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가치

서울여자 도쿄여자 #06

by 김민정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도쿄는 장마철입니다. 불쾌지수가 치솟고 있습니다. 시원하게 비가 뿌려주면 좋으련만, 하늘만 흐리고 기온은 연일 30도에 가깝습니다. 뉴스에선, 올여름 물부족 심각에 대해 여러번 이야기 합니다.


막내를 낳고 5개월, 퉁퉁 불은 몸에 재킷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팔 부분이 껴서 불편합니다. 이 더운 날 젖으로 불은 가슴을 브래지어로 묶고 정장을 입으면 금세 땀이 흥건해집니다. 왜 정장이냐고요? 저는 취업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작년까지 제가 다니던 회사의 번역 파트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게 되면서,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어린이집은 부모가 맞벌이를 해야만 보낼 수 있는 규정입니다. 저처럼 직장을 잃었을 경우, 2달 사이에 재취업을 하지 않으면 어린이집 퇴소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서라도 저는 재취업을 해야할 형편입니다. 일을 해서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집을 위해서 취업을 해야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입니다.



만일에 아이가 어린이집을 나오게 되면, 대기자가 2만명이 넘는 상황에서 다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퇴소하게 되면 저는 다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일본의 현실은 가혹합니다.


여하튼 저는 정장을 입습니다. 여기는 드레스코드에 민감한 나라입니다. 결혼식 하객은 드레스를, 장례식 조문객은 검정색 투피스에 한 줄로 된 진주 목걸이를, 입학식의 부모는 밝은색 정장을, 취업활동을 할 때는 누구나가 감색이나 검정색 정장을 입습니다. 조금의 예외도 없습니다. 가방부터 신발까지 취업활동용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 똑같은 복장을 해서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기업들은 이 개성없음을 선호합니다. 취업활동이란 틀에서 똑같은 복장을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처럼 보입니다. 똑같이 입은 학생들 중에서, 즉 복장에서 나오는 센스며 격차는 보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겠다는 포부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인 예의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인지를 복장에서 보고, 같은 복장이기 때문에 더 깊은 그 내부를 볼 수 있다고 믿는 게 일본기업입니다.


저는 오래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일본어로 글을 써온 외국인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일본인들은 국적이 다른 제가 일본어로 글을 써왔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런 저를 쉽게 채용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못미더우니까요. 다른 직종에 취업을 하기엔 이미 마흔입니다.


저에게 마흔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열심히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마흔인 애 셋인 여자에게 일을 가르칠 생각은 없어보입니다. 직업상 남녀차별 철폐법은 1980년대에 이미 통과되었고, 일부 대기업은 이력서에 대학 이름을 쓰는 걸 금지할 정도로 학력 기준 채용을 그만두었지만, 나이를 보지 않는 회사는 없습니다. 바늘구멍을 통과할 낙타. 저는 그 낙타가 되어야지만 채용에서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이를 먹는다는 것.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봐도 그렇고 누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채용이란 문 앞에서 이 자연스러운 현상은 그저 족쇄에 불과합니다. 저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면접을 보면, 결혼을 했느냐고 묻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지금까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일본 회사는 직원을 뽑을 때 개인적인 상황은 잘 묻지 않습니다. 아이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다만 저의 나이와 외모를 보고 짐작할 따름입니다. 얼마전 모 회사 담당자는 남편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면접은 처음입니다. 저는 솔직하게 "방송일을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면접관은 저에게 "남편 수입이 좋을 텐데 왜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반문 했습니다. 주변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얼마전 제 친구도 저에게 "남편이 좋은 직장에 다녀서 일할 필요가 없을 텐데, 왜 일을 하려고 해?"라고 묻더군요. 왜 저는 일을 하려고 할까요?


저는 직장이 자아실현의 장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해 직장을 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했지만, 기사는 한 번 나오면 사라지는 소모품입니다. 모든 글이 어쩌면 한 번에 소비되고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느 직장이든 제가 있어도 잘 돌아가고 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어도 잘 돌아갑니다. 꼭 저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지요.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회란 그런 곳이고,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저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돈을 받으며 일하는 것이 하나의 가치인 사회입니다. 네, 저도 돈을 받으며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데 보탬이 되고 싶고, 제 비자금도 좀 챙겨두고 싶고, 아이들과 여행도 하고 싶습니다. 즉 저의 행복권을 위해서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남편이 누구인지, 남편의 직장이 어디인지, 남편이 얼마를 버는지로 저의 가치가 정해지는 걸까요? 남편의 수입이 그럭저럭 괜찮은데 일을 하려는 건, 저의 아집 때문일까요? 왜 남자가 일을 하는 건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제가 일을 하려면, 가정을 지키는 것이 먼저라는 시선을 받아야 할까요?


아이를 키우는 일은 즐겁습니다. 세 아이 모두 제각기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저는 그 아이들의 개성과 특성을 살피고 사회와 어우러져 사는 길을 도모하고 싶어요. 아이를 키우는 일은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지만, 그보다 가치가 있는 일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무서워요. 지금 누군가가 저를 남편의 직장으로 평가하듯, 아이들이 크면 아이들의 성공 척도에 따라 저를 보고, 제 가치를 평가하겠죠. 아이가 잘 되면, 제 가치가 올라가고 만일에 아이가 사회에 조금이라도 적응하지 못 하면 제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


어떤 엄마들은 아이를 열심히 학원에 보냅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아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부모로서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들은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엄마'로 통틀어 불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엔 아이의 성적에 따라 '성공한 엄마' '실패한 엄마'로 나뉩니다.


아내가 된 순간 여자는 남편의 성공에 따라 그 가치가 갈리고, 아이가 태어난 후엔 아이의 성적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 됩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게 현실이란 사실을 아이를 키우고 면접을 보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당혹스럽고 불쾌한 현실입니다.


"현실을 보세요. 김민정 씨는 집에서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아이도 셋이잖아요."

면접관은 마지막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솔직한 면접관은 처음 봤습니다. 다른 면접관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저에게 입도 벙끗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네, 현실을 보면 저는 아이를 보며 틈틈히 기사를 쓰고 집안일을 하는 게 더 쾌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에 나가고 싶어요. 그 정도 꿈을 꾸는 것도 사치인 걸까요? 2016년인데. 저에게 부여된 삶이 앞으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저는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아이를 키우면서요.


사회가 보는 저는 '마흔이란 나이의 애 셋 있는 한국여자'입니다. 어디를 봐도 마이너스 이미지입니다. 게다가 취재를 하고 글을 써본 경력 밖에 없습니다. 번역을 하고 통역을 하고 자막을 달았던 경력들. 제게는 소중한 경력이지만, 이런 전문적인 일의 입구는 늘 생각보다 무척 좁습니다. 여간한 인맥이 있지 않고서야 제가 앞으로 회사에 취업할 가능성은, 코 안에 수박넣기보다 어렵겠지요. 게다가 '일본어로 글을 쓰는 한국여자'는 일본인들에겐 환상 속의 존재일 뿐입니다. 글을 쓰는 일을 맡기기엔 어딘가 못미더워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당분간은 취업활동을 해보렵니다. 도쿄의 여름은 무척이나 덥고 정장으로 비오듯 땀을 쏟으면서. 되든 안 되든 삶이 계속되는 한, 계속 앞으로 나아가 보렵니다. 물론 글도 열심히 쓸 것입니다. 언젠가 글로만 먹고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면, 저는 너무 속물인 걸까요?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진 여인들에게, 시원한 비같은 행운이 가득 쏟아지길 바라며.


도쿄여자,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