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10)
1980년대 초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고무줄 놀이에 푹 빠져지냈다. 텔레비전은 저녁 5시 반이 되어야 애국가와 함께 시작이 되었다. 5시 반이 되기 전에 텔레비전을 틀면, 컬러바와 함께 클래식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그 클래식에 맞춰 혼자 빙글빙글 돌았다. 텔레비전에 컬러바조차 표기되지 않는 시간엔 주로 고무줄 놀이를 했다. 양쪽 끝을 기둥에 묶어만 둘 수 있다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자세히 보지 않아 어떤 게임이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내가 <오징어 게임>을 기획했다면 분명히 거기 고무줄 놀이를 넣었을 것이다. 다리를 하늘 끝까지 뻗어가며 정신없이 뛰노는 그 놀이는. 영화 <미드소마>에 나올 법한 신들린 듯한 묘한 고양감으로 가득 찬 놀이다. 신기에 취해 부리는 묘기,로 영화에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가사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고 80년대 초등학생들은 이 노래에 맞춰 고무줄 놀이를 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부르던 노래다. 1953년에 육이오가 끝났지만, 1980년대에 우리는 그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 놀이를 했다. 그렇게 전쟁의 기억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도 그 흔적을 남겼다.
일본에도 고무줄 놀이가 있다. 우리는 보통 ‘동서남북’이라고 부르는 그 두줄짜리 고무줄 놀이를 일본에선 ‘1234’(일부는 ‘구파’라 부르기도 한다)라 부른다. 일본의 고무줄 놀이는 노래와 함께 아니라 숫자와 함께다. 즉 뛰면서 “일 이 삼 사” “구 파(묵빠)”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 또한 일본의 전쟁의 흔적 같아 소름이 돋았다(물론 일본에도 동요를 부르는 고무줄 놀이가 있다). 절제되고 정제된 결과로 남은 여백, 일본의 고무줄 놀이는 그렇게 느껴졌다.
2003년 한국에서도 개봉된 일본 영화 <사토라레>를 기억하는 구독자 분이 계실까? 비행기 사고 생존자인 사토미 겐이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사토미처럼 생각이 겉으로 다 드러나는 사람들을 ‘사토라레’라 부른다. 한 번쯤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상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불안감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섬세한 감정을 가진 의사로 성장한 사토미와 사토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교류를 그려냈다. 이 <사토라레>를 그린 만화가 ‘사토 마코토’의 만화 <도망의 F>가 현재 드라마로 일본에서 방영중이다.
<도망의 F>는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지명수배가 내려진 외과의사 후지키 게이스케가 경찰로부터 도망을 다니며 각지에서 최소한의 도구로 수술을 해 환자들을 살리고 여자친구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낸다는 스토리다. 그에게는 주변의 모든 생활도구들이 수술용 도구가 된다. 그의 수술 장면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도 볼거리지만, 그가 각지에서 우정을 쌓는 스토리도 볼만 한다.
후지키는 도망을 치는 도중에 일본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 단지에 잠입한다. 그곳에는 불법체류자가 된 중국인들과 동남 아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후지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믿어준다. 끊임없이 도망을 쳐야 하는 후지키의 입장을, 일본에서 발 뻗고 마음 편히 잘 수 없는 불법 체류자들은 금세 이해한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들어주지 않고 믿어주지 않던 진실을 그들이 이해해주는 것이다.
한편 이 아파트 단지를 노리는 일본인 노숙자들은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빼앗겼다”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신문배달을 나선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의 자전거를 쓰러뜨리고, “고우 홈!”을 외치며 아파트 단지까지 찾아온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불법 체류 외국인들과 노숙자 일본인들이 대치하고 폭력을 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이 출동하고, 경찰을 피해 다같이 도망치던 도중, 한 노숙자가 후지키를 밀어 넘어뜨렸다. 하필이면 거기 비쭉 솟아난 못이 있었고, 후지키는 심한 부상을 입게 된다. 후지키를 넘어뜨린 노숙자가 도망을 치자, 남겨진 노숙자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때 불법 체류 외국인들의 우두머리인 ‘모’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의 잘못인지 명확하다. 당신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당신들을 우리를 마치 새떼를 보듯 외국인이라고 한 덩어리로 보니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당신들 한 명 한 명을 인격을 가진 개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의 용서와 제안에 일본인 노숙자들과 불법 체류 외국인들은 함께 도망을 치기로 한다. 한 일본인이 답한다.
“일본에는 하늘이 보고 있다는 말이 있다. 그 하늘은 태양이란 의미다. 하지만 하느님, 하늘나라로 간 소중한 사람이란 의미도 있다. 하늘에서 언제나 보고 있으니까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일본인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라고 한 외국인이 묻는다.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군.”하고 일본인이 대답한다.
일본 드라마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그 외국인이 일본인들에게 ‘상대방을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까지 한다. 외국인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이렇게 중요한 대사를 맡긴 드라마도 거의 처음이 아닐까?
요즘은 일본에서도 불법 체류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내가 일본에 온 1990년대, 그리고 내가 일본에서 취재를 막 시작한 기자였던 시절인 2000년대에는 ‘오버 스테이’라는 단어를 썼다.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일본정부가 정한 체류 기간을 넘긴 사람들이란 의미다. 불법 체류자라는 단어가 법을 위반했다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면, 오버 스테이는 어쩔 수 없이 오랜 기간 체류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 와서 살게 된 외국인들이 정해진 기간을 넘겨 일본에 거주하는 케이스는 다양하지만 ‘오버 스테이’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이유가 사정이 있을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도적이다.
4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면 내 수업에서 한 번 꼭 거치는 것이 있다.
바로 “일본인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를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일본 국적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부모가 일본인인 사람?
조부모가 일본인인 사람?
그럼 부모 중 한 사람이 외국인이면?
테니스 오사카 나오미 선수는 언제까지 외국인이란 소리를 들어야 할까?
재일동포처럼 한반도 출신자의 후예는 어떨까?
일본인의 배우자는?
다 커서 일본에 와서 일본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일본인보다 일본의 역사와 정치,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일본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DNA인가, 국민성인가, 아니면 핏줄인가?
아무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일본인이라 믿고 살아간다.
한국어를 가르치다보면 어쩔 수 없는 한일관계의 역사에 봉착하게 된다.
어학을 가르치는 것이 전문이라 한일의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고 그로 인해 벌어질 미묘한 신경전도 겪지 않아야 해서 수업에서는 늘 조심하는데, 나의 수업에는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밝히지 않았을 수많은 학생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자신이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의 정체성의 고민을 조금 덜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형편없는 개념인가를 조금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개인이다. 우리가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의 영향은 당연히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듯,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그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
가끔 흥얼거린다, 김민기의 노래를.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전쟁을 멈추라.
세계고무줄놀이협회를 만들어 전세계 어린이들과 각국의 고무줄 놀이를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평화를 찾고 싶다. 그렇게 큰 아이들이 자라서 어딘가에서 만나, “나도 그 고무줄 놀이 알아”하며 다시금 우정을 다질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 싶다. 부지런하게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