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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Sep 16. 2016

시대의 이방인, 재일동포 경영자이자 페미니스트, 신숙옥

#김민정의인터뷰

#이 인터뷰는 2001년의 기사입니다.


신숙옥  재일코리언3세. 1959년 도쿄 출생. 1985년 인재육성회사()고가샤를 설립인재능력육성 프로그램 개발, 육성환경개발에 힘써 신문잡지에 컬럼을 집필텔리비전라디오의 코멘테이터로 활동. 


 신숙옥은 누구인가몇년전만 해도 그녀는 자주 텔리비전에  모습을 드러냈다뉴스ㆍ정보방송 코멘테이터, 그 유명한(?)‘아사마데 나마 테레비(아침까지 생방송:아침까지 게스트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는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약자의 편에 서서 성인남성들과 정면 대결을 벌이고번득이는 무언가를 꾸준히 갈고 닦아온 그녀. 신숙옥그녀는 누구인가? 인재육성 컨설턴트? 자유기고가? 페미니스트? 재일문제해결사독설가독불장군? 신숙옥씨가 경영하는 인재육성회사(주)고가샤바삐 작업중인 사람들과 널려있는 자료들이 분주함을 대번에 눈치채게 한다. 작은 얼굴에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시대의 이방인

-신숙옥씨가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란  의식하기 시작한  언제입니까?

“처음부터 조선인이란 의식이 어딘가에 있었어요. 서너살  일인데우리집에 동포들이 자주 놀러오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아, 난 조선인이구나’하고 느꼈죠그러던 어느날, 제가 이웃집에 가서 “ 조선인이야!”하고 자랑을 했어요. 그때까지 우리 이웃들은  사실을 몰랐었어요그 다음날부터 우리 언니 오빠가 “어이조센징 조센징!” 손가락질을 받아야했어요. 저 때문에요.


 ‘하하하’상쾌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뒤흔든다또박또박한 말투와 차분하면서 적당한 톤, 인재육성을 맡아온 경험에서 축적되었을 완벽한 자기연출그 웃음소리까지 또렷해서 또 한번 주눅이 드는 필자. 


“일본인 부락에서 살다보니 오히려 조선인이란 부담감이 좀 덜했던 것 같아요. 조선인 밀집지역은 일본의 사회의 직접적인 차별 타겟이지만저처럼 일본인 틈속에서 사는 사람은 감히 ‘조선인이라고 숨도 못쉬는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부담감이 덜 했죠.”


-일본국적을 취득하셨나요?

“한국국적입니다. 한국국적을 가졌지만조선인’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불림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왜 자랑스런한국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느냐고 질책을 받았죠. 불려가면 처음에 이렇게들 말해요.“우리말 잘하시네, 어디서 공부하셨어요?”이게 바로 절 걸려들게 하려는 속셈이예요. 민족학교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하면 바로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그런 시절이었어요.”


-요즘에도 불려가신 적이 있어요?

“아뇨. 요즘은 그런  없어요.


-실제로는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셨어요?

“저는 귀로 한국어를 익혀왔어요. 듣고 이야기하고 읽는데는 문제가 없는데잘 못 써요. 발음나는 대로만 써요. 1세들과 비슷해요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조선어ㆍ한국어를 잘 못 쓰셨어요. 그래서 귀에서 귀로 계승되어 왔어요.”


 귀로 익히고사업을 통해 한국을 들낙날락하면서 한국어 실력을 꾸준히 닦아왔다.


“민족학교에도 4년  재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민족학교에서는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의 당당한 영도자의 한분이신…” 이 어구를 말하지 않고서는 다음 얘기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아직도 이렇게 머릿속에 박혀있어요. 일본학교에서 민족학교로 전학을 갔다가다시 일본학교로 전학을 했지요. 그러다보니 어딜가도 항상이단아로 취급받았죠.”


