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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일, 연락하기

김민정의 일상다반사(42)

by 김민정

학창 시절에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기 싫은 날, 나는 솔직하게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 오늘 학교 가기 싫어. 하루만 쉴게.”

그러면 우리 엄마는 정말로 토하나 달지 않고,

“그래, 그러렴.”

했다.


아니 어떻게 집에서 공부를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을 얼마나 믿었던 것일까. 나는 엄마가 나라는 인간의 선의를 믿어준 덕분에 근거없는 자신감을 품고 사는 초긍정 인간이 되었다. 솔직히 상대가 누구든 꿀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상대가 미인이든 날씬하든 공부를 잘하든 돈을 잘 벌든 권력이 있든 나이가 많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나는 계속 당당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이 있었다는 그 하나다.


엄마가 학교를 쉬는 것을 허락해 주면 나는 학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 오늘 좀 미열이 있어서 쉬겠습니다.”

미열따위 없었지만, 그게 내가 교사에게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그냥 좀 쉴게요”라고 교사를 당황스럽게 만들거나 좀 웃기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진지한 캐릭터다. 내가 “그냥 좀 쉬겠다”고 하면 그건 반항으로 들릴 수도 있다. 적어도 반항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고, 그런 핑계는 조금 몸이 안 좋다는 것 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아이를 신뢰하는 일도 쉽지 않고-내가 뭐라고 애들한테 공부를 하라고 강요하고, 운동하라고 하고, 음식 가려 먹지 말라고 하는가. 겨우 부모라는 이유로, 또는 부모이기 때문에. 적당한 지도는 필요하지만 아이에게 선택할 시간과 경험을 주는 것, 그리고 믿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아이들이 나를 신뢰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느낀다. 오늘은 신뢰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연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이가 학교를 쉬게 되면, 학교에 연락을 취해야 한다. 작년까지는 아날로그 방식이어서 담임과 부모가 주고받는 연락장(교환일기?)에 결석을 한다고 써서, 같은 반 아이에게 전달한 후 담임에게 전해주라고 해야 한다. 아니, 아침에 아이가 열이 나는데 같은 반 아이는 어디서 만나나? 한국이야 보통 아파트에 산다지만 일본인들의 로망은 여전히 단독주택이고 아이들도 절반은 단독주택에 절반은 아파트에 산다.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연락장을 전해주느냔 말이다. 학교 앞 길목에 버티고 서 있다가 아이 친구가 지나가면 전해주는 참 아날로그 방식이 있긴 하지만, 임파서블한 미션이다.


코로나로 인해 결석 여부를 전달하는 시스템이 올들어 바뀌었다. 연락장은 빠지고 큐알 코드를 읽어서 결석 여부를 클릭하면 되는 간단한 방식을 도입했다. 단, 안타깝게도 내가 그 큐알 코드를 잃어버려서 아주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도 덧붙여 둔다. 학교는 새학기가 시작한 후 큐알 코드가 찍힌 종이를 나눠주었고, 나는 세 아이분 종이를 어딘가에 뒀는데 도저히 어디 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학교에 연락하는 방식은 디지털로 바뀌어서 다행이지만, 여전히 손편지 또는 전화가 필요한 곳도 있다.


예를 들어 발레 학원은 여전히 손편지를 통해, 몇월 며칠에 쉬겠습니다,라고 적어 제출해야 한다. 급하면 라인을 보낼 수 있다. 아주 급할 때만 말이다.

수영 레슨은 기본 전화다. 아이들이 다니는 방과 후 교실 역시 기본은 전화 연락이다. 연락장도 있어서 연락장에 적어서 보내도 된다.


여하튼 학교, 방과후 교실, 학원의 시스템이 각각 다른데, 그걸 우리집에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다.

“여보, 태풍 난마돌이 화요일에 도쿄 근처를 지나간대. 애들 수영 레슨 날짜 좀 바꿔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도대체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그리고 아이들 스케줄을 다 알려주고 그 중에서 수영 레슨이 가능한 날짜에 대해 수영장과 교섭을 하라고 전해준다. 후우, 그냥 괜히 한숨이 난다. 괜히는 아니다. 아이들의 일주일, 아니 한달 스케줄을 제대로 파악해야 레슨 시간도 변경이 가능하다.


큰애가 중학생이 되어 탁구부 활동을 하면서 주말 활동 참가 여부도 매주 제출해야 한다. 이 탁구부 연락은 메일로 하면 된다. 하지만 메일을 한 번 보내려면, “안녕하세요,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아무개 엄마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탁구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라고 아무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송구스러운 메일을 적어 보낸다.


한편 구몬학습은 전화 연락이 기본이다. 고령의 선생님은 오로지 전화로만 연락이 가능한데, 구몬 영업 시간에만 전화를 받으신다. 우리 동네 구몬 선생님은 자기 자식들을 구몬으로 가르쳐 딸을 미 우주센터 나사에 입사시켰고(현재는 일본의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 아들은 일본 우주항공센터에 입사시킨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화려한 경력 덕분에 우리 동네 구몬학습에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일본의 구몬학습은 방문학습이 아니라 학원형식이어서 아이들이 직접 가서 문제를 풀고 배운다. 여하튼 아이들로 북적대는 구몬학원에서 선생님이 여유롭게 전화를 받으실 시간은 없다. 늘 번갯불에 콩 궈먹는 스타일로 용건만 빨리 전하고 전화를 끊는다.


추려 보면 내가 연락을 해야 할 곳은, 아이 학교, 방과후 교실, 발레학원, 수영학원, 구몬, 힙합댄스 교실이다. 제 각기 다른 아날로그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곳들과 연락을 하는 것도 사실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다. 이러니 내가 시간이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매일 밤마다 워드를 켜놓고 끄적인다. 제발 글이여 나와라. 에세이를 매년 한 권씩 발표하고 싶은 것도 이제는 너무나 큰 욕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전엔 새벽 4시에 일어나 글을 썼지만 이제는 그런 체력도 고갈이 된 탓이다.


숨 쉴 시간도 부족한 날들이 내 목을 점점 조른다.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신데렐라의 기분이 어떤 건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체험한다. 나의 착한 요정(페어리 갓마더)은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신데렐라로 늙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뭐 잿더미 속에서도 알아서 걸어 나갈 것이다. 가끔 눈물을 닦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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