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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구멍들의 대혼란 파티

김민정의 일상다반사(44)

by 김민정

당신의 집안에는 몇 개의 수채가 있습니까?

부엌 싱크대에 하나, 욕실 세면대, 그리고 욕실 안 바닥에도 하나, 그리고 세탁기에도 수채가 있다. 앗 그러고 보니 식기 세척기 안에도 있었구나.


부엌 싱크대야 설거지를 하면서 수채를 닦은 일은 일상이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늘 세심하게 신경을 써줘야 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이전에는 주로 은으로 된 액세서리를 닦는 것이 주말의 일과였다. 금이나 백금은 색이 변하지 않지만 은은 잠시라도 몸에서 떼어내면 바로 변색된다. 주말에는 안 써서 빛 바란 은 제품들을 닦는 것이 귀찮음의 발로이기도 했고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요즘은 주말에 은을 꺼내기는 커녕 수채들을 총집합 시킨다.


세면대에 낀 물때도 제거해야 한다. 물때에도 다양한 색깔이 있다. 흰색으로 딱딱하게 늘어붙어 석고처럼 변화되어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것부터 노랗거나 빨간 것까지. 칫솔을 동원하고 식초를 꺼내보기도 하고, 남들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 최소한 지구에 덜 상처를 주는 재료들로 닦아 내려고 한다. 나는 표백제 같은 것을 잘 쓰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매일 샤워를 하고 목욕을 하며 흘려보내는 비누와 샴푸 등이 적지 않은데 표백제까지 흘려보내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 때문이다. 표백제 좀 쓴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또는 모두가 다 쓰는 데 한 사람만 조심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내가 조금 지구를 위한다는 그런 최소한의 마음가짐을 버리고 싶지 않다.


여하튼 세면대와 욕실의 물때와 곰팡이를 제거하고, 수채들도 닦기 시작한다.

이 머리카락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욕실 수채의 머리카락을 제거하다보면, 일본의 흔한 호러 영화가 떠오른다. 샤워를 하는데 머리카락이 스멀스멀 수채 안에서 올라와 조금씩 인간의 형태가 되어가는 그런 고요한 공포 말이다.


우리집 세탁기 오른쪽 아래에는 옷찌꺼기를 모아주는 수채가 있어서 그 부분도 주1회는 꼭 청소를 해줘야 세탁이 깔끔하게 되고 건조도 잘 된다. 옷 섬유에서 나온 쓰레기들도 적지 않다.

쓰레기를 버리고 수채를 닦으면서 처음으로, 인간이 이 지구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소비를 하고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며 그것을 버리고 살아가는지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삶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는 교과서로 배우기가 어렵다.

모든 과목들이 구체적이지만 우회적으로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수학도 그렇고 국어나 문학, 세계사 등등도 그렇다. 그렇지만 직접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다 보니, 교과서에서 인생을 배우거나 삶의 자세를 배우려는 학생들은 드물다.

우리의 삶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조금 명확하고 구체적인 잣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나처럼 표백제, 섬유유연제, 되도록이면 린스와 같은 것들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다. 육식을 하다보니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최소한도로만 먹거나 그 종류를 닭, 돼지, 소고기에 한정하고 그 이상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어차피 고기를 먹는 건데 종류를 가려봤자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소도 개도 같은 고기라고도 주장한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겠지만, 나는 이미 많은 살상으로 인해 내가 만들어진 것이 명확한 세상에서 굳이 더 많은 욕심을 탐내지 않겠다는, 그래서 소 돼지 닭 이외만이라도 제하겠다는 아주 소극적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도 나의 방식을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거나 아이의 자유를 존중할 것이 내가 부모로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다. 부모에겐 부모의 몫이 있고 아이에겐 아이의 몫이 있다.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부모의 일이지만 그걸 먹거나 또는 뱉거나는 아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먹지 않을 경우엔 또다른 대처가 필요하지만 때로는 식사를 거를 수도 있고 때로는 학교를 쉴 수도 있고 때로는 하루 종일 잠을 청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권을 아이에게 주고 싶다. 물론 전제는 ‘때로는’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하고 싶다. 전혀 하지 않던 운동을 하루 30분이라도 해보고, 좋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내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틈틈이라도 글을 써서 언젠가 괜찮은 문학상을 받고 싶다. 그 꿈을 위해 계속 달려가고 싶다.


어떤 독자들은 내 글을 매번 클릭할 것이고 어떤 독자들은 가끔 클릭할 것이며 어떤 독자들은 아예 클릭하지 않거나 스팸메일로 넣어두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일들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남들에게 휘둘려 내 몫을 잘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쓰는 것은 나의 일이고 읽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나의 일이지만 읽지 못하겠다는 의견도 어느 정도 존중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나면 구독료를 내겠다고 하시고 실제로 내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모른 척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환심을 살 수 있을지 너무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까닭에 누군가는 내가 글을 계속 쓰는 일을 질투하기도 하고 얄밉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무모한 일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 그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바위에 계란 자국이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아마 그 계란 자국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이 글쓰는 자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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