 그녀가 집필한 책을 읽다보면 어린 시절 이야기가 언급되곤 한다민족학교에 다니던 시절 처음 붙은 별명이반쪽바리’, 일본학교에 다니다 전학을 왔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자기비판을 강요받았다. 중학교 시절 일본학교로 전학을 했을  한국이름으로 원서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전학하고 보니 모든 서류에 일본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보다 편한 학교생활을 보내라는 담임의 배려였다는 사실이 더 서글픈 일이었ㄹ다고 그녀는 서술한다.


살아남으려면, 성차별에 대항하라! 앞서보는 경영인의 탄생

 신숙옥씨는 현재 인재육성회사(주)고가샤를 운영하고 있다. 인재육성계에서 누구보다도 빨리 인권의 문제에 착목한 고가샤는 벌써 17년째  운영기반을 탄탄히 다져가고있다


-인재육성회사를 설립하신 이유는?

“조선인은 학교선생님이 될 수 없었어요. 기업에 취직하기도 힘들었습니다재일조선어린이들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든가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든가 그런 꿈을 갖은 어린이가 드물어요. 조선사람 중에서 유능한 사람은 의사가 되든가요즘에는 변호사를 선호하지요. 그 나머지 사람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말단의 생활을 강요받게 됩니다. 일본사회 곳곳에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고또 조선사람들도 비지니스의 세계에서 함께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에 관심은 있었지만 선생님이  자격은 없었고그렇다면 비지니스인을 위한 연수에 착목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20대엔 모델로도 활동하셨죠?

“그런 적이 있었나..?”

하면서  한번 제끼는 함박웃음.


“전 어릴 때부터 일을 했어요. 예닐곱살 때부터 야쿠르트 배달을 했었습니다언제나 일을 했었지요. 지금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지만 그때는 부모님을 돕는 아이가 착한 아이였어요모델이란 일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모델로 일하다가 일본의 광고대리점에서 4년간 SP(세일즈 프로모션)일을 했었어요.”


  20여년전 광고대리점에서 일했을 때, 3일 목표매상이 3천만엔이었다 한다그녀는 4년간 한 번도 목표매상 NG를 내본 적이 없다광고대리점 시절의 그녀는 유명인사였다빠르면서도 똑부러지는 말투가 믿을만 했다. 그녀 자신도말’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한다. 일본경제가 버블경제로 진입하던 시절경제계에 새바람이 불고 비지니스쇼가 성황을 이루었다. 조선인계약사원더이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어보이던 광고대리점을 그만 두고 독립을 선언한 그녀에게 비지니스쇼의 도우미 연수를 맡아달라는 의뢰가 끊이질 않았다.


“처음엔 서른이 되면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었는데, 서른이면 너무 늦는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회사를 차리고 처음 10년이 성공여부를 좌우하기때문에젊었을 때 시작하지 않으면 몸이 견뎌내질 못하고, 서른부터 10년은 너무 길다고 하시길래스물 여섯에 이 회사를 세웠어요.”

 1986년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실시되면서 신입사원연수 등을 도맡아하는 교육관련 회사들이 차례차례로 문을 연다. 합계 18사의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회사는 신숙옥 씨가 경영하는‘인재육성연구소()고가샤뿐이다.


“우리회사도 신입사원연수를 해왔어요. 그런데 우연히도 제가 코리언이다 보니인권연수 의뢰가 개인적으로 들어오곤 했어요그 시절에는 인권연수가 미흡했는데, 지금은 섹슈얼 하라스먼트(성희롱)를 포함한 인권문제에 관련된 연수가 전체의 8할을 차지하는 시대가 왔습니다우리회사는 그 흐름을 잘 탄 거예요. 타사들은  흐름을 타지 못했고상품이 없으니 그대로 소멸한 것입니다.”   


