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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Jun 25. 2016

일본의 양심, 80세 여류 시인 이시카와 이쓰코

理想한 사람들_일본 편

-이 기사는 레이디경향 2012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팔십 평생 일본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시를 통해 위로해온 시인 이시카와 이쓰코. 재한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켜온 일본의 양심을 만나봤다.

이시카와 이쓰코의 시들은 매섭게 가슴을 파고든다.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한국인인 필자도 이럴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진실을 읽는 일본인들은 어떠할까. 작은 체구의 그녀는 거침없는 필체로 일본의 과거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해나간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전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바쳐왔다.                                                                        


1933년 도쿄에서 태어난 이시카와 시인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1년 '늑대 우리들'이란 시로 일본 현대시인회 신인상 'H씨상'을 수상하며 등단, 이후 「지도리가후치에 가보셨나요?」(지구상수상), 「부서진 꽃들의 레퀴엠」 등 반전 사상을 담은 시집을 비롯해 미국의 핵실험 피해를 시로 승화시킨 「롱겔랍의 바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한 「애도와 분개-벚꽃나라의 슬픔」 등 열 권 이상의 시집을 발표했다. 아울러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생각한다」는 타이틀의 회보를 100회 발행해 반핵사상을 널리 알려온 인물이다.


일본은 아시아의 해방자가 아니라 침략자였다

LADY 언제부터 시를 써오셨나요?

이시카와 이쓰코(이하 이시카와)

10대 후반부터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많이 부족하고 인간관계도 잘 못 맺는 성격이다 보니 시를 쓰게 됐어요.

LADY 시인으로서만 활동하신 게 아니라 교사셨죠?

이시카와 네, 20년간 중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쳤어요. 때문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LADY 한국의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재한원폭피해자 시민회의'의 회원이신데, 재한 원폭 피해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시카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히로시마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거기서 원폭 피해에 관한 얘기를 들었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에도 원폭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들에게 일본 원폭 피해자의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물론 한국 원폭 피해자에 대해서도 전해야 할 의무를 느꼈어요.

LADY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이시카와 시인은 학생이셨나요?

이시카와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당시엔 피난 가는 사람도 많았죠. 히로시마로 피난 간 사람도 있었어요.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그곳엔 아이들이 꽤 많았어요. 일본군은 미군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미리 건물들을 무너뜨렸어요. 그 건물 잔해를 치우는 것이 학생들의 일이었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날 아침, 건물 쓰레기를 치우러 온 아이들이 고스란히 희생된 거예요. 만일 제가 히로시마로 피난을 갔다면 저도 건물 치우는 일에 동원됐을 테고, 그럼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지 않겠죠. 그런 생각을 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려요.

LADY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군요.

이시카와 잘못된 가치 판단으로 일어난 전쟁에 의해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LADY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이시카와 엄청난 쇼크였어요. 세상이 다 엎어진 느낌이었죠. 1945년 8월 15일, 신으로 알았던 일왕이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부정했어요. 그리고 일본이 해온 전쟁이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이 아니라 침략 전쟁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죠. 배신감? 그래요, 그런 감정이었어요.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한 전쟁, 아시아에 아픔만을 남긴 전쟁…. 8·15 이후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실체가 온 천하에 드러났지요.

LADY 이시카와 시인은 전쟁을 직접 겪으셨고, 이후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신데, 일부 보수파들은 전쟁이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위안부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시카와 일본이 저지른 것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근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소수의 양심 있는 교사만이 제대로 된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지요.


일본은 왜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가

LADY 한국의 피해자들이 전후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시카와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일을 했는지 언론에선 보도하지 않아요.

자신들이 과거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기회가 없다보니 점점 잊히는 거예요.                                                                        

                                                                 이사카와 시인의 시집들

LADY 요즘 일본의 교육 현장은 어떤가요?

이시카와 제가 교사이던 시절엔 '기미가요'가 국가가 아니었어요. 기미가요는 전쟁에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만든 노래라고 가르쳤지요. 그렇지만 국가로 제정된 이후엔 기미가요를 부를 때 교사 전원이 기립해야 해요. 규슈에서 한 교사가 원폭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이 전쟁 때 만행을 저질렀다고 가르친 일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보수파들의 협박이 잇따랐어요. 결국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학교 측에서 사죄를 해야 했지요.

LADY 교육 현장이 보수파, 극우파의 협박에 굴복하고 있는 상황이군요.

이시카와 2005년 3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삼일절 연설을 학생들에게 읽게 한 뒤, 찬반론을 주고받은 마스다 미야코 교사가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교육연수센터로 출두하라는 명령과 함께 반성을 종용당했지만 그녀는 반성할 것이 없다고 대답했어요. 결국 징계 처분을 받았죠. 한 가정과 담당 교사는 종군위안부 얘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 기준을 세우고 잘 생각한 뒤 판단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3개월간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LADY 일본이 점점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보시나요?

