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35)
어린 시절에 우리 옆집에는 김민정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나보다 세 살쯤 어린 여자아이였다. 나는 간혹 그 집에 가서 그 아이랑 놀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 엄마와 그 아이 엄마가 장을 보러 갈 때, 나랑 그 아이를 두고 갔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기는 커녕, 남의 집 아이를 본다는 것 자체가 왜인지 서럽고 억울했다. 나는 그때도 아마 속이 좁았나 보다. 여하튼 그 아이가 내가 아는, 내가 아닌 김민정이었다. 중학교 때 우리반에도 김민정이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서, 머리로 이마를 덮고 주로 하나로만 묶었던 나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고, 우리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다지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반에 이름이 같은 아이가 있으면, 김민정 A, 김민정 B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우리반에서는 다행히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 아이와 내 친구가 겹치는 일도 적었고, 나도 그 아이도 누군가가 A 또는 B로 그것도 남들의 편의상 그렇게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민정이라는 이름은 흔하고, 가끔 살다보면 김민정을 만나기도 한다. 언젠가 100명의 김민정 같은 인터뷰집을 내보고 싶은 것도 나의 소망 중 하나다.
모든 것에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집안일이 그렇다. 빨래, 청소, 설거지 등은 그나마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집안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고춧가루가 붙은 그릇을 오래 두어서 결국 설거지를 하면서 그 고춧가루를 다 닦아내는 일이라든가, 수박을 시원하게 먹기 위해 잘 잘라서 냉장고에 보관하는 일이라든가, 빨래는 빨래지만 아이 교복 셔츠를 날마다 잘 빨아 다려놓아 매일처럼 깔끔하게 입고 가게 준비한다는가, 바느질은 바느질이지만, 발레 발표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한땀한땀 수정을 하고, 가슴 팍에 들어 있는 고무줄을 잘 잘라, 아이 몸에 딱 맞게 바느질 하는 일들이 거기 포함된다. 세제가 떨어졌을 때 짜증을 내지 않고 사오는 것, 반찬 투정하는 아이에게 딱 맞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 양말 짝을 찾아놓는 것, 빨래를 하거나 널기 전에 옷을 뒤집는 것, 이불보와 베갯닛을 빠는 일을 잊지 않는 것, 애 셋의 물통을 주말마다 소독하는 것도 그렇다. 속옷과 수건을 갈아놓는 시기를 찾는 것도 그러하다.
단어 한 마디로는 도통 표현할 수 없는 고노가 집안일에도 있다. 물론 회사일에도 있을 것이다. 회사일에는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집안일이랄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이를 보내고 마중 나가는 일이었다. 이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린이집 데려다 주기, 데리고 오기, 학원 데려다 주기, 데리고 오기, 라이딩? 픽업?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아침에 데려다 주고, 저녁에 데리고 왔다. 어린이집이 가까우면 다행이지만, 내가 둘째를 낳고 강사가 되었던 초기인 2013년에는 어린이집이 많이 부족한 데다. 입소 문턱이 너무나 높았다. 그래서 아이를 학교 근처의 사설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매일 아이를 안고 40분 동안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가서, 아이를 맡기고 또 40분을 전철과 버스로 아이를 데리고 왔다. 전철은 그나마 나았지만 버스라는 공간에서 3개월 된 아이를 조용하게 만들어 데리고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와 어린이집이 딴 방향이어서 쉽지 않았다.
막내는 무려 집에서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한 시간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전철역에서 1.5킬로나 떨어져 있어서, 걸어도 시간이 걸렸고 버스로도 꽤나 걸렸다. 아침에는 남편이 차로 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후엔 내가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10개월 된 막내를 안고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전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막내를 유아차에 태우고 20-30분을 전철역까지 걸어와서, 거기서 전철을 타고 동네 근처 전철역에 도착해, 근처 백화점에서 아이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하고, 유아차를 접고 아이를 안고 다시 버스를 타고 무려 1시간 반에 걸쳐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6개월간 해야 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이렇게 아이를 안고 방과후 교실에 있는 큰애를 데리고 집 근처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까지 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2시간이었다. 이걸 아이 데리고 오기, 라이딩, 정도로 말해 버린다면 나는 너무나 억울한 기분이 든다. 벌써 6년전 일이라 이제는 거의 잊혀졌지만, 그렇게 애쓰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고 했다.
큰아이 발레 학원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의 엄마들 사회에 나는 좀 이질적인 사람이었는지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래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해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게다가 발표회 직전에는 발표회가 열리는 대형 홀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연습을 하는데, 엄마인 나는 하루 온종일 거기 붙어 있어야 한다. 워낙 여자 아이들이 많고 개중에는 사춘기 아이들도 있고, 몸에 딱 붙는 레오타드만 입고 있기 때문데 아빠가 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데리고 오가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엄마가 나와 우리 옆집 김민정을 같은 집에 두고 장을 보러 간 그 마음도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 심정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그 한 마디를 지금 전해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픈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왜 이리도 어려울까? 남들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도움을 청하고 쉽게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조차 어렵다. 내가 받은 만큼 갚을 생각을 하면 아찔해지다 보니, 도움을 청할 마음조차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
막내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면서, 방과 후 교실에 다니게 되었고, 나는 저녁이 되면 막내를 데리러 간다. 막내는 데리러 오지 말라고, 혼자 가겠다고 의젓하게 말한다. 그래서 지난 주 금요일엔 막내 혼자 오게 했더니, 같은 반 아이와 손을 잡고 신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아이를 데리고 오가는 일에서 해방되는 것일까?
육아의 약점(?)이 있다면, 모든 것은 어느 시기가 되면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었던 시기도 잊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매뉴얼조차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같은 일도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가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고뇌와 불편함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실제로 겪을 때는 그럴 여유가 없고 그 시기가 지나면 잊어버려, 같은 고뇌와 불편함을 내 뒷세대 여성들이 또다시 겪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한국에서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데리러 오고 데려다 준다고 하는데, 일본은 그렇지가 않다. 허가를 받기가 힘들고 주차를 아무 곳에서 할 수 없으며,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이 큰 벽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트러블이 생기면 조율을 해서 해결을 하는 사회지만, 일본은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트러블이 생기면 그 서비스 자체를 없애 버리는 사회여서,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어느쪽이 좋고 어느쪽이 나쁘다로 쉽게 판가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만, 아이를 키워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또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다.
이 어려운 길을 또 어떻게 채워나갈까? 나도 가끔은 조끔쯤 손을 내밀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나의 집안일과 육아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하고 싶다. 나처럼 하루 2시간씩 걸려서 전철-버스-전철-버스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그런 경험을 너무 많은 여성들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여성들에게, 또는 남성들에게도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지나치게 비장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