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 도쿄여자 #16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어느새 장마입니다. 매년 찾아오는 장마철인데 올해는 좀 견디기가 힘드네요. 화려한 여름이 요즘은 견디기 힘든 여름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탓을 하고 싶어집니다. 저에겐 견디기 힘든 계절도 아이들에겐 축복입니다. 첫아이는 나팔꽃을 키우고 있어요. 매일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확인하고 물을 줍니다. 여름의 축복이 나팔꽃에 스며들어 있고 아이는 그 축복을 즐기고 있습니다. 공원에 가면 새파란 잎들이, 우리는 청춘이라고 외쳐댑니다. 연분홍 벚꽃도 아름답지만, 연두색의 새 이파리들도 눈에 부십니다. 여름은 참 아름답습니다. 제가 가장 그리운 풍경은, 논이예요. 청록의 벼가 솔바람에 살살 흔들리는 풍경 말입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바람소리, 청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정적. 온통 푸르른 논. 그 자연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른들은 늘 말하죠.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건 90%가 우리와는 다르다, 우리 시절과는 변했다를 말하는데, 속내는 요즘 아이들을 얕보거나, 흠을 잡기 위한 거죠. 대체 "요즘 애들이" 뭘 어쨌다는 걸까요? 아마 어른들도 자기가 '요즘 애들'이었던 시절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 같아요.
전 요즘 애들은 참 영리하단 생각이 듭니다. 아뇨, 요즘 애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포함해 이전 아이들도 영리했다고 생각해요.
큰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들을 데리고 옵니다. 옆 골목에 사는 남자아이가 찾아올 때도 있고, 같은 동네 사는 여자 아이들이 서너명 와서 인형놀이를 하고 갈 때도 있어요.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이 아이들이 저희집에 놀러 올 때마다 '과자'와 '물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이에요.
작가님, 작가님은 친구네 집에 갈 때 물통이나 과자를 싸가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없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 아파트에 살 때, 옆집이 같은반 친구였어요. 그 아이 집에 가면, 그 집 어머니는 흰쌀밥에 단무지와 햄, 오이를 깍뚝썰어 넣고 참기름과 소금을 쳐서 비벼주셨습니다. 간단한 비빔밥이었는데, 어찌나 맛이 있었는지 몰라요. 단무지의 새콤달콤함이 포인트였습니다. 옆동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가면, 늘 과자가 있었고, 다른 동네 친구네 가면 김밥에 잡채까지 챙겨주는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안주시거나 어머니가 일을 하셔서 집을 비운 친구도 있었지요. 여하튼 엄마의 요리솜씨나 간식이 인기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저희집은 엄마가 좋아하시던 파운드 케잌, 넛츠, 그리고 샌드위치가 주 접대 메뉴였어요. 여하튼 식탁 위에는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먹을 만한 것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딸 친구들은 사탕, 캐러멜, 쿠키, 센베이를 알아서 가져와요. 그리고 3시-3시반 사이에 누군가가 "간식 타임!"을 외치면 각자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누어 먹습니다. 물통도 들고 다니기 때문에, 저는 물을 대접할 필요도 없어요. 간식과 음료수가 뇌물은 아니지만, 그나마 나이 많은 엄마에겐 아이들과 친해질 방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수단을 하나 빼앗긴 거죠.
일본사람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이들은 아직 초1임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챙겨서 친구네 집을 오갑니다. 엄마로서 제가 요리 솜씨를 뽐낼 일이 없다보니, 아이들과 교류할 건덕지가 사라진 느낌도 들어요(웃음). 일본인들은 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여길까요.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성실함의 다른 표현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일본에선 지각을 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늘 전철을 타요. 승용차도 버스도 길이 막히면 지각을 할 가능성이 있어서 선호하지 않습니다. 승용차로 등교를 하거나,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어요. 버스도 워낙 타는 사람이 없어서 폐지되는 노선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도쿄란 대도시에서 말이죠. 일본에서도 인맥과 부의 여부가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의 조건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성실함입니다. 성실함은 기본적인 판단 조건이며, 지각을 하거나 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은 이미 성실함을 벗어난 행동입니다.
일본은 지진과 해일을 반복해서 겪어온 나라입니다. 태풍도 어찌나 많은지 몰라요.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자연 재해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성실함입니다. 약속을 지키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아 마땅한 사람이지요. 새날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고요. 돈이 많거나 인맥이 있거나, 하는 요건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요소예요. 아니 돈과 인맥이 없어도 성실함이 있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옛날에 말이죠. 자연과 마주하고 싸움을 계속해온 사람들이 갖춰야할 덕목이 성실함이 된 것을 저는 약간 이해할 수 있어요. 공동체(커뮤니티)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니까요.
남편에게 물어봅니다. "당신도 어릴 때 물통이랑 과자 들고 친구집에 놀러갔어?"
남편의 대답은 "노"입니다. 주변 엄마들에게도 물어봅니다. 역시나 대답은 "노"예요. 큰아이 친구 엄마가 요즘은 그렇게 되었고 덧붙여 줍니다. "요즘 애들은 꼭 과자랑 물통을 들고 다니더라고요. 그런 흐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딸아이에게 물통과 과자를 쥐어줍니다. 아이들만의 공동체에서 딸아이가 살아남기를 바라면서요. 물론 남의 집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말이죠, 전 한편으론 사람이 어느정도 민폐를 끼치기 마련이고 아이들 간식쯤은 민폐 좀 끼쳐줬음 싶을 때도 있어요. 어릴 때부터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아이가 비굴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적당하게 눈치보면서 적당하게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간식을 챙겨 다니는 사회. 일본만 그런 걸까요? 한국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저는 아이들이 놀러와도 간식 챙겨줄 필요가 없어서 시원섭섭한 여름을 보내고 있어요.
도쿄여자 김민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