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11)
아침에 일어나 묵주신공을 드린다. 지인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취했더니 “기도만 한 번 더해달라”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을 외우다 문득 왜 하느님은 아들을 단 한 명만 보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읊다가 든 생각이다. 나라마다 한 명씩, 적어도 100명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외아들 하나만 보내다니, 자식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닐까? 하지만 만일 100명의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면, 동정 여성 100명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아들 하나만 보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단 한 명의 마리아 님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린데, 마리아 님이 100명이라면 좀 아찔하다. 지인의 아버님이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바란다.
내가 일본에 사는 사이 한국 성당의 기도문들에는 변화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사도신경의 ‘동정녀 마리아’가 ‘동정 마리아’로 바뀌고, 주기도문의 ‘우리’가 ‘저희’로 바뀌었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가 어느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다. 크라이스트가 되지도 않았고, 크리스토가 되지도 않았다. 왜 ‘그리스도’가 되었는지도 참 궁금하다. 중국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基利斯督(기리사독)이라 표기했고, 일본은 이를 차용해 키리스토라 불렀으며, 한국은 그리스도, 그리고 기독교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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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자신의 장례를 성당에서 치러 달라고 하셨다. 엄마는 어릴 적에 벨레뎃다(베르나데트)란 이름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엄마는 이 이름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실비아라는 세례명을 붙여주었다- 초등학생 때는 성당에서 결혼하는 부부들을 위해 매주 들러리로 일했으며(용돈을 받았다고 한다), 결혼식도 성당에서 올렸다. 그런 엄마가 자신의 마무리를 성당에서 해달라고 한 것은 놀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성당에선 호적과 같은 ‘교적’이란 것이 있어서 냉담자의 경우엔 신자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장례 미사를 치러준다기에, 한국의 성당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해 엄마의 교적을 확보하고, 그걸 일본으로 옮겨서 엄마가 원하는대로 보내드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늘 빙산의 일각이다. 나는 항상 발을 버둥거리며 산다. 가능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싶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교적을 여기저기 수소문해 찾아낸 나의 소소한 공적따윈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그런 소소한 일들을 소소하게 성사시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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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있었으면 무엇을 했을까? 아이들을 봐달라고 했을까? 그러면 엄마는 “내가 너희들까지 키웠는데 이젠 애를 봐달라고? 얘, 나는 못한다”고 차갑게 밀어낸 후, 아마 내내 신경이 쓰여 아이들을 보러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하고 자신의 인생보다 자식의 인생, 그리고 손자들의 인생까지 떠맡게 된 것을 살짝 후회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로부터 누구보다 당당하게 너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말을 듣고 컸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엄마는, 돈 세는 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손이 빠르고 일도 잘했지만, 모델을 꿈궜다. 우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델사무소 담당자는 47킬로도 안 되던 엄마에게 살을 더 빼라고 제의했고, 엄마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해 더이상 모델 연습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여하튼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자신과 일로 성공하고픈 자신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며 살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엄마가 살아계시면 올해로 일흔 셋이다. 엄마가 살아계시고 건강했다면 나는 당장 엄마 손을 잡고 전망이 좋은 도쿄의 호텔에 머무는 호캉스를 즐겼을 것이다. 코로나 19가 없다는 전제하에, 서울로 날아가 엄마가 살았던 신설동을 엄마와 함께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 달콤한 디저트들도 듬뿍 엄마 입에 넣어드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짬뽕을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처럼 매주 먹으러 갔을 것이다. 엄마가 싫어하는 극장에도 억지로 끌고 가 요즘 개봉 중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고 과거의 그 작품과 비교해 대화를 나누고,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도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영국에 입국해 기차를 타고 프랑스에 갔다가 이탈리아에도 갔다가 스페인까지 갔다 다시 일본에 돌아오는 석달간의 긴 여행도 가고 싶다. 엄마가 있었으면 매일 아침 신선한 채소와 과일로 스무디를 만들어 함께 마시고, 동네 스포츠센터에 가서 같이 운동도 하고 저녁엔 장을 봐 집으로 돌아와 진수성찬을 차려 아이들과 함께 먹었을 것이다. 엄마가 있었다면,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에 가서 아이쇼핑을 마음껏 즐기고, 비싸고 예쁘기만 한 별로 쓸모없은 것들을 사와 신나게 언박싱하며 유투브도 찍어보고, 같이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야나카 커피의 갓 볶은 원두맛을 보여주고, 인스턴트 커피나 커피믹스면 충분하다는 엄마와 또다른 세상을 같이 나누고 싶다.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일본어 학교에도 보내드리고, 오늘처럼 햇살이 따사한 날에는 엄마와 함께 스케치북과 물감을 들고 공원으로 가 같이 그림도 그려보고 싶었다. 우리가 그렇게 신나게 봤던 <순풍산부인과>를 재시청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며 함께 분노하고, 때로는 남편 욕도 하고 때로는 아이 키우는 힘겨움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나이듦을 안타까워하고 엄마는 나의 나이듦을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어주었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보니 같이 못해본 게 너무 많아, 여전히 후회가 된다. 같이 살면서도 왜 함께 인생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일상은 그렇게 우리를 고단하게만 만들었을까? 삼시세끼 먹고 치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삶에서 엄마와 나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많은 것을 나누지는 못했다. 내가 오래전에 낸 <엄마의 도쿄>를 읽은 독자분들중에는 “엄마와 많은 것을 같이 해서 좋았겠다”는 감상을 남겨주시는 분들이 많다. 엄마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것 같은데, 돌이켜보니, 부족하다는 생각만 든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의 인격이나 나의 성격, 나의 부족함을 일일이 찾아내 지적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의 정의감은 어떤 식으로든 타고 나는 것이어서,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정의롭다고 여겨진다. 정의로움은 그래서 제대로 쓰여질 때도 있고, 잘못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를 받아들여줄 사람을 만나지 못해, 모든 걸 혼자 즐기며 살고 있다. 그나마 혼자 즐길 정신적인 여유가 있으니 다행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 어떤 추억을 남겨줄 수 있을까? 아이와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 좋은 기억은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그 좋은 기억을 여럿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그 기억들이 또 하루를 살게 할 것이다.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여러가지인데, 내가 볼 때 추억, 책, 친구는 빠뜨릴 수 없다. 가족과의 좋은 추억, 친구들과의 추억, 연인과의 추억들은 아주 짧지만 강력하여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책이야 늘상 우리 곁에 있어서 나보다 더 힘겨운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지혜롭게 버티고, 때론 무너지면서도 자존감과 신념을 잃지 않은 주인공들의 인생이 역시나 삶에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친구나 지인, 또는 가족들은 현실을 영위하게 해주는 크나큰 존재이다.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 내 편을 하나 둔다는 것은,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을 늘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것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큰아이는 요즘 부쩍 나 몰래 화장품을 사온다. 자꾸 숨기기에 아는 척을 하기도 쉽지 않다.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큰다. 초등학교 졸업식날에는 같이 애프터눈티를 먹으러 가서 화장품도 좀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작은 추억들이 가슴에 새겨져, 아이가 힘들 때 부모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11년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가 있었으면 무엇을 했을까, 엄마가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고, 때론 얼마나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을까. 그런 것들을 마냥 상상한다. 엄마처럼 많은 인스피레이션을 주는 인물은 없다. 엄마는 항상 궁금하고 또 궁금한 존재다.
엄마가 있는, 부모님이 계시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 오늘도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기도드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