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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즘도 극복이 되나요

김민정의 일상다반사(9)

by 김민정

30년을 귀찮아 귀찮아 귀찮아 하며 살아왔다. 밖에 나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누구랑 노는 것도 실은 밥 먹는 것도 귀찮아 하며 살아왔다. 주말에 친구들이 불러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냥 너무 귀찮아서. 귀찮아는 유흥도 애정도 다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예상은 했었지만 육아도 귀찮은 것 투성이다. 모유수유도 귀찮고 기저귀 갈기도 귀찮고 목욕시키기도 귀찮다. 모유수유는 주로 누워서 했다. 손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그래 솔직히 말해 귀찮았다. 배변 트레이닝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집에서는 9시 12시 3시 6시에 아이들을 화장실에 가게 한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주말에 집에서도 똑같은 타이밍에 아이를 화장실에 보내달라고 했다. 가정과 어린이집의 사이클이 맞아야 아이가 기저귀를 떼기 수월하다는 것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이미 진 거야.” 뭐에 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배변 트레이닝 당시엔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 9시 12시 3시 6시에 화장실에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게 어찌나 귀찮던지. 하지만 해냈다. 나도 아이들도.


아이가 좀 크면 이유식도 해야하고, 이유식 시기가 지나면 매일 뭔가를 만들어서 먹여야 한다. 먹는 말든 되도록이면 영양가를 고려해, 채소도 삶고 볶고 무치고, 고기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어릴 때 워낙 안 먹는 아이여서 엄마가 매우 힘들어했기 때문에, 안 먹는 아이가 있다는 것과 안 먹어도 큰다는 것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정한 나의 룰은 밥 하는 건 부모몫, 먹는 건 아이몫이다. 나는 부모로서 음식을 만든다는 의무를 다할 것이지만 먹는다는 의무는 아이여 너에게 있다!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안 먹는 아이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다. 내 것과 네 것, 내 몫과 네 목, 나의 권리와 너의 권리, 나의 의무와 너의 의무를 빨리 파악하고 서로 조율하면 서로를 놓은 법도 알게 된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그 민감한 반응에 웃으며 답해줘야 한다. 가끔은 혼도 내야 한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아아, 벌써부터 귀찮다. 아침엔 항상 기분이 나쁜 첫째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사도 이런 상사가 없다. 몸종이라도 된 기분으로 헤어스타일부터 옷차림까지 다 칭찬해주고 그래도 뾰로통한 표정의 아이에게 오늘도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하고 나면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다. 내 한 몸도 귀찮은데 육아는 정말 귀찮다. 그런데 이런 귀차니즘 속에서도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돌린다.


6시 기상, 세탁기 버튼을 누른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트위터를 본다, 아침을 먹인다(세 아이는 모두 취향이 다르다. 큰애는 빵, 둘째는 밥, 막내는 과일, 그냥 다 똑같은 거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강요하는 게 더 귀찮기 때문에), 빨래를 넌다, 출근을 한다. 이런 생활을 12년이나 하고 있으면, 아무리 귀찮은 사람이라도 귀찮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알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육아는 귀차니즘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는 겁니까? 설마.


7시 기상,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아내가 쓰레기를 버리라기에 버리고 온다, 둘째가 양말을 달라기에 준비한다, 둘째가 물통에 물을 채워달라기에 물을 채워준다, 둘째가 현관에서 부르기에 달려가 아이를 보내고 문을 잠근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고 출근하라기에 몇 개만 해놓고 출근을 한다.


남편의 아침이다. 가끔 버리고 싶어진다. 왜 꼭 시켜야 할까? 주체의식은 이럴 때 필요한 거 아닐까? “나는 신입사원입니다. 이 회사에 오늘 나왔어요”라는 표정으로 부엌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뻘쭘대고 있는 남편을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 <남편을 버렸습니다>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현실에서 남편을 ‘버리는’ 것은 그렇다 쳐도 형사사건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다. “도쿄에 사는 한국인 주부, 남편을….”이란 뉴스가 나지 않기를 바래서다. 아이를 살해하고 목숨을 끊는 여자들이 자주 언론에 보도된다. 남편들은 항상 살아남는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며 버리려면 남편을 버리지, 내 인생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더 단단해야 한다. 내가 나를 더 믿고 나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다짐까지 하고 살고 있다는 걸 남편은 알까? 알리가 없다. 뭐 알고 있어서 남편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만 해도, 남자들 사이에선 이미 공처가니까.


