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서울여자 도쿄여자 #08

by 김민정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여름이불을 꺼냈습니다. 아이가 이리저리 덮어봅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겨우 여름이불을 꺼냈을 뿐인데 냄새도 맡아보고 차가운 느낌을 온몸으로 느껴봅니다. 이불 한 켠에서 아까부터 오리털이 삐져나옵니다. 잘 보니 작은 구멍이 나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엔, 이런 상황에선 이불을 버리고 다시 사기도 했습니다. 오래 덮었으니 새로 사라는 계시야. 아이가 셋이 된 후론 되도록이면 고쳐 씁니다. 얼른 바늘과 실을 가져와 꿰맵니다.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아이는 "엄마 대단해!"라고 추켜 세웁니다. "그치? 엄마 대단하지?"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엄마는 계절마다 이불 홑청을 새로 바꾸었습니다. 하얀 홑청을 바꾸는 날이면 제 기분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름의 까실한 느낌도 겨울의 포근한 느낌도 좋았습니다. 요즘은 간단한 커버지만, 그 시절엔 꿰매서 쓰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겨울에는 뜨개질도 많이 했습니다. 실을 사서 한 번 풀렀다가 동그랗게 마는 일은 번거롭지만 하나의 놀이였습니다. 저는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양 손에 실을 감아 갑니다. 그렇게 한 번 풀은 실은 다시 둥그런 공모양이 되었다가 벙어리 장갑이나 모자, 스웨터가 됩니다. 그때는 세타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식 발음이지요. 엄마가 뜬 세타는 목 부분이 까칠해서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의리로 매일 입었어요. 목 부분이 빨개지는 걸 감수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한 벙어리 장갑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벙어리 장갑이 싫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겐 벙어리 장갑이 무척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었으니까요. 엄마는 투박하면서 멋스러운 걸 좋아했습니다. 저는 어른스럽고 화려한 스타일을 좋아했구요.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동네에는 아이스크림의 콘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의 그 밑에 있는 콘 말입니다. 주연은 아니지만, 아이스크림에서 빠지면 서운한. 구멍가게도 흔하지 않은 시골이어서 콘을 사다가 간식 대용으로 먹는 집이 많았습니다. 서울에서 온 엄마는 꼭 콘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주었습니다. 엄마는 콘만 먹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엄마만의 '미의식'이 아니었을까요. 그 콘 공장에는 열명쯤 들어갈만한 카운터 석의 분식점도 아니고 술집도 아닌 그런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 가게에서는 핫도그를 팔았습니다. 소시지에 밀가루를 뭍혀 튀긴 핫도그. 기름 범벅이 된 딱히 맛난 음식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그 공장의 그 가게에서 그 핫도그를 사주었습니다. 그 허름한 가게는 낮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엄마와 가게 주인 여자와, 저뿐이었습니다. 유리창에는 살짝 금이 가 있거나 깨진 곳도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아마 창틀은 빛바랜 녹색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 주인여자와 엄마는 가끔 수다를 떠는 사이였겠지요. 엄마는 그 가게에서 살짝 담배를 피웠는지도 모릅니다. 서울에서 시골로 시집 온 엄마에게, 갈만한 곳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시내에는 오일장이 섰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사는 것도 없이 그저 배회했습니다. 엄마에게 옷은 옷가게에서, 먹는 것은 음식점에서가 정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떡 말고는 길거리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엄마 같은 사람은 오로지 엄마 혼자였습니다. 오일장을 눈으로 구경하고, 농협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고깃간에서 고기를 삽니다.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작은 장난감 가게입니다. 그 가게에는 저와 나이가 똑같은 선미라는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도 저도 수줍음이 많아서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늘 "사고 싶은 거 아무거나"라고 말합니다. 