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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잘못인가

김민정의 일상다반사(37)

by 김민정

엄마 이가 부서졌어.

어? 이가 왜 부서져? 어떻게 부서져?

이가 아파.


아이는 간단하게 말한다. 그래 이가 어떻게 왜 부서졌는지 누가 알 것인가.

치과에 예약을 하기로 한다. 누구나 자신이 다니는 치과를 가장 훌륭한 병원이라 여길 것이다. 매년 한두 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하는 곳인데 그런 중요한 곳을 대충 고를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20년 이상 다닌 치과의 선생님 또한 훌륭하다. 아픈 치료는 하지 않으며 아이의 경우엔 서너 번 치과 의자에 앉았다가 가는 날을 만들어준다. 아이가 치과에 익숙해질 때가 기다렸다 치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치과에 나는 아이를 맡기지 않는다. 대답은 간단하다. 나에게 시간은 금이다. 어디 나뿐인가. 모두에게 시간은 금이다. 그 훌륭한 치과에 가서 서너 번 그냥 앉아만 있다가 나올 시간을 마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그 치과의 훌륭한 선생님은 모르실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 오래 치과를 해온 다른 치과에 예약을 한다. 이 치과의 경우 아이의 심정보다는 빠른 치료를 최우선시한다.

나의 일정, 아이 당사자의 일정, 그 외에 우리 애들 전반적인 일정을 확인하고 가장 좋은 날짜를 잡는다. 여름 휴가를 떠난 후 이가 아프면 큰일이기 때문에 여름 휴가 이전으로 잡는다.

아침에 일어나 도시락을 두 개 싸서 두 아이를 방학교실(아동관)에 보내놓고, 잠깐 일을 하고, 3시에는 아이들을 수영장에 데려갔다 와서 5시에 막내를 치과로 데려간다.

의사 선생님은 갑자기 마취 주사를 들고 아이 잇몸에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 곧장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프면 손을 드세요”라는 지시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빨리 손을 써주는 의사가 속시원해서 좋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처럼 황당할 것이다.


아이 옆에 서서 나는 내 과오를 떠올린다.

나는 아이가 태어난 지 9개월째 되던 달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다.

집 근처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어서 우리 동네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아이를 맡겼다. 아이를 데리러 가서 버스-전철-버스로 집까지 오는 루트였다. 태어난지 9개월이 된 아이가 배가 고플까봐 버스-전철 사이에 한 번 백화점 수유실에 들러 수유를 했고, 전철에서 아이가 울 때는 ‘아기 센베이’라는 약간 달착지근한 과자를 손에 들려주기도 했다. 그 과자 때문에 아이 치아가 약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단 음식을 자주 줘서 치아가 약한 걸까? 나는 한다고 하는 건데, 생각만큼 성과가 좋지 않았다.

치과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왜인지 변명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는데 꾹 참았다.


왜 남편은 느끼지 않는, 느끼지 않아도 되는 이런 육아의 부정적인 부분을 나 혼자 다 짊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아이를 치과에 데리고 간 순간, 아이 입 안에 썩은 이가 발견된 순간, 나는 0점짜리 엄마가 된 기분이고, 완벽하지 않은 내 자신에게 진저리가 난다.

큰애와 둘째 안경을 맞추러 안과에 갔을 때도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막내가 태어나기 전에 고령출산으로 인해 선천성 기형 검사도 했는데 검사도 내가 감당해야 했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리고 출산을 결정하는 것도 온통 나 혼자 해야 했다.

아이의 소심함도 편식도 성적이 좋지 않은 것도 마치 내 탓인양 살아가는 보호자들이 있다. 대부분은 여성들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한 결혼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편과 동등한 관계에서 사랑하며 살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아도 과잉보호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강압적도 아닌 부모로 아이를 키울 것이다. 가사를 나 혼자 하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회의를 통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것이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고 이모나 고모처럼도 살지 않을 것이며, 괜한 자책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웬 걸, 내 탓을 해야하는 순간들은 쉴새없이 찾아오고 내 탓을 하고 마는 것이 나은 상황들도 끊임없이 발생하며, 실제로 내 탓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이 엄마라는 역할에게 디폴트로 주어진다.

방학 내내 막내를 치과에 데려가야 한다. 아이가 한국어를 못 하는 것, 아이가 피아노를 못 치는 것, 악보를 못 보는 것, 사교성이 없는 것도 모두 내 탓 같은 날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보호자들이 시뻘건 눈으로 아이들을 한 곳만 보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가르치는 것일 게다.

지구본을 책상 위에 놓는다. 책상 위의 지구본을 본다.


지구본은 작고 그 안의 나라들도 모두 작다.

몇 분율 지도일까.

지구본 속 한국과 일본은 숨은그림찾기처럼 작게만 표시되어 있다.

세상을 보자.

아이에게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말한다.

아이 입 속 썩은 치아만 보지 말고

지구본 상의 더 큰 나라들을 더 큰 바다를 보자.

수단은 어찌 이리 클까.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어릴 때 가보고 싶던 곳 중 몇 곳에 가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달래 본다.


우리 엄마는 어린 내가 아프면 내심 반가웠다고 한다. 시골 마을에서 도시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날 엄마는 병원이 끝나고 오는 길에 경양식집에 들러 나와 함께 단 둘이서 식사를 하기도 했고, 서점에도 들르고, 장도 보고, 커피도 마셨다. 문득문득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도 가끔은 죄책감을 느꼈을까? 물어본 것도 없다. 그런 마음 없이 자식을 키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더위에 수영장에 갔다가 치과에 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치아 건강은 중요하고 치실은 필수다. 충치 예방도 해야 하고 치열이 고르게 이가 나도록 신경도 써야 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일에도 열심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부모는 나 혼자만 되는 것인가? 왜 남편은 이런 일들에게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또는 내가 남편보다 돈을 더 적게 벌어서일까? 내가 더 꼼꼼하기 때문에? 내가 더 유능하기 때문에? 내가 더 유능한데 변변한 직장도 없어서 가사에 그 유능함을 폭넓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이 바로 그 답변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불을 널고 빨래도 널자.

육아의 죄책감의 무게가 나날이 가벼워지기를 소망한다. 불가능할 수록 소망한다.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도 내 탓을 할 것인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내 탓을 할 것인가? 아니 과연 이런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탓으로 정녕 무마될 일인가? 누구의 탓이 문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고 도전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빨리 익숙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스무살까지 집안일을 하고 직업을 익혀 독립시킬 준비를 완벽하게 해두는 것, 그것만은 잊지 말아야지. 내 탓이오 내탓이오 내탓이로소이다. 가 기본이지만, 육아에서 내 탓은 좀 그만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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