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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거나 꿀이거나

김민정의 일상다반사(7)

by 김민정

20대에는 연애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다.

30대에는 20대에 연애를 많이 해두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40대인 지금에는 연애를 안 하고 자격증이라도 더 따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약간 후회를 하고 있다.


결혼하여 15년 이상 살아보니,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사실 가끔 나의 이성애를 통탄하고 싶어진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남자랑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여자랑 살면 다를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가족을 포함해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아마 혼자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의 구태의연한 연애 이야기, 개봉 박두다. 발렌타인데이니까. ‘개봉 박두’란 말은 언제부터 누가 쓴 단어인지, 궁금하면 검색이라도 해봐야 되는 성격인지라 뉴스 라이브러리를 찾아봤더니 1955년부터 쓰이고 있었다.


남편을 만난 것은 딱 스무 살 때였다.

우리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피부가 하얗고 청바지 뒷춤에 항상 문고본-주로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들을 디자인 등을 바꾸고 사이즈를 줄여서 작고 가볍게 만든 것, 1927년에 이와나미 서점(출판사)가 세계문학과 같은 고전을 보급하기 위해 간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을 넣고 다녔다. 선배들은 나를 ‘오차메’라고 불렀다. 장난끼가 많다는 뜻이다. 연극 동아리에서 만난 지금의 우리 남편의 뒷춤에 넣은 문고본을 채서 도망가는 장난을 여러 번 치기도 했다. 남편은 남중, 남고를 졸업했고, 나같은 여자를 아마 처음 만났을 것이다. 생각하건데 아마 남편에게 나는 재밌는 학생이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남편은 정말 오래 내 주변을 머물렀다.


대학교 도서관 1층 한 켠과 2층 중앙에는 티브이 수 십 대와 편집 기계와 비디오 플레이어(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가 놓여 있었다. 초여름 햇살이 도서관 2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1교시를 마치고 도서관 2층으로 올라갔다. 남편은 2층 정중앙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하늘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잘 빠진 어깨와 팔 근육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는 검도와 유도를 배웠는데 검도 때문인지 정말이지 팔 근육이 아주 섬세하고 우락부락하지 않으며 늘씬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면 나는 거기서 어떤 섹시함을 감지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이미 어떤 남학생을 짝사랑하는 중이었다. 그를 N이라고 부르자. N은 키가 크고 쌍꺼풀이 굵게 진 날렵한 체형의 학생이었다. 그는 회계사 시험 준비 중인 1학년생이었고 테니스 선수를 하다가 부상을 당해 테니스를 그만두고 우연히 연극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대학에서 잘나가는 학생들은 보통 테니스 동아리를 찾아가지 연극 동아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연극 동아리는 뭐랄까 독특하고 개성있고 남들과 다르면서, 남들과 달라서 고독한 학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총망라한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동아리에 일본어도 잘 못하면서 일본어를 표준어 발음으로 배우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여하튼 개성파 연극 동아리에 멀쩡한 남학생은 N 하나였다. 그는 자기 개성을 일부러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았고 웃기려고도 하지 않았고 여학생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연극배우가 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항상 많았고, 그는 뭘 해도 다 잘했고 주연이 아니어도 주연을 씹어 삼키는 그런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여하튼 나는 우리 연극 동아리의 다른 여학생들처럼 N이라는 친구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말이 없고 차분한 남편이 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내가 하는 말을 100% 다 들어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연극 동아리에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연극과 영상을 접목시킨 작품을 만드는 것이 연극 동아리 1학년생의 역할이었는데, 남편은 시나리오를 썼고 나는 어쩌다가 총감독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말이 총감독이지, 나는 일본어도 잘 못하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을 뿐이다. 내가 총감독이 된 건 순전히 선배들이 날 점 찍었기 때문인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나를 도와주는 남학생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이 또한 여성혐오의 발로겠지만 한국에서 온 도움이 필요한 여학생이란 점은 일본남성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재료다-“쟤가 전화하면 애들 다 모인다”는 게 내가 총감독이 된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그해 여름, 우리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려고 노래방을 들락거렸고 영화를 만들려고 도쿄의 여기저기를 돌며 촬영을 했고 영화를 만들려고 어느 밤에는 대학교 주변 시냇가를 찾아가 다 함께 불꽃놀이를 했다. 불꽃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는N에게 고백을 했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자기가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이라고 했다. 한국어를 쓰는 나는 새침떼기지만 일본어를 쓰는 나는 웃기는 짬뽕이어서, 내가 N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연극 동아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니까 비켜”가 아니라 “내가 N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쩌지?”라는 식의 고민을 풀어놓았고, 덕분에 아무도 N 곁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그를 좋아하는 다른 여학생들을 물리치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아주 영악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나는 그와 손을 잡고 학교의 여름 축제에 갔다. 그게 다였다. 내 인생을 통틀어 미남과의 연애는 그게 전부였다. 아아, 나의 인생이여! 여하튼 나와 N은 그해 여름 내내 N의 스토커가 된 여학생에게 시달렸고, 우리의 명예와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당시엔 이미 이메일이 발달되어 있었고 우리 대학은 그 최첨단을 달리던 대학이었는데 나와 N에 대한 수상한 소문들이 스토커의 손에 의해 학교에 도배가 되었다-N은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나는 혼자 도쿄에 남아, 연극 동아리 영화를 계속 촬영했고,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해 여름이 끝나고 N은 연극 동아리를 탈퇴해 킹카와 퀸카는 다 모인다는 테니스 동아리로 갔으며 남편은 영화제작동아리로 빠져버렸다.


