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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온전한 위로

김민정의 일상다반사(43)

by 김민정

사람은 가끔 거짓말을 한다. 자신을 더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또는 궁지에 몰렸을 때, 또는 타인을 칭찬하거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때로는 귀찮아서, 어떤 이들은 타인을 속여 무언가를 갈취하기 위해서 등 제각기의 이유와 방식으로 거짓말을 한다. 아이들도 그렇다.

“구몬 다 끝났어?”

“아직 두 장 남았어.”

“그럼 몇 장 한 거야?”

“아홉 회.”


나는 큰애의 말을 믿었다. 하루에 아홉 회면 일 회에 4장 씩 36장이니까 많이 했구나 싶어서 칭찬을 해줬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내가 빌려준 책을 회수하러 큰애 방에 갔다가 발견하고 말았다, 구몬을. 큰애가 해 놓은 구몬은 2회 분량이 전부였고 9회 분량이 남아있었다. 큰애에게 따져 물으면 “엄마가 혼낼까봐 말을 제대로 못했어”라고 도리어 나를 탓할 것이다. 아니면 “왜 내 방에 들어왔어?”라고 따질 수도 있다. 다 맞는 말이다. 이제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거짓말도 부모 탓으로 돌릴 정도로 컸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여러가지 상황을 상상해본 후에 대처를 해야 한다. 그래 까짓 거 구몬 숙제 좀 다 못하면 어떤가. 나는 늘 그런 마음을 품고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릴 때는 수유하고 트림을 시키고 안아서 재우는 일의 반복이었다. 이제는 아이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하고 계절별로 옷을 바꾸고 성장에 따라 신발도 구입하고 아침에는 머리도 묶어주고 학원도 골라주고 데리고 오가고 숙제도 봐줘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아이가 3학년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나아질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대체 뭐가 나아진다는 말인가? 아 모르겠다. 나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고 피로는 누적되고 고민은 쌓여가고 정답은 점점 멀어져간다. 아이가 초1이 되고 좋아진 것은 하루종일 나에게 붙어있기 않게 된 것이다. 아이가 초3쯤 되면 이제 자기 할 일을 알아서 한다. 아이가 중1이 되면 알아서 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어 그야말로 숙제를 다 했는지 안 했는지도 거의 모르게 된다. 아이에게 물어 듣는 대답이 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지만 때로는 아이가 나에게 숨기기도 하는 탓에, 그런 것을 모른 척 하면서도 또 진실을 알기 위해 약간의 노력도 해야 한다.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고 하루하루가 통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가는 기분이다. 살얼음판이던 유아기를 지났더니 평평대로가 아니라 통나무로 된 다리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길고 긴. 그 통나무 다리 곳곳에는 이끼가 끼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이런 고민들을 남편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 인생관, 진학에 대한 고민은 현재 우리집에서 99.9% 내가 담당하고 있다. 남편은 아이는 그냥 둬도 큰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냥 둬도 큰다. 나도 그랬고 아마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그냥 둬도 나는 공부를 좋아해서 공부를 잘했다. 영어도 일본어도 독일어도 이탈리아어도 중국어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한 건 엄마였고, 내가 대단한 수준의 피아노를 치는 것은 아니지만 악보를 볼 줄 알고 중고교시절 그나마 음악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던 것은 3년간 피아노 학원에 다닌 덕분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사준 백과사전과 수많은 책과 만화들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했다. 우리집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보다 사전을 보는 사람-할아버지는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고 아빠는 뭐든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엄마도 그러했다-이 많았다. 그런 환경이 나에게 책을 읽는 습관을 가져다 준 것은 분명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읽어준 책은 백 권이 넘는다. 보통 아이들은 같은 책을 읽기를 원하는데 나는 항상 다른 책을 읽어주길 원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에밀레종 같은 잔인한 이야기는 절대 읽어주지 않았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자전거도 못 탄다. 그렇게 다니고 싶던 발레 학원도 내가 어릴 적엔 흔한 것이 아니어서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겐 수영도 가르치고 발레도 가르친다. 피아노 학원에 보낼 여유가 되지 않아 피아노는 내가 직접 가르치거나 하루에 딱 5분이라도 좋으니 도레미파솔라시도라고 쳐 보라고 권유한다. 그건 다 당신 욕심이 아닌가?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내 욕심일지언정 수영을 못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악보를 못 보는 것보다는 볼 줄 아는 것이, 발레처럼 자기 표현을 위한 수단을 하나쯤 가지는 것이 아이들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생각일지언정.


