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2

서울여자 도쿄여자 #23

by 김민정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제가 어떤 아이였냐고 물으셨죠? 저도 경희 작가님처럼 '보물섬'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어디 '보물섬'뿐인가요? 소년중앙, 어깨동무, 새소년 같은 월간지를 매달 사서 봤습니다. 저희 아빠는 만화광이었어요. 그 시절엔 어른도 아이도 모두 같은 소년소녀용 잡지를 사서 읽었습니다. 만화가 그렇게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만화는 아이용, 아니면 성인물로만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어요. 천안역 양지문고. 아빠는 잡지가 나오는 날이면, 저를 양지문고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보물섬, 어깨동무, 새소년 등등을 잔뜩 껴안고 나옵니다. 그러면 아빠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누가 먼저 어떤 잡지를 읽을지를 정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서 조용하게 열심히 읽었습니다. 당시엔, 만화를 보지 말라던 교육을 하기도 했는데, 저희집에선 만화는 추천도서였고, 저는 만화를 보며, 한글을 뗐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만화가를 꿈꿨어요. 대학입시에 떨어지면, 만화가 밑에서 만화를 배울 생각이었습니다. 운 좋게 대학에 붙었고, 만화가의 꿈을 접었습니다. 아니요, 저에게 재능이 있었다면 만화의 길도 열렸겠죠. 재능이 없어서 만화는 도전해보지도 못한 꿈으로 졌습니다.

'보물섬'하면 '아기공룡 둘리'죠. 전 그런데 아기공룡 둘리를 잘 읽지 않았어요. 그저 일상을 담은 그 만화의 재미를 어린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정핑크'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이두호의 '머털도사'도요.


그때 나오던 그 잡지들에는 여름이면 세계 7대 불가사의, 세계의 요괴며 괴담 같은 부록이 끼어있었는데 기억하세요? 저는 그 부록들을 참 좋아했어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버뮤다 삼각지대에 관련된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지도상에서 버뮤다 삼각지대를 찾아보곤 했지요.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과거로 갔는지, 아니면 미래로 갔는지. 그것도 아니면 평행 우주의 어딘가인지. 저는 아직도 궁금합니다. 요괴 중에서는, 등에 입이 달린 서양 요괴가 생각이 나요. 하와이던가, 어디 섬나라 요괴인데, 그의 등에는 상어입이 달려있습니다. 평소엔 티셔츠를 입고 지내는데, 누가 잘못해서 옷을 벗기기라도 하면 상어입으로 사람을 꿀꺽 삼켜버리는 요괴입니다. 요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티셔츠를 입고 등을 보이고 앉아있던 일러스트는 아직도 생각 납니다.


저는 독특한 것들을 사랑했어요. 지금도 그렇고 어릴 때도 그랬어요. '믿거나 말거나' 기억하세요? 토요일 학교가 끝난 후 돌아온 저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믿거나 말거나' 방송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작은 사람, 가장 손톱이 긴 사람, 가장 오래 물구나무 서기를 한 사람 등이 영상으로 비춰집니다. 가장 믿을 수 없었던 건, 갓 결혼한 아내가 남편의 소변을 마시던 장면이에요. 충격적인 토요일의 방송은 '세상은 넓고 재미난 사람은 많다'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해 주었습니다.


참, 또 하나 있네요. 외국 배우들이 서커스에서 훈련을 하고, 서커스를 보여주던 방송이 있었습니다.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공중 그네를 배우는 배우들의 열정적인 모습도, 공중 그네의 환상적인 묘기도 모두 제 영혼을 홀렸습니다.


저는 만화, 세계 7대 불가사의, 서커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를 좋아하는, 약간 기괴하고, 괴기한 아이였습니다. 커서 탐정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일본에 오니, 탐정이란 직업이 남녀관계를 뒷조사하고, 바람피우는 증거를 찾아주는 일이란 걸 알게 되면서, 괴리감을 느꼈고, 명탐정의 꿈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저는 여전히 만화와 세계 7대 불가사의와 서커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를 사랑합니다.


얼마전, <캐리 다이어리>를 봤더니 이런 대화가 나오더라고요. 대학을 포기하고, 남자친구를 따라 캘리포니아에 가려는 캐리에게 실망한 캐리 아버지. 캐리 아버지 친구는 캐리 아버지를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렇게 크는거야. 실수도 실패도 하고 성장하는 거야. 그렇게 커서 뭐가 되냐고? '재밌는 사람'이 되는 거지."

이렇게 짜릿한 대답이 있을까요? 마흔, 비정규직 강사, 글쓰는 프리랜서. 저는 저의 현실이 늘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정규직만의 4대보험도 없고 보너스도 없고 위태로운 생활에, 아이는 셋이나 됩니다. 과연 제가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어 줄 수 있을지 늘 걱정이 되어요. 하지만, 이 드라마의 이 대사를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깨에 들어갔던 쓸데없는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재밌는 사람'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만화와 세계 7대 불가사의, 서커스와 '믿거나 말거나'를 좋아하는, 그런 아줌마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도쿄여자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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