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想한 사람들_일본 편
ㆍ방글라데시에서 시작한 명품 백 만들기 프로젝트
'방글라데시산 명품 백' 하나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듯하다. 15초마다 똑같은 백을 든 사람을 만난다는 그 유명 브랜드 제품보다 독특하고, 공정무역이라는 온기가 담겼으니 이 백이야말로 명품이 아닐까. 젊은 여성 사업가 야마구치 에리코가 방글라데시에서 제작한 가방은 뛰어난 기능성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가능성을 믿고 개발도상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한 그녀의 좌충우돌 인생 스토리를 공개한다.
첫 번째 기적 만들기
주트로 가방을 완성하다
게이오대학은 1920년에 세워진 일본 명문 사립대학으로 경제 발전을 통한 사회 공헌을 장려하고 있다. 이 대학을 세운 후쿠자와 유키치는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그의 지론을 지켰고, 일본 1만 엔권 지폐의 인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실제로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고위급 공무원이 되기보다 은행에 취업하거나 회사의 대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야마구치 에리코(31)는 이 일본 최고의 사립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서 국제협력에 관해 배웠고, 국제기관에서 개발도상국 원조를 꿈꿨다. 대학 시절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워싱턴의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에서 인턴 코스를 밟았다.
이후 그녀는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하다는 방글라데시로 날아갔다. 인턴에서 직원이 되는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함을 체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방글라데시행을 택했다. 현지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산업 창출을 위해 방글라데시에선 흔한 주트(커피 봉투)를 소재로 가방을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주트 가방은 어느새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창업 6년째 일본 내에 8개, 타이완에 4개 총 12개 점포를 운영 중이며, 연매출은 5억 엔에 달한다. 매일 울면서 달려왔다는 그녀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자.
레이디경향(이하 LADY) 3일 전에 네팔에서 일본으로 귀국했다면서요? 주로 외국에서 지내나요?
야마구치 에리코(이하 야마구치)
50%는 네팔, 40%는 방글라데시, 10%는 일본에서 지내요. 방글라데시에선 주트로 가방을 만들고 네팔에선 옷과 니트 모자, 공책 등을 만들어요. 네팔은 이제 시작이죠. 내년 봄쯤 네팔산 제품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LADY 아시아를 종횡무진 중인데, 많이 바쁘지 않나요?
야마구치 돌아다니면서 아시아 문화를 접할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LADY 10년 전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많이 다른가요?
야마구치 스무 살 때는 막연히 국제협력에 흥미가 있었어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고 싶어서 워싱턴에서 인턴 생활을 했는데 '현장감'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죠. 선진국이 원조하는 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방글라데시로 향했어요.
LADY 방글라데시에 처음 간 게 2004년이었죠?
야마구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벌 떼처럼 저한테 달려들더라고요. 돈을 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무섭고 불안했어요. 한편으론 그 많은 원조금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많이 원조를 했는데 이 사람들이 여기서 왜 저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LADY 그 해답은 찾았나요?
야마구치 방글라데시의 대학원에 다니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죠. 제가 현지 대학의 첫 외국인 유학생이었어요. 방글라데시로 공부하러 오는 외국인이 아무도 없던 시절이었죠. 뱅갈어 사전을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간신히 집을 구했는데, 막상 가보니 수도도 전기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구청과 같은 관공서를 찾아갔더니 제게 뇌물을 요구하더군요. 어디에서나 뇌물을 요구했어요. 아마 원조받은 자본도 부패한 정치 구조로 인해 서민층까지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요. 뇌물이 오가는 사회를 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그런 면을 바꾸고 싶었어요. 꼭 바꿀 수 있다고 믿었죠.
올 9월 문을 연 마더 하우스 아키하바라 본점. 의류는 네팔에서 생산한 핸드메이드 제품이다. 손으로 만든 노고와 따뜻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것이 야마구치씨의 꿈이다.
LADY 사회를 바꾸기 위해 시작한 것이 가방 만들기였나요?
야마구치 방글라데시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 헤매다가 '주트'를 만났어요. 주트는 커피를 보관하는 마섬유예요. 방글라데시는 주트의 세계 최대 수출국이에요. 이 주트를 좀 더 멋스러운 제품으로 만들어 부유한 나라에 팔면 방글라데시에 새로운 산업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LADY 주트로 가방을 만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야마구치 샘플을 만들어줄 공장을 찾느라 수없이 발품을 팔아야 했어요. 서른 곳이 넘는 공장을 찾아가면 한 군데 정도에서 샘플을 만들어주겠다는 반응이었어요. 그러다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요.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사회라 여자가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일본에서 온 작은 여자를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어요. 주트란 소재로 가방을 만들겠다는 제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죠. 주트는 커피 봉투 외엔 쓸모가 없단 선입견이 강했거든요. 여자가 새로운 일에 나선다는 것이 방글라데시에선 이상한 일이었고, 그래서 고민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죠.