재일동포 사회의 ‘여자’라는 약자

-젠더(사회적인 )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나요

“조선인 문제의 근본은‘차별입니다차별문제는, 예를 들어 HIV의 문제장애자문제아동학대문제 등 모든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규명하려 하다보면 저절로 다른 문제에도 손이 뻗게 마련이죠특히 젠더의 문제는, 재일동포 가정을 살펴보면가정내에서의 재일동포 아버지들의 난폭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아버지들은 그것이 문제임을 눈치채지 못하죠일본사회에“우리 아빠가 때려요”이렇게 도움을 청하면,“그래, 한국사람들은 어쩔 수 없군”“조센징은 역시 폭력적이군하는 화살이 날아들죠. 이것을복합차별이라고 말합니다, 더블 마이놀리티요. 여자이기 때문에, 더불어 조선인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여성문제와 동시에 조선인차별 문제, 그밖의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야하지요.”


-항상 깨어있는 의식을 위해 특별히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특별히 한 건 없어요. 그저 하나 감사하고 있는  부모님께서 적극적으로  밖으로 내보내주셨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 왜 집안일이란   나이가 들어야 잘하잖아요그러다보니 밥하고 반찬 만들고 그런 건 언니가, 대신 장보는  제가 했어요전 항상 밖에만 있었어요. 돈꾸러 가는 것도  장보러가는 것도  싸우러가는 것도  우리집은 맞벌이에다 가난해서 부모님이 애들만 돌볼 형편이 못 되었어요덕분에 자유롭게 자랐죠.‘하지말아라’‘하면 안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한번은 심야의 DJ를 해보려고 한다고 부모님께 상의를 드렸는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 “밥은 주니?”하시길래, “했더니, “그럼 다녀오렴.”하셨죠.


-요즘 재일사회의 남성들은 어때요?

“남자사회에선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쓰레기 취급을 받죠. 그러다보니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한 재일남성들은 집안에서 권위만을 세우려했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폭력처럼 부정적인 문화는  다음세대로 이어져내려갑니다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 폭력이 없다면 거짓말이고, 있지만 형태가 변형되었거나 최근에 좀 살기가 윤택해지니까 보기 힘들어진거죠.”


-재일사회의 남성들은 자신만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요?

“그들의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들을 자신들이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 남자들은 귀화한 사람더블 아이들(한일사이의 혼혈아를 그녀는‘더블이라 부른다)에게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혀온 가해자란 사실에 눈뜨지 못합니다. 마이놀리티 사회가  차별이 심각합니다왜 민족학교에선 여학생들에게만 한복을 강요하죠? 왜 남학생들은 평범한 교복을 입는 걸까요여기에 성차별이 있어요. 남자의 근대화는 용서되지만 여자에게만큼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차별에 맞서야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결국 또다른 차별을 낳는 사회로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한복을 입는 것만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인가요? 여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싶어한다구요한복을 입는 학생들만을 용감하다고 칭찬하는 사회를 만들어왔으니까요. 노예가 노예란 사실에 눈뜨기 위해선 교육이 필요합니다그런데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들이 도대체 어디서 젠더를 배우고, 어디서 여성학에 눈뜰 틈이 있을까요같은 약자가 그보다 더 약한 이를 착취하는 일을 용서해선 안됩니다.” 


다문화공생사회를 위한 발걸음원데이홈스테이

-한일교류가 오가는 사이에서 ‘재일동포 존재의 의미는?

“재일동포요? 그런  잊혀져가겠죠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삼류시민이니까요. 최근에 일본에 와서 정착하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한국의 테두리에도 일본인의 틈새에도 끼지 못한 재일동포, 뉴커머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여기 주민들과 손을 잡는 일입니다. 한국인들만 끼리끼리 모여서  감싸안는 것이 아니라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지방참정권이라든지국적과는 별도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권리를 획득해나가는 길을 밟아야합니다. 이웃사람들그들이 중국사람이건 일본사람이건 관계없이 다함께 이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자세에서 출발하지 않는 한 절대로 반듯한 다문화공생사회는 이룩할 수 없습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서로  같이’ 살아나가자.

