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09
저녁에 연극을 보러갈 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집안일을 모두 끝내야 합니다. 설거지와 청소는 그나마 할만 합니다. 가장 귀찮은 일은 세탁입니다. 세탁은 세탁기가 해주지만 널고 개고 치워야 합니다. 어른 둘에 아이 셋. 막내는 태어난지 5개월입니다. 매일 옷을 적어도 두 번 갈아 입습니다. 작은 거즈 손수건은 하루 열 개도 더 씁니다. 만 3세 둘째는 어린이집에 다닙니다. 어린이집에서도 하루 두 번 옷을 갈아 입습니다. 그 외에 손수건 3장(손닦는 용, 점심식사용, 간식식사용)과 앞치마 2장을 사용합니다.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옷을 여러 번 갈아입지는 않지만 손수건 등등 역시나 빨 것들이 많습니다. 가족이 5인이면 하루에 쓰는 수건이 최소 5장입니다. 매일 빨래를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저는 신데렐라를 그저 놀면서 집안일 하는 어여쁜 아가씨쯤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집안일을 주체가 되기 전까지는. 신데렐라가 그저 부모가 없어서 고독하고 무도회에 가지 못해 서글펐겠구나 정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제가 주부가 되어보니, 신데렐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걸 느꼈고, 왕자님이랑 백 번 결혼한들 반대할 의사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당신 대단한 여자야!
집안일의 주체로서, 저녁에 약속을 잡으면 빨래 청소 설거지, 아이 목욕까지 약속 시간 전에 모두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12시 이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야 합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또 가사를 도맡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신데렐라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이런 여성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엄마는 12시의 신데렐라입니다. 수유도 해야하는 저에게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은 2-3시간이 한계입니다. 저는 2시간짜리 신데렐라죠. 12시고 뭐고, 집을 나서서 2시간 안에 다시 집에 들어와야 합니다. 아이의 목숨이 제 가슴에 달려있으니까요. 신데렐라의 12시간 시간 제한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신데렐라는 가사에서 구원해줄 왕자님을 기다립니다. 왕자가 그녀를 구원하는 댓가로 얻는 것은 섹스겠지요. 어떤 연구가는 신데렐라의 구두를 섹스의 표상으로 해석합니다. 여하튼 아주 오래전 수많은 여성들이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을 꿈꾸었고,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와 결혼을 해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또다른 구속이었겠지요.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모두 왕자의 캐릭터는 부각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가사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인 것이 중요하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사노동의 지옥에서 가족이란 무게에서 구원해줄 인물. 그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왕자와 같은 지위가 아니면 어렵다는 게 아닐까요. 결국 수많은 여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해줄 왕자의 숫자는 적고, 그 왕자가 정말 왕자여서 실제로 구원을 해주는지도 미심쩍은데다 정말로 끝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신데렐라는 현실도피를 원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상상의 세계의 왕자만이 구원해 줄 수 있는 현실을 사는 여성들의 환상입니다. 언젠가 왕자가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지요. 가사 노동에 치여본 사람만이 신데렐라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삶의 무게를 덜어줄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요즘 신데렐라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빨래는 적을수록 좋고, 요리는 밖에서 사 먹으면 그만인 세대입니다. 그런 여성들이 4인 가족의 무게를 짊어지기를 포기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신데렐라의 오랜 꿈은 그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학습해온 DNA가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왕자도 꿈꾸지 않으며, 새로운 세대를 열어가 신데렐라가 이 세상을 당당히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결혼을 꿈꾸지 않았지만 결혼을 했고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데 세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삶을 사랑합니다. 매일 최소 5장의 수건이 나오며, 수유로 인해 쪽잠으로 피곤을 달래는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왕자를 꿈꿔본 적은 없습니다. 복권이 당첨되면, 주택론을 갚고 글만 쓰는 삶을 살고 싶은, 그런 꿈은 하루에도 수십번 꿔봅니다. 동화 속 왕자님을 만나지 못한 여인들은 홀로 당당하게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저는 남편과 아이들과 티격태격 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결혼을 한 여인들도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들도 응원하면서.
세상의 모든 신데렐라들에게
도쿄여자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