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나의 소녀시대(11)
기인, 80년대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중광 스님과 천상병 시인과 이외수 소설가. 이 삼총사가 뭉치면 세 기인들의 기인스러움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수많은 기사들이 이미 이외수 작가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나는 나의 기억들과 우리 아빠에 대한 기억들을 늘어놓기도 한다. “일기는 일기장에”라고 누군가가 댓글을 달지도 모른다. 나는 내 기억 속의 이외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기인, 괴짜, 자유로운 영혼, 트통령, 존버의 창시자, 이외수 투병 중 별세라고 기사들이 전하고 있다.
아빠는 책벌레였다. 그는 특히나 이외수를 좋아했다. 아빠는 책방 앞에 나를 세워두고 혼자 책방으로 들어갔다. 서재라고 불리던 작은 방에는 아빠가 읽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물론 이외수의 글들도 있었다. <꿈꾸는 식물>을 재밌게 읽었던 아빠는, 그날 <사부님 싸부님>을 사들고 신나게 귀가했다. 물론 나에게 <소년중앙>과 <보물섬>을 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49년생인 이외수 작가보다 5년 늦게 태어난 아빠는 80년대에 30대였다. 아빠는 농가의 아들이었고 쌀을 재배하고 소를 키웠다. 순수함을 대변하는 이외수의 소설들은 아빠처럼 조금 다르고 싶었지만, 가업을 물려받아 살아야 하는 입장의 남자에게 위로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외수 작가의 글을 1990년대에 처음 접했다. 한국에서가 아니라 일본에서다. 거품경제 시절 일본은 도서관을 전국적으로 넓혀나갔고, 서가에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 서적과 중국어 서적들도 가득했다. 그리하여 내가 살고 있던 동네의 ‘모모구 중앙도서관’에는 한국어 서적들로 가득한 서가가 있었고, 그중에는 이외수의 책들도 있었는데 내가 처음 읽은 소설은 <들개>였다. 우연히 하지만 운명적으로 만난 화가인 남자와 문학을 하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고 야성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도전하다가 결국 파멸을 맞이한다. 여성지에 나오던 이외수는 머리를 자르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손톱도 깎지 않는 그야말로 기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인가. 스토리가 주는 순수한 낭만에도 놀랐지만, 이 문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같은 한국어를 써도 이렇게 위트있고 이렇게 재미가 있으면서 이렇게 깔끔하고 이렇게 완벽할 수가!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빠가 <사부님 싸부님>을 사들고 신난 표정을 지은 것이 떠올라, 나도 얼른 <사부님 싸부님>을 공수했고, 일본 도서관에 있던 <칼>을 읽고 <꿈꾸는 식물>을 읽고, <벽오금학도>를 읽었다.
나의 최애는 여전히 <벽오금학도>이다. 어느날 우연히 금학과 선인들이 사는 마을 오학동에 가게 된 소년 은백이 이승에 돌아온 이후에도 오학동으로 돌아갈 길만을 찾는다는 스토리가 그려져 있다. 이외수만의 문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권이다. 어떻게 번역을 하면 이 글의 묘미를 살릴 수 있을까. 이런 한국적인 사상들을 과연 어떻게 다른 사회에 전할 수 있으며, 이 재미를 알릴 수 있을까.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이외수의 소설에는 중독성이 있다. 이외수처럼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위트있는 작가는 이외수뿐이다. 나는 다독가이며 한국소설 마니아를 자부한다. 훌륭한 소설들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고, 작가들의 역량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외수처럼 글을 쓰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오리지널리티는 탁월하다.
이외수는 에세이와 시화집을 남겼지만, 소설가로서 결코 다작의 작가는 아니었다. 그만큼 오랜 세월 고통스럽게 글을 쓰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단편집을 제외하고는 <칼> <꿈꾸는 식물> <들개> <벽오금학도>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 <장외인간> <괴물>등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1972년에 신춘문예에 당선해 50년간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는 정말 소수의 장편을 썼다. 독자로서는 애가 타게 그의 신작을 기다렸다. 이외수의 장편은 도대체 언제 나올 것이며 대체 어떤 이야기가 그려져 있을까? 나는 이외수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은 1992년 이후 무려 30년간 거의 매일 이외수 작가님의 신작 소설이 언제 나올지만을 고대하고 고대하며 살아온 독자 중 하나다. 어디 나만 그럴까. 이외수의 매력에 푹 빠진 독자들은 끊임없이 기대했을 것이다.
이외수가 작가가 남긴 말은 ‘존버’만이 아니다.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일본에 와서 고등학교에 다니며 향수병을 앓고 있을 때, 나의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도대체 이 타향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 심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나를 살게했다.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그저 걸어보면 그만이구나. 길은 생기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오늘도 기쁜 일만 그대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이렇게 무심하게 던질 수 있는 사람도 이외수 작가 뿐이다. 이메일 마지막에 써도 좋고, 편지를 마치면서 쓰기에도 아주 좋은 말이다. 오늘도 기쁜 일만 그대에게,라니. 이 문장에는 모르는 단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단어를 이렇게 아름답게 나열할 수 있는 감각을 가졌던 이외수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도 계속 읽히기를 바란다.
<벽오금학도>를 번역하고자 일본 출판사의 문을 두르린 적이 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아름다운 글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다. 부디 이외수 작가의 글을 내줄 일본 출판사를 내가 찾아내기를 또한 바라는 바이다.
이외수 작가님이 먼 곳에서도 ‘존버’하시길 바란다. <벽오금학도> 뒷 부분에 적힌 ‘화엄경 동종선근설’처럼 언젠가는 또 어딘가에서 하루를 동행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일천 겁 동종선근자는 일국동출이요, 이천 겁 동종선근자는 일일동행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부디 오늘도 기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란다. 이외수 마니아는 오랜만에 이외수의 글들을 다시 펴볼 생각이다.
사람은 언젠가 이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쉽게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디 오늘도 기쁜 일만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