“물론 외국인이 일본사회에서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자에다 코리언이고대학도 안나왔어요. 모든 부분에서 마이너스죠그런데 일본사회는 능력이 있으면 재일동포사회보다 훨씬 인정을 해주는 사회예요. 인정을 받기 위해선 일본사람의 몇배나 되는 노력이 필요해요그렇지만, 만일 똑같은 노력을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한다면 일생동안 빛보기 힘들거예요. 재일사회는 약자의 사회이니까요약자를 도울 수 있는 건 강자밖에 없어요. 약자와 강자가 함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다문화공생사회의 실현을 위한‘원데이 홈스테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인가요?

“외국적주민의 집에서 하룻밤 홈스테이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계에서 처음 있는 프로젝트일 거예요외국적주민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외국적주민과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차이점유의점을 찾아보고, 다양한 문화가  사회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배우자는 프로그램입니다이번에는 백명을 예정하고 있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내년에도  다음해에도 지속적으로 행사를 추진해 나가고 싶고숫자도 수만명 규모로 전개해나가고 싶어요.”


-이번에 원데이 홈스테이를 계획하신 이유는?

“우선 외국사람을 잘 모르니까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본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이시하라 발언이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게 아닐까요한편, 외국인에게는 일본에서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정치적인 의사의 반영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죠. 외국인이 정치적인 의사반영을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본사람과 손을 잡아야죠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다문화공생사회의 기본적인 사상이 되어야합니다.”


-사회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이벤트가 되겠군요.

“우린 매일 일본인들을 만나니까 색다를 것도 없고 새로운 발견도 별로 없잖아요.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이 봤을 때, 외국인의 집에 하룻밤 머무르는 일은 일평생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지요그렇다면 외국인에게는 그만큼 가치가 발생합니다. 외국인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존재예요아 이렇게 훌륭한 보석들이구나...그 사실을  사회에 알리고 싶어요알면 죽이지 않아요. 모르기 때문에 죽이는 거죠결코 외국인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그리고 함께 하는  중요성을 직접 체험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질문에 부정적인 표현 대신 긍정형으로 일관한다발음나는 대로 밖에 못써요, 가 아니라발음나는 대로 써요그리고 혼혈아가 아니라 더블그래서  그녀를 동경한다무서운 것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무것도 없다고 답한다.“미움을 사는  두려워하지 않아요그게 제 강인함의 근본이죠. 누구한테나 좋게만 보이려고  필요는 없어요.”


 고가샤 사원들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희노애락’그 모든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라 답한다. 사실 감정  하나쯤 빠져있는 사람이 한둘인가그런데 그녀는 그 모든 감정을 고루 가지고 있는 사람, 그 감정을 적절히 표현할  아는 사람이다한 사원은‘비타협평등타인을 배려해주는 마음 가진 이라 말한다결코 어떤 단물에도 침흘리는 일 없이 반듯하게 살아온 그녀다. 남녀평등에 있어서  그녀만큼 철저한 이론을 제시하는 사람을  적이 없다물론 그녀의 저서를 통해서지만


 신숙옥이 누구인가.

 이방인의 삶을 강요당했지만희망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여전히 북조선 사회에 있어서 그녀는 성분미달의 반쪽바리일 게고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그녀를 재일교포로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을 너무 몰라 팔팔대는 여자로 취급할 것이다여전히 일본사회에서 그녀는 처치곤란한 조센징일 따름이다. 또 한편으론 이런 의식이 있음을 잊어선 아니된다인권운동의 선구자, 모든 여성의 동반자, 재일동포의 마지막 희망, 다문화공생사회의 첫문을 열 이 시대의 대변자. 그런 그녀의  바탕은 무엇인가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말해준다.


 기본은 딱 하나예요반권력, 철저한 반권력인간은 권력을 잡으면 썩어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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