LADY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야마구치 참 이상한 일인데 안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주트로 예쁜 가방을 만들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주트 가방이 멋진 매장에 진열된 그림만 머리에 떠오르는 거예요.
그녀의 첫 번째 기적은 그렇게 이뤄졌다. 수없이 발품 팔아서 드디어 만난 공장에서 1백60개의 주트 가방을 만들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수십만 엔을 전액 투자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들고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판매 전략도, 인맥도 없이, 방글라데시에 새바람을 넣겠다는 포부만 한아름 안고서….
두 번째 기적 만들기
패션으로 사회를 바꾸다
LADY 가방을 만들었으면, 팔아야 하잖아요.
야마구치 또 수없이 발품을 팔기 시작했죠. 눈에 보이는 가게란 가게는 모두 찾아가 가방을 취급해달라고 사정했어요. 그런데 방글라데시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하니 이미지가 좋지 않다며 거절하곤 했어요. 한편으로 홈페이지 판매를 시작하고,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취재 요청을 하기도 했죠. 그러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LADY 가게를 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나요?
야마구치 도쿄에서 가게를 차리려면 1천만 엔은 있어야 한다는 통설이 있어요. 제게는 꿈도 꿀 수 없는 돈이었죠. 여기저기 가게 터를 알아보다가 아키하바라에 월세 8만 엔의 가게를 찾았어요. 원래는 창고였는데 깔끔하게 손질을 했더니 꽤 괜찮더라고요. 가게를 오픈하자 제 블로그를 보던 독자들이 하나 둘 찾아오셔서 가게도 조금씩 커지고, 어느새 일본 내 매장이 여덟 군데로 늘었어요.
LADY 가방 디자인도 하던데, 따로 관련 공부를 했나요?
야마구치 아니요. 저 혼자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공장 직원들에게 전달해서 같이 만들어 나가요. 일본의 가방 장인 밑에서 배우기도 했는데, 일본은 재봉틀 성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도구도 매우 좋아요. 그런 일본에서 만드는 방식으로는 방글라데시에서 작업할 수가 없어요. 방글라데시엔 제대로 잘리는 가위도 없는 상황이에요. 특유의 기술과 도구로 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LADY 그럼 디자인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야마구치 일본에 거의 머물지 못하다 보니 패션 잡지를 볼 겨를이 없어요. 주로 자연에서 힌트를 얻어요. 방글라데시의 하늘, 일본의 단풍, 꽃, 풀 같은 것들에서요. 보편적인 주제죠.
LADY 야마구치씨가 방글라데시에서 가방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방글라데시 산업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이후 일본인의 방문이 늘고 있다죠?
야마구치 제가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후 그 방송을 보고 방글라데시를 찾는 일본인이 늘었다고 해요. 또 각 기업에서 직원을 파견해서 방글라데시의 산업 실태를 조사 중이기도 하고요. 일본 유니클로는 방글라데시에 청바지 공장을 세웠어요. 제가 내디딘 첫발이 이렇게 방글라데시의 의류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지요.
LADY 정말 큰 영향을 미쳤군요. 방글라데시 내에서 느끼는 변화는 어떤가요?
야마구치 저는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해요. 한 테이블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일해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면서 깜짝 놀라곤 하죠. 외국에서 온 사장들은 하나같이 "일해", "빨리", "싸게" 등의 명령만 내리는데 전 같이 일하니까요. 그들과 다른 제 모습을 보면서 저희 공장 직원들은 일의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물론 이익을 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지만 단순히 돈만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을 갖게 됐죠.
LADY 경제적으로도 많이 나아졌나요?
야마구치 방글라데시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아니에요. 전기도 통하고 수도도 생겼고요. 2004년과 크게 달라졌어요. 저희 공장 직원들은 패션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휴대전화가 있는 직원도 있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방을 만드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포기 없는 투지와 추진력, 그리고 친화력으로 결국 주트 가방을 생산하게 됐다. 그녀는 매일 공장에 나가 아침부터 밤까지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이런 친화력은 품질 개선이란 눈부신 결과를 낳았다. 친구 같고 동료 같은 CEO만이 만들 수 있는 기적이다.
