을 택해 살아갈까. 또는 어느 나라를 자신의 둥지로 삼게 될까.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 어느 국적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그가 어떻게 살아갈지, 솔로몬의 앞으로의 행보가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