소심한 저는 고르지 못합니다. 남동생만 늘 엄마의 예산보다 가격이 센 걸 골라서 엄마를 곤란하게 만듭니다. 남동생은 "사고 싶은 거 아무거나"에도 때가 있다는 걸 모릅니다. 생일, 크리스마스와 그저 평범한 날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남동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다른 걸 추천합니다. 남동생은 고개를 흔듭니다. 엄마는 안된다고 재차 말합니다. 남동생은 드러눕습니다. 엄마는 "버리고 가겠다"고 정말 남동생을 두고 나섭니다. 저도 따라 나섭니다. 드러누운 남동생은 엄마와 제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나 뛰어옵니다. 엄마는 늘 냉정합니다. 안된다는 선을 넘으면, 모자의 인연이라도 끊겠다는 듯 단호합니다.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집 뒷문으로 연못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 연못에 가서 돌맹이를 던집니다. 몇 번이나 물 위를 튕겨 가는지, 연습하고 또 연습합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여섯 번을 넘기지 못합니다. 통통 튀던 돌맹이가 조심스럽게 가라앉습니다. 그 연못은 아직 있을까요? 그 연못엔 제가 던진 돌이 조용히 앉아 다시 해를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모내기 전에 논에 물을 받은 후, 아빠와 할아버지와 삼촌은 그 논에 배를 띄워 낚시를 합니다. 논이 한 두 마지기가 아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동네가 물에 잠길 듯 합니다. 미꾸라지며 잉어가 나옵니다. 아빠는 그렇게 잡은 잉어를 욕실의 탕 안에 둡니다. 욕실 문을 열면 잉어가 꼬리를 칩니다.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잉어가 욕실에서 미친듯이 발버둥 치는 게 두려워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했습니다. 아빠는 간혹 사냥도 갑니다. 아빠가 원하는 건 꿩인데 꿩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자꾸 참새가 떨어집니다.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장마철에는 논의 수로를 따라 오소리가 떠내려 오기도 합니다. 장마에 이기지 못하고 목숨이 다해 물살에 실려 갑니다. 물뱀이 사는 강이 있었습니다. 시골 아이들도 뱀이면 기겁을 합니다. 그렇지만 도마뱀은 또 달라서 꼬리를 잘라야만 성이 차는 아이도 있습니다. 잠자리 날개를 떼내어야만 성이 차는 아이도. 남의 집 벽에 상스러운 욕설을 써야만 성이 차는 아이도. 40년 전 시골의 아이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잔인하면서 순진하고, 아이이면서 어른인,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봄이면 까치가 날아와 집을 지었습니다. 한 번도 박씨를 물어온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반가운 손님이었습니다. 초여름엔 손가락만한 작은 청개구리가 마루 위에 올라와 제 발을 간지럽힙니다. 방의 창문을 열어놓으면, 길을 잃은 참새가 멋모르고 방 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하늘을 훨훨 날던 참새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벽 여기저기 부딪힙니다. 엄마는 살려주려는 거니까 조용히 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는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저는 아카시아 향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카시아 꽃을 따서 먹기도 했습니다. 봄이 되면 아직도 아카시아 향기가 그립습니다.


이제 제가 살던 곳은 공장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여름에는 논의 푸르름이 마음을 가득 메웁니다. 가을에는 그 황금빛이 또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어디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요.


다음에 한국에 가면 공장이 들어섰다는 그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딱히 실망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혀 계시는 성당의 묘지도 둘러보고, 아빠 묘지도 가보고 싶습니다. 사람도 마을도 변합니다. 세월은 그렇게 내리는 것이겠지요.


우리 아이는 커서 무엇을 기억할까요? 도쿄의 뜨거운 여름일까요? 하늘하늘한 벚꽃으로 수놓인 봄일까요? 도쿄라는 도시에 사는 아이는 과연 무엇을 기억할까요? 제가 오늘 이불을 꿰맨 일을 아이는 기억할까요? 저는 아마 아이에게 한 번도 벙어리 장갑을 만들어준 적이 없는 엄마가 될 텐데, 아이는 그럼 저의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도쿄여자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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