야마구치의 도전은 일본 의류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산이 대부분이었던 의류 업체가 방글라데시를 생산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일본의 한 여행사는 야마구치의 회사와 함께 방글라데시 투어를 진행 중이다. 단순히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협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장점을 알고, 그 장점을 살린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해 경제력을 높이겠다는 그녀의 발상은 충분한 결과를 얻고 있다.
이지메, 유도선수…기적을 위해 겪어야 했던 과거들
'하면 된다'라는 정신으로 가방을 만들고 브랜드를 창조해온 야마구치. 긍정의 힘으로 무장한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 겪었던 과거는 밝지만은 않다. 초등학교 내내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당했고, 중학교 때는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 불량 청소년으로 비행을 저질렀으며 그 비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도를 선택했다.
LADY 학창 시절 이지메를 당했다고 들었어요.
야마구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절 때리고 발로 차는 남학생들이 있었어요. 때리는 강도가 점점 세졌죠. 6년간 학교급식을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아이들이 다 빼앗아갔으니까요. 베란다에 잠시 나가면 교실 문을 잠가버리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칸막이 너머로 물을 뿌렸어요.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에서 차는 바람에 입 안이 피범벅이 된 적도 있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교문이 보이기만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 다리가 후들후들…. 도저히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죠.
LADY 학교생활을 포기하지는 않았나요?
야마구치 엄마가 학교 앞까지 바래다주곤 하셨어요. "조금씩 해보자"라고 하시면서요. 처음엔 교문 앞까지, 둘째 날은 학교 현관까지, 그 다음날은 교실 앞까지, 그 다음날은 교실 안까지, 그리고 또 그 다음날은 1교시만 교실에서 버텨봤죠. 다음날은 2교시까지 버텼어요. 그렇게 조금씩조금씩 하다 보니 6학년 때는 하루 종일 학교에 있을 수 있게 됐죠.
LADY 그때 경험이 사업에 도움이 됐나요?
야마구치 네. 제 삶엔 '포기'란 단어가 없어요. 조금씩 걸어가면 거기 교문이 있고, 교실이 있고, 조금씩 견디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는 거죠. 조금씩 가다 보면 꿈이 이뤄질 거라 생각했어요.
LADY 이지메 때문인가요? 유도선수로도 활약했던데요.
야마구치 중학교 시절엔 정말 강해지고 싶었어요. 진정한 강인함을 배우기 위해 유도를 시작했죠.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까지 유도를 계속해 전국 7위까지 오르기도 했어요.
LADY 일본에서 이지메 문제가 끊이지 않잖아요.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야마구치 이지메를 당할 때는 자신의 세계가 아주 좁아져요. 이지메를 하는 악당과 자기 혼자만의 외로운 세상이지요. 그렇다 보니 꿈을 꿔도 매일 이지메를 하는 악당만 나오죠. 근데 상상해보세요. 세계는 매우 넓어요. 일본의 한 학교라는 좁은 세상 말고 넓은 곳을 보세요. 방글라데시엔 두 시간이나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을 상상해보세요. 눈이 확 뜨이지 않아요? 세상은 매우 넓어요. 이지메를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는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세 번째 기적 만들기
인간에 대한 기대와 믿음
LADY 회사 이름이 마더 하우스인데,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야마구치 마더 테레사를 존경해서 '마더'를 붙였어요. 사람들을 감싸 안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고 냉정한 판단을 했던 테레사 수녀님처럼 되고 싶어요. '하우스'는 따뜻한 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붙인 이름이에요. 방글라데시, 네팔엔 집 없는 아이들이 많아요. 길거리에서 사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LADY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지요?
야마구치 따뜻한 온기를 전달하는 상품과 가게를 만들고 싶어요. 저희 브랜드의 컨셉트를 유지하고 공정무역이란 프로세스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겁니다.
그녀는 손으로 만든 따뜻한 상품이 주는 가치를 알아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애써 자신의 브랜드가 공정무역의 노고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마더 하우스는 가방 브랜드예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가방으로 일류 브랜드가 될 거예요."
가방이 일류 브랜드가 되면 저절로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그럼 그때 방글라데시와 네팔과 공정무역으로 생산한 제품임을 알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공정무역이란 팻말 없이 비즈니스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패션은 세상을 움직여요. 아름다워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욕망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죠.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일류 브랜드에 대한 동경, 로컬 브랜드에 대한 애착, 그런 마음이 사회를 바꾸게 하죠. 전 멋진 가방과 아름다우며 질 좋고 편안한 옷을 제공해서 이 사회를 바꾸고 싶어요."
끝으로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마더 테레사 혹은 어머니? 그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방글라데시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기적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 ■글 & 사진 / 김민정(「레이디경향」 일본 통신원) ■사진 제공 / 야마구치 에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