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36)
사람을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기본 변덕스럽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외향형이라 분류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 발언을 부정하고 내향형이라고 정정한다. 그랬다가 또 아, 알고 보니 외향형이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길 부추긴다.
나란 인간은 기본이 내향형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관계 귀찮음형이리라.
아침에 일어나 가족의 얼굴을 봤을 때 웃으면서 “잘 잤냐?”는 말을 하기 위해 열 여덟 해를 보낸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아침에 깨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쉽게 웃지 못했다. 엄마는 항상 밝게 인사를 건넸는데, 나는 깨움을 당했다는 사실이 내내 못마땅했다. 잘 자는데 깨워서가 아니다. 나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 나는 독립적인 어린이인데 그 독립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그 독립성을 보여줄 기회를 빼앗은 엄마에 대한 배신감 같은 기분이 범벅이 되어 웃을 수가 없었다. 고2쯤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침대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좋은 아침!”이라고 내 자신에게 웃어줄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서 웃음 짓기까지 18년이 걸린 인간이 외향형일 리가 없다. 그런데 대학을 가고 보니 나는 의외로 외향형이었다.
아니 중학교 시절에도 그러했다. 모모 동네에서 김민정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 외향형이었을 리가 분명하다. 아닌가? 대학에서 나는 일본어도 잘 못하면서 연극 동아리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턱 하니 무대 감독의 자리를 꿰찼고, 대본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웃기는 짬뽕 아닌가. 여하튼,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돌아오자. 나는 귀찮아 하는 인간이다. 정말 귀찮다. 귀찮음 형들은 필연적으로 내향형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가장 귀찮은 것이 사람을 만나는 것, 더 정확하게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때로는 화장도 하는 그 순간이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나가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친다니, 약속은 잡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게 된다. 귀찮음을 극복하느니 내향형에 만족하자. 사람은 만나지 말자!
그런데! 툭하면 나를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회 사람들이다. 웃기지도 않아. 그러나 부르면 나가야 한다. 이게 무슨 상하관계인가. 아니 학교에서 이토록 보호자들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고, 아이가 학교에 가기까지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한국에선 녹색어머니회라고 부르는 교통 정리에 불려 나갔다. 어디 교통 정리뿐인가. 해가 짧아지는 겨울에는 저녁마다 동네를 돌며 방범활동도 해야 했다. 그나마 이런 일은 약과라고 한다. 어떤 여성 보호자들은 더운 날 마쓰리에 가서 소시지를 구워 팔거나 솜사탕을 만들어서 판다. 모든 보호자들은 1년간 하나씩 임무를 맡고 수행해야 한다. 어려운 미션은 아니지만, 문득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나는 교통 정리를 하러 나온 남성 보호자를 거의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방범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마쓰리에서 소시지를 굽는 것도 나의 경험에 다르면 모두 여성 보호자들이었다. 요즘은 코로나로 마쓰리를 열지 않거나, 마쓰리를 해도 음식을 팔지 않는 경우가 많아 나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성 보호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마쓰리가 사라져서 안타까워요.”
다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속내는 ‘후우, 살았다!’라며 주먹을 꼭 쥐고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학교는 여성 보호자들을 툭하면 불러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실과 복도를 소독하는데 그 일은 자원봉사라지만 모든 부모가 최소 2번은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비교적 한가한 7월 나는 두 번 이 소독 작업에 참여했다. 혼자 해도 10분이면 끝나는 소독 작업에 각 반마다 3-5명의 여성 보호자들이 와 있었다. 빛의 속도로 소독을 끝내고 총총히 그들은 집을 향했다. 집에 가서 저녁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누군가는 오전 내내 일을 하고 집에 가기 직전에 학교에 도착해 소독 작업을 하고 재빨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지을 것이다.
게다가 주말에는 아이가 가입한 탁구부 연습을 위해 학교에 나가야 한다. 어제 나는 세수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간신히 달래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귀찮은 발걸음으로 중학교에 갔다. 탁구 부원들이 혹여 연습을 하다 다치지는 않을지 내내 살펴보고 조퇴한 아이의 이름을 적고 더워서 몸이 힘들다는 아이를 앉혀 놓고 쉬게 했다. 틈틈이 외부에서 파견된 코치 선생님과 대화도 나눴다. “제가 학창시절엔 이렇게 놀면서 탁구치는 애들은 맞았는데 요즘은 그럴 수가 없어요.”라는 코치의 말에 맞장구를 쳐야할지 부정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때려서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
놀면서 치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아이는 전면적으로 서포트할 것이라는 그의 지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의 외향형의 모든 것을 끌어올려 코치와 대화를 나눈다. 웃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코치에겐 아무 잘못이 없지만 청소도 하고 소독도 하고 코치와 대화도 나눈 시간을 유익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걸 유익하다고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싶지 않다는 깐깐함이 내 안에 있다.
아무리 내향형이고 모든 것이 귀찮다고 한들, 아이들을 위한 모든 행사에는 어쩔 수 없이 동원된다.
일년에 한 두 번 2-3시간이니까 아이를 위해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잖아요?
아마 학부모회는 그렇게 운영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일년에 한 두 번 2-3시간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입장에선 사치스러운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만들려면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을 고용하든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시간을 애써 만들어 학교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는 일은 이 얼마나 숭고한가?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여성 보호자는 얼마나 될까? 왜 학교와 학부모회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가? 왜 여성의 시간을 사용하는 일에 이리도 둔감할까? 왜 여성의 노동력은 돈이 아니라 숭고한 자원봉사라는 가치로만 환산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여성 보호자들이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쉽게 불려 나가 그게 어떤 일이든 도움을 주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 돌멩이 하나라도 던져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아직도 사회에선 그리고 학교에선 남자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쓰기가 어렵고, 덕분에 학교에서 오고 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물론 학부모회니까 남성 보호자가 참가를 해도 되지만 그들은 일 때문에 참가할 수가 없고 설사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엄마들 밖에 없어서 참가하기 쑥스럽다”는 말로 퉁치곤 한다.
여성들의 노동력은 대부분 공짜다. 회사에 나가서 돈을 벌 수는 있다. 물론이다. 다만 그 자리는 많지 않다. 그렇게 사회에서 밀려나거나 스스로 떠나온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학교에서 부르면 가면을 쓰고 나가 교통 정리를 하고 방범 활동을 하고 축제에서 소시지를 굽고 체육관에서 탁구공을 줍는다. 그런 일들에 취미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이 없다. 호불호를 가릴 여건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노동력의 가치는 얼마인가. 또한 나라는 인간은 대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살아있는 인간일 뿐이다. 나의 노동력은 공짜지만 그래도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 스스로 믿고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집에만 있으면서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라는 비하를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허우적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인간이니까. 혹자는 가치 있는 인간일 필요가 없다고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니 걱정하지 말라고만 말해주고 싶다. 더위 속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을 여성들에게, 아침부터 아이와 말싸움을 하고 이제 커피 한 잔을 마셨을 여성들에게, 남편과 얼굴을 마주하고 웃고 있지만 어딘가 가슴이 답답한 여성들에게, 모든 여성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당신은 괜찮다. 당신이 외향형이든 내향형이든 어느 쪽도 아니든 또는 둘 다 해당하든. 우리는 모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