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07
도쿄도청 전망대.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전망대에서 사람들은 어디를 보는 걸까요? 먼 하늘을 바라보는 걸까요? 일본이 상징인 후지산에 열광하는 걸까요? 저는 전망대에 오르면 바닥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까마득한 아래에 옹기종기는커녕, 빽빽하게 꽉 찬 집들. 아파트, 단독주택, 회사, 도로. 빈 공간은 1%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도쿄란 도시는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고 가득차 있을까요? 저 역시도 도쿄의 인구 밀도를 높이는 주범입니다.
저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관람차에 타지 않으며, 전망대에도 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높아서 숨이 막히고,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로 인해 가슴이 조이는 순간. 마치 죽음을 떠올렸을 때와 같은 그 막막함이 느껴져도 숨도 쉴 수가 없어요.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 친구도 없었습니다. 친구네 집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걸어야 했어요. 게다가 아이들은 모내기도 돕고 때로는 식사 준비도 했습니다. 저는 주로 혼자 달팽이를 보거나 개미를 보며 상상력만 키웠습니다. 키작은 나무에서 달팽이를 찾습니다. 달팽이를 찾는데만 길게는 10분쯤 소요됩니다. 그 후엔 그 달팽이의 움직임을 바라봅니다. 나무 위로 열심히 기어올라가는 모습. 날이 너무 맑은 날엔, 꼼짝없이 말라버린 달팽이가 달라붙은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생명이 다한 말라버린 달팽이. 조금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면 이파리 뒤에 숨어 땡볕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달팽이가 없을 땐 개미를 찾습니다.
개미들은 떼를 지어 다닙니다. 나뭇잎을 들고 가기고 하고, 어디선가 먹이를 찾아내 들고 가기도 합니다. 비스킷 조각을 떨어뜨려봅니다. 금세 몰려드는 수십마리의 개미들.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어디론가로 운반합니다. 조금만 지켜보면 개미집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무너무 무료했던 어느날, 저는 개미집에 호스로 물을 뿌리기로 합니다. 개미가 너무 많아 징그럽다는 이유로. 또는 그저 제 자신이 너무 무료하단 이유로. 개미집은 무너지고 개미들은 쉴새없이 물에 떠내려 갑니다. 아마 죽은 개미도 있겠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개미도 있겠지요. 저는 왜 개미집에 물을 뿌려댔을까요? 뒤늦게 후회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 후회합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답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개미떼의 죽음이 제가 관여한 첫번째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친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잇달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밭을 매고 있던 날, 누군가가 달려와 할머니의 부고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종이꽃으로 만발한 화려한 상여가 동네를 돌아 선산까지 갔습니다. 상여는 할머니의 몸보다 스무배는 컸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가마를 타고 세상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사람이 죽는다는 걸 만 여섯의 나이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열 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3년은 아빠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몰래 카메라', 네 몰래 카메라처럼 아빠가 어딘가에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3년이 지나도 아빠는 "아하하하, 이거 다 몰래 카메라였어, 놀랐지?"하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0년이 지나도 아빠는 몰래 카메라의 봉인을 풀지 않았어요.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모를 아빠의 환영은 조금씩 조금씩 엷어져갔습니다.
"죽으면 끝이야."
엄마가 말했습니다. 엄마는 모태신앙의 카톨릭 신자였고, 어릴 때부터 성당에서 살다시피 해왔습니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 이후, 냉담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몰래 카메라의 봉인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마는 저보다 먼저 간파했고 그 후 예수님이나 하느님의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스티브 호킹 박사가 "천국은 없다. 사후 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호킹 박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물론 호킹 박사는 자신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이런 결론을 냈을 터이고, 저는 그저 심증으로 왠지 천국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뿐입니다. 정말로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면 사회에 이토록 잔인한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가 없을 것 같고, 윤회가 있다면 갑작스럽게 인구가 증가하는 걸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고, 하느님이 있다면 이렇게 쉽게 좋은 사람들을 데려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리석은 저의 아무런 증거도 없는, 그저 그런 심증일 뿐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히고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제 뇌가 멈추는 순간, 삶과 헤어짐을 고하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두뇌가 깜박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 것도 없다."는 스티브 호킹 박사의 말처럼요.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전망대 꼭대기에 선 느낌입니다. 그것도 밖에. 마치 지금부터 빌딩과 빌딩 사이로 줄타기를 시작하려는 겁많은 곡예사처럼. 저는 절대로 줄을 타지 못 하고 도망칠 것입니다. 숨이 턱 막히는 그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어요.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만 흐릅니다. 천국이 있다고 차라리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윤회라도 있다고, 연옥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오사카에는 사지가 불편한 재일동포 연극인 김만리 씨가 살고 있습니다. 김만리 씨는 1953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입니다. 어머니는 한국무용의 대가 김홍주 씨입니다. 김만리 씨는 3살 때 병으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지금도 24시간 간병인의 도움이 필요한 중도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김만리 씨는 어머니의 춤을 보고 자랐습니다. 자신의 다리가 멀쩡하지 않지만, 그런 자신의 개성을 활용해, 장애인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극단 다이헨은 중도 장애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들만의 춤을 추는 퍼포먼스 극단입니다. 가끔 도쿄에서도 연극을 무대에 올립니다. 저는 몇 년 전 김만리 씨의 워크샵에 참여했습니다.
"누워서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죽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 워크샵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입니다. 누워서 눈을 감고 죽음을 생각하니 제가 지면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역시나 눈물이 철철 흘렀습니다. 죽음 앞에서 저는 두려움과 후회 밖에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아직 못 해 본 게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끝나다니. 너무나 후회스러워서, 그리고 죽음 이후를 상상할 수 없어서 두렵고 또 두려웠습니다. 죽음을 상상한 후에는 손 발을 풀고 머리를 들어, 새로운 탄생을 맞이합니다. 그게 김만리 씨만의 워크샵이었습니다.
삶은 단 한 번뿐입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저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에게 늘 행복하냐고 묻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같이 고민하고 같이 행복해지자고 말합니다.
만일에 아이가 사후 세계를 믿는다면 더더욱 그 미래의 천국을 위해서, 우리 지금 더 행복하자고 말합니다.
아이는 4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하늘에 산다고 믿습니다. 가끔 "엄마 오늘도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있었을까?"라고 묻습니다. 저는 "물론이지,"하고 답합니다. 저희 엄마가 오늘 우리를 봐 주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지만 그런 희망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전망대에 오릅니다. 아이가 외할머니를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그건 전망대와 하늘의 거리이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모든 살아가는 이와 모든 죽은 이들에게 평안이 가득하길 바라며
도쿄여자 김민정
김만리:
1953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3살때 병을 앓아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21살 때부터 자립해서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24시간 간병인이 필요한 중도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이런 여성이 어떻게 춤꾼이 될 수 있었느냐, 매우 궁금한 일입니다. 김만리의 어머니는 김홍주씨는 한국무용의 대가로 동포사이의 유명인사였으며 한국에 살았으면 인간문화재감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무용을 멀리서 보는 것이 김만리의 낙이었고, 그녀는 어른이 된 후 간신히 움직이는 상반신만으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그녀의 무용은 삶의 절망과 절실함, 그리고 희망을 상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