그럼에도 그해 여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밝은 날들이었고 그 한 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일본에 눌러 살고 있다. 사람은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동물이고, 그 추억은 평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에 머무른다.

연애를 했던 N에게는 헤어진 후 쉽게 무언가를 부탁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만나도 서먹서먹했다. 대신 남편과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연극을 하면 보러 오라고 연락을 했고 밴드 공연을 했을 때도 보러 오라고 연락을 했다. 남편은 매번 연극을 보러 오고 밴드 공연도 보러 왔지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누군가와 연애를 했을 것이고 나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연애도 결혼도 타이밍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주 우연히 재회했다. 남편이 미국에 취재를 갔을 때 연극 동아리 친구를 만났고 그것을 계기로 연극 동아리 멤버들이 모여 회식을 하게 되었고, 남편과 여러 번 만나게 되었다. 결혼도 그런 인연이 이어졌다. 남편과 멀리까지 외출을 했다가, 관광객이라면 모두 가는 과자 가게에 갔는데 마침 거기 시부모님도 여행을 오셨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댁에 불려갔고 시어머니는 결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좋은 사람인 건 알고 있지만 좀 살아보고 결혼하고 싶다”고 당돌하게 말했다. 살아봐도 변함없는 사람이었기에 결혼을 선택했다. 엄마는 “결혼이 인생의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한 번쯤 해보는 것도 괜찮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라고 등 떠밀었다. 학교에 가면 돌아오듯 결혼해도 돌아올 수 있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의 부부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라고 과거형으로 쓴다. 애가 둘일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애가 셋이 되니 나도 바쁘고 남편도 바쁘고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다. 나는 부지런하지는 못하지만 꾀가 많아 일처리를 남들보다 빨리 하는 장점이 있지만 남편은 뭐든 꼼꼼하게 해야 해서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편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내가 하는 일이 남편의 서너 배가 되는 셈이다. 가정적인 것에 별 취미가 없으니 도망치고 싶은 날이 적지 않지만, 아이가 있으니 그런 마음을 꾹 누르는 수 밖에 없다.


남편과 나는 불같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알콩달콩 연애를 했다. 나를 위해 뭐든 해주던-이를 테면 새벽에 깨워도 싫은 소리 한 번 안하고 편의점에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을 사다주던 남편이 이제는 하루 종일 휴대폰만 보고 있거나, 아이들을 혼내거나 쓰레기 한 번 버리는데 이 삼 십 분이 걸리는 걸 보는 게 좀 실망스럽다. 남편 또한 그렇겠지만.

연애를 해서 다행일까 결혼은 독일까 꿀일까.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오늘 하루는 돌아갈 것이고, 가족의 하루 안위를 돌보는 것이 부부의 역할이란 사실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을 것이다. 여보, 우리 그만 좀 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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