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AI엄마였다면
엄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홀가분해졌다. 당연히 슬프고 당연히 매일 엄마를 생각하고 툭하면 운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 거기가 연옥이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쫓아가서 엄마를 만나고 싶다. 엄마가 내 손을 놓고 사라지자 거기 나타난 건 불안과 불행과 슬픔, 그리고 소소한 해방감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늘 부모가 신경이 쓰인다.
내가 부모 마음에 들지 안들지를 모든 선택의 순간에 생각하게 된다. 불가항력이다.
대학시절 나는 아침마다 엄마 눈치를 봤다. 교복에서 벗어난 자유롭게 옷을 입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엄마가 원하는 스타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7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엄마에게 멋진 패션이란 그 당시를 말한다. 미니스커트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스타일이다. 보수적인 패션, 예를 들어 원피스나 투피스 등에 엄마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여성스럽게 꾸민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다 아침에 엄마를 만나 기분이 상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얘 옷이 그게 뭐니?”
그 한마디는 나의 자존심을 축내기에 충분했다.
“오늘 너무 예쁘다”는 한 마디는 어떤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웃으며 현관문을 나서게 한다.
엄마란 무엇인가.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이다.
왜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가. 가부장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오래 엄마가 맡아온 역할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삶의 표본이며, 대화의 주체이며 가족의 중심이다. 그 가족의 중심이 원하는 것에 길들여지고 그에 따를 수 있어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주어지고 어여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현상은 아주 오래 지속되어 왔다.
즉 엄마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부장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아빠는 엄마에게 양육권을 100% 양보했기 때문에 엄마 기분을 맞춰주는 것으로 포기하거나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히스테리컬하게 그려진다. 엄마는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의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화를 내거나 토라진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에 귀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쓰레기를 버리라고 하면 날짜를 까먹고는 당일에 말해주지 않았던 걸 문제 삼는다. 미안하다고 덧붙여주면 다행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남편은 아내에게 미안하다고도 고맙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아내의 역할이니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사춘기가 된 아이들은 또 어떤가. 엄마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 다행이다. 청개구리까지는 봐줄 수 있다. 지각하지 말라고 한 마디 했다고 방문을 쾅 닫아버리거나 공부를 하라고 했다고 세상에서 가장 미운 엄마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엄마는 그렇게 늘 손해를 보는 입장이다. 엄마가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등하교를 챙기고 성적을 확인하고 담임교사와 상담하고 다른 부모들과 소통하는 일들은 모두 그저 당연시 될 뿐더러 그게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당사자뿐일 수도 있다. 감춰진 일들 사이에서 엄마는 늘 고독하다. 아이의 성적이나 집안의 고민은 가정사라 밝히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을 뿐더러, 책잡힐 수도 있는 화제거리이다. 여하튼 엄마가 집안에서 맡은 일은 방대하고 진두지휘해야 할 것 천지다 보면 큰소리를 낼 때도 있다. 그걸 그저 히스테리로 다 몰아버릴 수 있을까? 집안사 모든 것에 관여하는 엄마는 실로 아이들의 모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아이도 엄마 기분을 조금쯤은 고려할 것이다. 아이들은 작은 일 하나에도 엄마의 기분을 신경쓴다. 엄마가 뭐라고 말할까는 모든 아이들의 머리 한 켠에 자리잡은 생각이다. 그래서 자고로 엄마는 긍정적이고 일상적이어야 한다. 전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옷을 입을 때 엄마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입고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전혀는 아니다. 깔끔하게 입는 것은 중요하니까. 하지만 바지인지 스커트인지 등등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고, 더이상 70년대 히피 패션을 나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너무나 부도덕하게도 나는 진심으로 자유를 느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엄마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어졌다. 옷을 고르는 것은 기본이고, 말투에도 행동에도 걸려있던 고삐가 풀린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도 있었지만 당연하게 빚어진 경솔함으로 인해 트러블이 생긴 적도 있었다.
사춘기가 된 아이는 늘 기분이 나쁘다. 사춘기여서가 아니라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일 수도 있다. 수많은 과제에 둘러싸여 있어서, 또는 밥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렇게 바쁜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식탁에서 그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텐데, 엄마라는 자각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아이를 쪼아댄다. 아이야, 지각은 안 했니? 숙제는 많아? 언제 할 거야? 과제는 제출했니? 시험이 며칠 남았다고 잠만 자는 거니? 아이를 향한 잔소리에는 끝이 없다. 나는 점점 신뢰받을 수 없는 엄마가 되어간다.
아이에게 나란 엄마는 얼마나 무거울까. 지각을 걱정하는 엄마, 숙제를 걱정하는 엄마, 공부를 걱정하는 엄마만 남을 것 같다. 아이의 꿈을 응원하고 지켜보는 엄마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오해가 가장 서글프다.
차라리 AI가 되고 싶다. AI엄마가 되면 묻지 않는 일에 대답할 필요가 없어진다.
AI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뭘 잘했냐고도 다 했냐고도 결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질문을 하면 그제사 비로소 입을 열게 될 것이다. 그런 엄마가 차라리 낫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자신이 없어진다. 작은아이 작은걱정, 큰아이 큰걱정이라던데 정말 그렇다. 아이들이 클수록 대처할 일이 구체적이 되고 인생과 관련이 깊어진다.
꿈을 위해 일반고를 포기하고 야간이나 통신고를 가야할까.
대입은 수능을 치러야 할까, 수시를 선택해야 할까.
이과일까 문과일까. 대학의 어느 학부에 진학하는 것이 현재 성적에 유리하며 적성에 잘 맞을까. 과연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인재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모든 질문들이 섬칫하다. 내가 겨우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문제들에 해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학교에 상담을 하고 수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텐데 무엇을 어떻게 제시하고 이끌어야 할지 이제 아이는 내 손을 훌쩍 떠나 버렸고, 나는 자신이 없다.
차라리 AI엄마가 훨씬 낫지 않을까. 적어도 통계를 보여주지는 않을까. 점수를 넣으면 거기 맞은 대학을 찾아주고 성격을 얘기하면 그에 맞는 직업을 더 번듯한 증거를 들이대며 제안하지 않을까.
나는 인간엄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해서 한심한. 가끔 그렇게 엄마는 좌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