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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Aug 20. 2016

상상가출

서울여자 도쿄여자 #34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


한때는 말이죠, 복권이 맞으면 뭘 할까. 꿈을 꿨어요. 잠들기 전에. 일본의 복권의 최고 금액은 3억엔입니다.


3억엔이 맞으면 1억엔은 기부를 하고, 5천만엔으로 주택론을 갚고, 나머지 5천만엔은 저금을 하고, 나머지 1억엔은 아이들 몫으로 남겨놔야지. 그리고 딱 100만엔을 들고 쇼핑을 하러 갈 거야. 이세탄 백화점으로. 그런데, 겨우 아이들 앞으로 1억엔을 남겨봤자, 그게 도움이 될까? 내가 덜 쓰고 더 남겨줘야 할까?


맞지도 않은 복권인데 상상만으로 왜 이리 행복해지는지 모르겠어요? 경희 작가님은, 복권이 맞으면 뭘하실 거예요?


저는 요즘은 복권 맞는 꿈을 꾸기 보다, 가출을 꿈꿉니다. 수유를 하다 잠이 깬 날은 호텔을 검색합니다. 몰디브나 프랑스의 최고급 호텔도 아니고 동네 호텔입니다. 신주쿠의 호텔, 시부야의 호텔, 나카노의 호텔. 1박에 3만엔이 넘는 곳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제가 묵을만한 곳은 아닙니다. 저는 더 오래 묵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싼 곳을 찾아봅니다. 7000엔짜리 비지니스 호텔도 있습니다. 저렴한 곳들은 늘 방이 부족합니다. 3000엔짜리 캡슐 호텔도 있습니다. 캡슐 호텔은 말 그대로 캡슐 형태의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잠만 청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만 있으면 되니까 묵는 공간이 좁아도 상관 없습니다. 그치만 매일 3000엔이면 한달이면 얼마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상상가출이 끝에 달합니다.


때때로 다 두고 나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초1, 만 3세, 만 0세의 아이 셋. 가끔 너무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없었으면, 이란 상상은 하지 않습니다. 있는 것 없었다고 치는 것처럼 잔인한 것도 없으니까요. 그저 한 일주일 사라지고 싶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것 또한 잔인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잠시 사라졌다 돌아오면 집안에서 제 가치가 더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무작정 들 때가 있어요. 언젠가 돌아올 가출이죠. 그런데 이 언젠가 돌아올 게 분명한 가출도 꿈 속의 꿈입니다. 만 0세 아이는 수유를 해야 하고, 첫째도 둘째도 아직 손이 많이 갑니다.


집을 나가면, 글을 쓸 거예요. 원 없이. 24시간이 오로지 제 시간입니다. 영화도 한 편 보고, 커피도 느긋하게 마시고, 옷도 좀 보러 가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겨우 이것뿐입니다. 겨우 이것을 위해서 집을 나가야한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저에게 친정 엄마가 있었다면, 하루쯤 아이를 맡길 수 있었을까요? 만일에 일본의 육아 도우미 시급이 한국의 2-3배가 아니었다면, 아이를 맡길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치만,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게 아직 불안합니다. 외출 후 2-3시간이 지나면 가슴이 불고, 자연스럽게 막내 생각이 납니다. 밖에서 미팅을 끝낸 후에는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운 게 아니라, 어떤 본능이 저를 그렇게 집으로 끌어들입니다. 아니, 본능이란 단어를 쉽게 쓰는데 대해선 위화감을 느낍니다. 모성이나 부성이란 단어도 그렇고요. 여하튼,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이들과 남편이란 현실은 저를 집으로 복귀시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아이들 얼굴을 본다고 마냥 행복이 샘솟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제 자리에 있다는 약간의 안심감, 제가 낳은 생명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최소한의 달성감을 느낄 뿐입니다.


가출과 일탈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요. 구마키리 가즈요시 감독의 두번째 작품인 <하늘의 구멍>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헐리우드로 활동영역을 넓힌 기쿠치 린코예요. 90년대의 영화로 그 작품에서 그녀는 90년에 일본 여자를 연기합니다. 90년대은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오랜 불경기 시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유명한 명품들을 알고 있거나 소유하고 있습니다. 최저 시급은 이미 천엔 가까이 되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영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하다고 느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젊은 여성들은 얼굴을 검게 칠한 개성적인 화장을 하고 버버리의 미니스커트로 거리를 활기차게 걸었습니다. 기쿠치 린코는 그 시절의 개성적이지만, 소극적인 여주인공을 연기합니다. 주인공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무작정 길을 나섭니다. 그녀는 홋카이도의 작은 식당에 들어가, 돈없이 요리를 시켜 먹고, 그 식당에 눌러 살게 됩니다. 남자 주인공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에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조폭 아저씨 역으로 유명한 데라시마 스스무입니다. 여주인공보다 스무살쯤 많아 보이는 아저씨와 여주인공은 금세 사랑에 빠집니다. 연인이 된 후엔 홋카이도의 숲 속을 헤매입니다. 그게 다인 영화예요.


무작정 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정착하는 삶. 저는 그런 삶을 늘 동경합니다. 무전여행을 떠났다가, 동유럽의 어딘가에서 사랑에 빠져 거기 머무르게 된다든가, 이즈의 한 바닷가 마을에 혼자 사는 할머니집에 우연히 같이 살게 된다든다, 오키나와의 어느 카페에 갔다가 우연히 일을 하게 된다든가.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또한 일상이 되겠죠. 결국은 일탈도 일상이 되어버릴 게 분명합니다.


아이가 없었으면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정착해 처연하지만, 어딘가 미소를 간직한 그런 여자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만일에 아이가 없었다면 저는 더 행복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그러리라 답하지 못합니다.


아이는 제 삶에 어느 정도 제약을 줍니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하면 당연히 체력적으로 버겁고, 아이가 있다면 취업전선에서도 불리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있어서 제가 얻는 것들도 있지요. 아이가 있는 사람들의 입장도 알게 되었고, 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주 조금이지만 관대해졌습니다. 그리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 아이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태어나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저는 아이가 있는 여자로서의 삶의 재미를 만끽하며 가보려고 합니다. 매운 떡볶이를 만들어 "엄마는 이렇게 매운 음식도 먹을 수 있다"고 자랑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나누어 먹고, 원고를 쓰다가 "화장실!"을 외치는 아이를 화장실까지 데려가 한숨도 쉬며, 나중에 아이가 크면 함께 도서관에 가고 쇼핑을 즐기는 상상도 하며, 제가 처한 상황을 조금더 받아들이며 가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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