1년 12달 365일 또는 366일, 아침은 찾아오고 별반 다르지 않는 일상이 시작된다. 오늘 코로나 격리에서 풀려 드디어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격리 이전도 격리 이후도 뭐 다를 게 있을까. 코로나 이전과 이후도 다를 게 없다. 나는 집과 회사 이외엔 도통 오가지 못했고 오갈 곳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늦어도 저녁6시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마당에, 어디를 나돌 수 있을까. 저녁을 먹자는 약속은 1년에 한 번 잡을까 말까다. 상영시간이 2시간을 넘어가는 영화는 절대로 보러가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편 영화를 보는 것도 때로는 사치다. 갑자기 밥 먹자는 사람을 만나면 당혹스럽고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는 사람과는 다시는 약속을 잡지 않게 된다.


모유수유를 하던 시절엔 티브이도 음소거로 해놓고, 자막을 보고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일본의 대부분의 티브이 방송에는 자막이 붙어 있다. 뉴스의 경우, 생으로 바로 입력해 방송해주어 가끔 오타도 나지만, 그래도 감사히 자막을 보고 살았다. 시끄러우면 금세 눈을 뜨는 아기를 키우는 사람들은 초인종 소리도 무섭고 드라마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럴 때 자막 뉴스나 자막이 붙은 드라마처럼 반가운 것도 없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땐 <마더>가 방송되었는데, 그 드라마를 나는 1편부터 마지막편까지 모두 음소거로 봐서, 아직도 그 드라마를 생각하면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밑에 깔린 자막만 생각난다.


어릴 때는 몸이 약했다. 한 번은 어쩌다가 간염에 걸렸는데 간염이란 병은 사람을 진정 무기력하게 만든다. 손가락을 움직일 기운도 없다. 숟가락질이 하기 싫다라는 소리를 듣고 엄마는 나를 병원에 데려갔고, 의사 선생님은 간염이라고 했다. 간염은 감염되는 질병이다. 그리하여 나는 6개월간 격리에 들어간다. 안 방 옆에 있던 빈 방이 아빠의 서재였다. 서재라고는 하지만 평소엔 아무도 쓰지 않는 그래서 온기도 없던 방이었다. 그 방에서 6개월을 살았다. 바깥 구경도 못했다는 아니고, 우리집 뒷마당에 토끼풀이 가득 피어 있어서 네잎 클로버를 찾으며 혼자 놀았다. 다섯잎 클로버, 여섯잎 클로버도 찾았다. 찰흙을 사와 장발장이 훔쳤다던 빵을 그림책을 보고 만들어 말린 후, 색까지 칠해서 인형놀이를 했다. 물론 혼자서. 성당에 갔던 기억들을 꺼내와 나 혼자 미사를 재현하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오르간도 하나 있었는데, 그 오르간도 혼자 치며 놀았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낸 후 나는 홀로 한글도 떼고 악보도 볼 수 있는 유치원생이 되어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 혼자가 되어도 조금씩 성장한다. 만두만 먹으며 체력을 닦았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올드보이가 벌써 19년은 된 영화라는 것도 새롭다. 나의 시간은 200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고, 2000년대에 일어난 일들도 모두 ‘요즘’일로 느껴지며 2022년은 거의 가상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간염은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병이어서, 밥을 거의 못 먹어 완치되었을 때 체중은 20킬로가 안 되었고, 유치원에서 귤을 간식으로 줬을 때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돌아왔다. 귤을 까기가 그렇게나 귀찮았다. 먹는 것은 더 귀찮았다. 그 귤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오랫동안 바라만 보던 유치원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별 것도 아닌 일상이었는데 얼마나 그 상황이 당혹스럽고 귀찮았으면 아직도 생각이 날까.


오늘도 눈 뜨기도 귀찮았지만 오늘도 살려주셔서 고맙다는 기도를 하고 일어나 세탁기 버튼을 눌렀다. 곧 빨래를 널고 출근할 것이다. 지난 한 주 아이들과 온가족이 일주일간 격리를 해야 해서,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 보지 못했고, 책 한 권도 읽지 못했다. 그런 날도, 그런 한 주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육아가 나에게 준 어떤 깨달음이겠지. 귀찮다고 말하며 귀찮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날이 언젠가 나에게 또다시 찾아와주기를, 그래 귀찮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보면 축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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