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45)
삶에는 다양한 의문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머리를 싸매게 하는 고민이 있으니 바로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이다. 쉽게 성적을 올리는 아이도 있지만 노력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나의 아이가 후자였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면 좋을 것인가. 아이는 내가 아니어서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없으며, 로봇도 아니어서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마지막에는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맞을까 하는 궁극적인, 마치 코미디 같은 말을 뱉는 경우도 있다. 아니 내 아이가 맞아? 정말이야? 이게 나의 유전자였어? 내가 낳아 놓고도 그런 의심이 든단 말이다.
우리집 장녀는 얌전하고 착하고 조용하다. 아주 가끔 화를 내는데, 그럴 때면 정말 무섭다. 중1은 사춘기이며 부모는 모를 비밀을 한 두 개쯤 가슴에 품고 있고, 부모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조금 알게 되는 시기이며, 아직은 정의롭고 도덕적인 부분들을 어른들보다 훨씬 크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는 나치의 만행이나 일본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해도 잘 받아들이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입장에서 사건과 사고를 해석하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운동능력이 뛰어났던-내가 몸치라 아이에게는 운동을 꾸준히 시켰다-큰애는 주 5회 발레 학원에 나가고, 주 2회 방과후 학교에서 탁구를 친다. 발에는 늘 파스가 붙어있고, 토우 슈즈를 신고 춤을 춘 후에는 접골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한다. 아이에겐 그런 생활이 일상이고, 그런 날들을 조금 즐기고도 있다. 아픈 것은 싫지만 이 아픔은 노력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학교에서도 성실하고 남의 욕을 하지 않기로 이름난 큰애의 현재 최고의 고민은 성적이다.
일본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각 학교마다 치러지는 입시를 치러서 합격을 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성적에 따라 학교가 바뀌고, 성적이 좋은 학교는 커리큘럼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교칙이 거의 없고 학생들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엄청난 좋은 점이 있다. 혹여 성적이 낮은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교칙이 엄격하고 대학입시가 조금 힘들어진다.
큰애 학교에서는 1년에 3번 시험을 보는데 이 시험 점수가 결국 고입에 큰 영향을 준다. 지난번 중간고사에서 영어를 빼고는 전부 평균점을 간신히 따낸 큰애가 어떻게 하면 우등생 레벨까지 성적을 올릴 수 있을지는 큰애에게도 나에게도 여간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학원에 보낸다? 큰애를 학원에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보낸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지는 않는다. 공부는 내가 내 손으로 떠서 먹고 소화를 시켜야만 정착이 된다.
비싼 학원비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는데다 하루하루가 더 바빠져 결국 학원을 그만두었다. 내가 가르친다?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암기 과목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는데 외우는데 원래 일가견이 있지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시험에 나오는 것들을 외울 수 있는지 나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걸 아이에게 전수한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내가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내가 학생들을 상대로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내가 화를 내거나 혼을 내는 상황에 대해 미리 공지한다. 그런 상황을 서로 만들지 말고 공부를 잘하자고 학생들에게 약속을 시키고 수업을 시작한다. 강사는 서비스직이란 마인드가 있어서 모르면 가르쳐주고 싶지 혼을 내고 싶은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르침이 가정으로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큰애가 외워야 할 것을 잘 못 외우고 수학 방정식 앞에서 우물쭈물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래서 예스야 노야? 그래서 정답이 뭐야? 그래서 어떻게 풀어야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서 아이를 자꾸 코너에 몰게 된다.
남편은 늘 평정심이다. 그는 아이들은 그냥 큰다고 생각한다. 그냥 커서 그냥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그냥 대학생이 되고 그냥 회사원이 될 것이다쯤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남편의 이런 태도를 보고 복장이 터지지 않는 아내는 드물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나서서 아이를 지도하며 대학에 가라고 큰소리를 쳐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보 조사는 좀 같이 하고, 어떻게 공부를 시킬까에 대해서는 조금쯤 아빠로서의 지론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남편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정말로 아이들은 그냥 둬도 클까? 뭐 크긴 클 것이고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나는 남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 내가 과연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잘 키운다는 것은 대체 뭘까? 적어도 우익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뽑지 않은 사람을 키우는 거 아닐까? 적어도 약자를 조금 더 돌보는 마음을 특혜라며 곡해하지 않는 사람을 키우고 싶다.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한일간의 역사에 대해서도 반듯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방정식을 풀고 영어 검정 시험 능력에 합격하는 것도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밥을 짓거나 반찬을 만들고 몸을 깨끗이 씻고 뒷정리를 하는 능력도 인간에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가르칠 수 있을까. 책을 읽게 할 수도 있고, 내가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고, 슬쩍 영화를 보여주며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도 결국 내가 주도해야 하는 학습이란 게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하고 조리 있으면서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또한 내가 아이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스킬이기도 하다. 당당하게 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알아야 할 덕목들이 한두가지가 아니구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게 가장 먼저 상담할 수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내 손에 달려 있기에 아이와의 유대관계는 돈독하게 다져놓아야 한다. 나는 너를, 너만을 믿을 것이고, 너의 말에 더 귀기울일 것이란 사인도 부모가 해야할 일이고 말이다.
아이를 키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로서 나라는 인간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