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
내가 여섯의 나이에 나는 물었다.
엄마 사람은 왜 태어나.
엄마는 머뭇거렸다.
글쎄.
나는 덧붙였다.
어차피 죽잖아.
그해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나를 정말 아끼셨다.
그런 할머니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곡기를 끊으셨다. 자기보다 어린 며느리가 심장병으로 먼저 갔다며, 나이든 자신이 더 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셨다.
도리가 아니라니. 얼마나 꼿꼿한 성격이신가.
그렇게 할머니는 모든 음식을 단 한 점도 먹지 않기로 했고 정말로 그 결심을 달성하였고 그렇게 돌아가셨다.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아빠랑 똑같은 얼굴의 우리 삼촌이 하루 아침에 죽었다.
그는 우리집에서 일하던 아줌마의 딸과 연애를 시작했고, 보다못한 가족들을 삼촌을 미국에 보내기로 했다. 삼촌은 미국에 가기 전, 서울에 갔다가 연탄가스로 숨졌다. 그는 겨우 스물을 넘긴 꽃다운 나이였다.
나의 유일한 취미는 달팽이를 보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 그 시절에도 아이들은 귀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일을 돕거나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티브이는 오후 5시 반이 돼야 방송을 시작했다. 나는 하루내 달뱅이를 관찰했다. 달팽이가 가는 길을 쳐다봤다. 달팽이는 한 걸음 옮기는데 1분은 걸려서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거의 진전이 없는 편이었다. 나는 그 느린 움직임을 보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리라 믿었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흘러갈 것이라고. 그런데 어느 아침, 그 달팽이가 말라비틀어져 죽은 채로 나뭇잎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달팽이를 살짝 뜯어내 화단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느린 시간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또렷이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죽는다
는 것을.
사람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 인사를 한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세상에 온 생명을 반가이 맞아줘야 하는 것은 인류애의 기초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생명은 언젠가 이승에 이별을 고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목숨을 주지만, 그 목숨이 유한하다는 것, 즉 불완전하다는 것도 함께 소화시켜야 한다.
남편은 없어도 아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나는 궁극의 에고이즘으로 느낄 때도 있다. 아니 그냥 아이를 가지겠다는 것은 모두 엄청난 에고이즘이 아닐까. 아이에게 죽음도 함꼐 선사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둔감한 까닭은 아닐까.
여섯의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았다. 할머니를 삼촌을 달팽이를. 그러다 문득 돋보기를 들고 나가 개미를 햇빛에 태워죽이기도 했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아, 그래 죽는구나를 다시금 목격했을 뿐이다.
내 나이 열 둘에 아빠가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엄마는 나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빠한테 빨리 오라고 해.
나는 아빠와 그다지 유대관계를 쌓지 못한 사춘기였다.
늘 퉁명스러운 내가
아빠 빨리 와
라고 건넨 것이 아빠에겐 기쁨이자 화근이었을까.
그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고. 신호등 앞에 서 있던 트럭을 보지 못하고 트럭을 뒤에서 받아 버렸다. 그리고 즉사했다.
트럭이 신호와 상관없이 오래 멈춰서 있었거나 라이트를 제대로 켜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CCTV는 없던 시절이었고, 우리는 아빠가 죽었는데도 그 트럭측에 보상을 해줘야 했다. 그리고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평수도 좁아졌고 방도 2개 밖에 되지 않았다. 동생은 정신적 허기를 물리적으로 달랬다. 그 한해 동생은 10킬로나 체중이 늘었다. 나는 그렇잖아도 적은 말수가 줄었다. 세상은 가혹하여, 아빠가 죽자 바로 이유없이 나를 놀리고 욕하는 아이들이 등장했다. 나는 무시했다. 아니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빠가 죽어도 일주일이면 아이는 학교에 나가야 한다. 그게 학교의 룰이라고 했다. 아마 이런 룰은 부모를 잃어본 적이 없는 어른들이 만든 게 분명하다,고 그 시절 나는 생각했다.
태어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나면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든 말이다.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요즘 말로 금수저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지만 솔직히 금수저는 또 얼마나 될까.
여하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차피 죽는다는 결론까지 아이에게 안겨주는 것이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에게 늘 미안해하는 것 또한 부모여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컨트롤 하려고 하지만, 아이는 컨트롤 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아이에게 짊어지게 한 것이 많은만큼,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의 인생을 응원하고 적극적으로 돕는 것,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인간으로 키워내는 것밖에 부모가 이 업보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이에게 화가 날 때, 나는 되새긴다.
나의 욕심으로 또는 나의 쾌락의 댓가로 만들어진 아이에게 늘 미안해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