여하튼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지가 온전히 나만의 고민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젊은 시절엔 연인이 나의 위로가 되어준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콩깍지가 없었다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별을 따다주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오밤중에 깨워서 편의점에 가게 해도 웃으면서 다녀오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는 그런 행동을 원했다.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편의점에 가서 사올 수 있는 그런 위로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남편은 대낮에 심부름을 시켜도 귀찮아 한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일일이 섭섭하게 여겨봤자 내 손해일 뿐이다. 사랑이 식었다고 따지는 것도 다 물 건너 간 일이다. 당신이 변했다고 말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도 변했고 내 사랑도 뭐 그리 건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위로받으면 좋을까.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윤복희의 노래가 자꾸 머릿속을 스친다. 누가 날 위로할까? 누구긴 누군가 나 밖에 더 있을까. 어떤 이들은 “아이들이 크면 다 갚아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아마 좋은 의미에서 건네는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대체 아이들이 뭘 갚아준다는 것일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와 학원 등등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이 과연 내게 뭘 갚고 보답을 해야할까? 그럴 필요는 없다. 일절. 태어나서 살아준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의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어느날 그저 수정된 수정란에 의해 만들어져 지구 한 귀퉁이에 떨어졌을 뿐이다. 인간으로, 인간으로 아주 우연히 인간으로 태양계의 지구란 별의 어느 지역에 왔을 뿐이다.


여하튼 아이들도 나를 위로해줄 상대는 아니다. 나를 위로할 유일한 인간은 나일 뿐이다. 그러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 도쿄에서 가장 맛있는 맛집에 간다? 도쿄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들을 다 사 온다? 그런 건 아주 현실적이 방법이고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위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단 것에 별 흥미가 없으며 먹는 것에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운동은 어떤가? 운동처럼 귀찮은 일도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로 아무래도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가장 간편하게 가장 여유롭게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 결국 내가 나를 위로하는 소소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참,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팬이 되기도 한다. 덕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는데 나는 덕질과도 거리가 멀다. 일단 타인을 그렇게 열심히 피터지게 온힘을 다해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게다가 그 타인이 연예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모든 인간은 복합적이어서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는데 모든 걸 장점이라고 우기는 스타일의 연애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여하튼, 이렇게 나의 세상은 좁게 규정되어 버리고, 나를 위로하는 방법도 울타리 안에 갇혀 버린다.


가끔 누군가 팔베개를 해줬으면 싶다. 가끔 술을 마시고 싶을 때도 있다. 무작정 걷고 싶거나 뛰고 싶을 때도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깨가 무겁다 싶은 날에는 무엇을 할까?

하늘을 올려다본다. 태풍이 지나간 가을 하늘은 청명하다.

오늘 하늘이 참 아름답다고 쓴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카톡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인생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아닐까. 성공이 뭔지는 모르겠으니, 그 정도면 괜찮은 인생 아닐까. 나는 가끔 하늘이 아름답다고 쓰지만 전송할 상대는 여전히 없다. 중학교 시절엔 하늘이 아름답다고 편지를 썼다. 가끔 나에게도 썼다. 나에게 보내는 카톡이나 나에게 보내는 라인 같은 서비스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남에게 전송하지 못한 말들이 나에게라도 전송되어 온다면 조금쯤 위로가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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