이시카와 1961년 문단 데뷔작인 '늑대 우리들'이란 시가 있어요.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는 현장을 군중이 무덤덤하게 둘러싸고 구경하는 풍경이에요. 맨 앞에 늑대 추종자인 소년이 늑대에게 "당신의 팬"이라고 말하지만 늑대는 결국 소년까지 먹어치우죠. 그 시를 쓴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속상합니다.

LADY 국민을 억압하고 과거사도 반성하지 않는 정치가들도 늘고 있다고 보는데요.

이시카와 일본은 섬나라여서인지 폐쇄적이고 '외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잘 몰라요.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리더들은 과거를 부정한 인물들이죠.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으면 처벌을 하겠다는 사람들이고요. 그런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받고 있어요. 이러다 '미니 히틀러'가 나오는 게 아닌지 불안해요.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나온 인물이고 도쿄, 오사카, 나고야의 리더들도 마찬가지예요. 선거에 당선돼 힘을 키우면 결국 이후에 아무도 어떤 저항을 하지 못하게 되지요.

LADY 왜 그런 사람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까요?

이시카와 나고야 시의 가와무라 다카시 시장은 위안부와 난징학살을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유권자들은 시장의 아시아에 대한 사고방식이 어떤지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와무라 시장이 "공무원의 불필요한 월급을 삭감하겠다"라고 하자 갑작스럽게 신뢰를 하기 시작했어요. 공무원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인기를 얻은 거죠.


재일한국인과의 만남이 준 교훈, '인간이란 이름으로'

LADY 동일본 대지진 후, 시인으로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이시카와 지진과 해일은 자연재해지만 원전은 인재입니다. 일본은 화산 위에 있는 섬이에요. 그러한 환경임에도 원전을 세웠습니다. 영원히 처리하지 못할 시설이 화산대 위에 있어요. 지진 후 일본에서는 '강한 나라를 만들자', '하나가 되자'라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는데 볼 때마다 무서워요. '하나'에 외국인은 포함되는지, '강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반원전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희망적이지요. 단체나 조직이 중심이 아니라 개인이 중심인 시위라 반갑습니다.

LADY 이시카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쓰면서도 아프지 않으세요?

이시카와 종군위안부였던 분들을 실제로 만났어요. 그분들은 자신을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하셨대요. 그렇지만 위안부란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에서 '더럽혀진 존재', 즉 자신이 피해자란 의식을 회복하셨어요.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조금 놓였답니다. 도쿄의 지도리가후치는 전쟁에서 사망한 무명의 일본인이 묻혀 있는 곳이에요. 거기에는 안타깝게도 재일한국인을 위한 묘비가 없어요. 그 사실을 알고 시의 힘을 빌려 전쟁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재일한국인을 위로하고 싶었어요.

LADY 영향을 준 인물이 있다면 어떤 분일까요?

이시카와 2003년에 타계한 재일한국인인 고복자씨예요. '전쟁을 용서하지 않는 서민의 동네 여성들의 모임'에서 만났어요. 그 모임은 재일한국인 차별 문제, 과거사 문제 등을 함께 생각하는 모임이었어요. 강연회를 열고 한복 입기 체험도 하고, 한국에도 같이 갔지요. 고복자씨와 한국의 원폭 피해자분들을 뵙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복자씨는 '인간이란 이름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자신에게는 아무런 직함도 없지만 인간이란 이름으로 살겠다고. 그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LADY 이상적인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이시카와 인간이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영화 '백자의 사람'을 봤어요. 조선의 백자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 녹화에 힘쓴 인물입니다. 그가 나무를 심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고 상징적이에요. 저도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살아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나무를 심고 싶어요.이시카와 시인의 나무인 시들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그녀가 남긴 족적은 일본의 양심선언이다.           

         

소녀

문밖의 의자에 앉아버티는 소녀

가을날에도 한겨울에도 부들부들 눈은 내리고 소녀의 검은 머리에 무릎 위에 쌓인다

당신은 고향에서 아득히 먼 남쪽 땅에서원폭에 쓰러졌나 굶어 죽었나

아니면 속아 연행된 중국의 '위안소'에서일본군 병사에게 반항해 칼에 베었나전염된 성병으로 앓다가 죽었나

"'위안부'가 아니라 성노예였습니다"

고달파도 살아남아 해방 후에도 온갖 고생을 겪은지난날의 소녀들

지금은 나이든 할머니들은젊은 날의 자신의 환영을 보며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 위에 내린 눈을 가만히 털어내린다

한국 일본대사관 앞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소녀

20만에 달하는 피해자들의비분을 부드러운 가슴에 안고앉아 있는 소녀

지금도 지구 여기저기일어나는 수많은 소녀들의 굴욕을 향해

두 눈을 똑바로 뜨고눈에 젖어가며 앉아 있는 소녀의 상

- 이시카와 시인이 위안부 평화비(소녀상) 건립을 기념하며 쓴 시


<■글 & 사진 / 김민정(「레이디경향」 일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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