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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Sep 16. 2016

일인극 배우, 송부자

#김민정의인터뷰

#이 기사는 2001년 취재 기사입니다


재일 삼대의 역사를 풀어내는 여인

일인극 배우 고려박물관 관장 송부자


“아이고...아이고... 팔자야..무슨 재미보겠다고 이 나라 왔노.”

 흐느낌으로 무대의 막이 오른다. 신세타령을 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맑고도 투명해서,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던 객석의 나른함을 말끔히 씻어낸다. 일인극 배우 송부자의 연극 무대를 접한 건 올 겨울이 다 가는 소리를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YMCA에서 열린 2.8독립선언 기념 이벤트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연극무대가 펼쳐졌다. 재일이란 화두를 짊어지고 살아온 여인들. 일대에서 삼대에 걸치는 삶이 차곡차곡 무대 위로 쌓여갔다.


재일 1세의 어머니의 

 “고향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목천리...”

 자줏빛 치마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송부자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는 순간이다.


 “우리 부모님이 일본에 오시기 전의 일입니다. 외할아버지는 당시 마을의 지주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일본 순사들이 땅문서를 내놓지 않는다고 외할아버지를 잡아갔어요. 잡혀가면 고문을 당해 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외할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탈출했습니다. 그날 , 스무명이 넘는 일본 순사들이 우리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몸집이 크신 외할아버지는 순사 한명의 다리를 잡고 무기로 삼아 다섯명의 순사를 해치우고는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순사들은 밤새도록 마을의 가옥들을 조사했고, 심지어는 김치독까지 열어보았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는 할머니 치마 속에 숨어계셨던 거예요. 해인사 지하에서 3년을 사시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을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시다가 어머니가 결혼을 하고 1928년 가족 모두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이란 말만 들어도 울분을 토하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렇지만 욕심이 많던 아버지는일본에 가서 한 밑천 장만해야지”하며 재촉하셨다.


 “일본에 왔을  어머니가 18세, 아버지가 28세. 아버지는 40여명의 노동자를 이끄는 공사장의 책임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꾼들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일본을 여기저기 떠돌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 일곱 형제는 태어난 곳이 다 달라요. 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나라현 가시하라시에서 안정을 찾았을 때입니다. 조선사람 집이    되었고, 약간 높은 산이 있는 농촌이어서 우리 형제들은 자연과 더불어 명랑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부잣집 외동딸로 곱게만 사시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어린 자식들을 돌보셔야만 했다. 자살하려고 약을 타기도 했지만 어린 자식들의 잠든 모습을 보고  그릇을 밭에 내던지고 오시기도 하셨다 한다.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 어머니와 함께 넝마주이를 다녔어요. 여름엔 아침 7시반에 나가서 9시에나 들어오고 그랬어요. 비가 오는 날은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지 못해서 철없는 동생과 저는 좋아라했습니다. 이불 속에서 조선 노래를 배웠어요. 어머니는 우리 본적을 가르쳐 주셨고, 애국가도 가르쳐주셨어요.”


 어린 토미꼬는 노래를 대단히 좋아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 친구들 앞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토미꼬가 노래보다  좋아했던  어머니, 키가 크고 날씬한 체격에 길고 검은 머리를 위로 올린 어머니의 모습을 사랑했다. 은빛을  하이얀 한복을 입은 어머니만큼 아름다운  없었다.


재일 2세인 그녀의 

 “제가 어머니의 치마 저고리를 둘둘 말아 이불 속으로 감추고 고무신을 마루 밑에 던지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습니다.”


 ‘조센징의 손가락질은 어린 토미꼬에게도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마늘 냄새가 난다”며 코를 움켜쥐고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토미꼬 도시락 꽁보리밥에 김치”노래를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창피해서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없었다. 화장실에 가두고 때리고 가방을 강물에 내던지기도 하고..조선인으로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쌓여갈 뿐이었다.


 “그   꿈은 자살을 하는 거였어요.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때리고, 그래서 학교에 안가면 학교 안간다고 어머니가 때리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철로에 누워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철도가 진동을 한다. 멀리서 기차가 오고 있는 증거다. 토미꼬는 순간 두려움에 오도가도 못하다 얼른 철도에서 멀어진다. 강물에도 들어갔지만, 마을 아주머니들이 구해주셨다.


 “토미꼬야, 조선사람이 조선말을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조선말은 조선사람의 혼이야, 마음이야. 토미꼬야,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란다. 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살고 있는데 뭐가 부끄러워.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창피한기라.”

 일본 사람 아버지, 부잣집 딸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던 토미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돌림을 당한 저는 학교에서 항상 멍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곱셈, 나눗셈도   없었고, 한자도 읽지 못했어요. 열 다섯부터 스물까지 직장을 스물   바꿨습니다. “난 일본 사람이야”하고 거짓말을 했지만 용케도 소문이 났고, 그러면 직장에서 무시를 당했습니다. 옥상에 올라가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들을 부르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왜 나는 조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일까? 허무의 십대를 보냈다고 송부자님은 말씀하신다. 어떻게 살까의  대신 어떻게 죽을까가  시절의 명제였다. 가난하고 잔소리 많은 어머니로부터 탈출을 위해 그녀는 가와사끼에 살던 언니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장장 여섯시간 동안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를 반복하던 남자는 결혼하고 두주일이 지났을  그녀에게 손을 올렸다. 스무살 나이의 여인은 왜 남편이 자신을 때리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고, 술만 마시면 손을 올리는 남편에 대한 마음은 멀어만  뿐이었다.


그녀의 삶에 포개진 재일 3세 딸들의 

 결혼생활은 끔찍했지만, 네 아이들은 그녀의 보물이었다.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고통을 아이들의 세대에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어릴적부터 아이들에게한국인’이란 사실을 가르쳐왔다. 한국인으로 자신감을 가지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들에게도 재일이란 화두는 어두운 그늘을 떨구었다.


어느날 유치원에서 색종이가 없어졌는데, 아이들은 그녀의 딸아이를 손가락질하며“가난한 한국에서  네가 가져간  틀림없다고 몰아부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장녀는 일주일만에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유치원 때 친구였던 사내아이가 “너 한국인이지? 그럼, 한국말   써봐. 한국말도  ? 이상한 한국인이군.”하면서 바보 취급을 했다. 급기야 손뼉을 치며한국인 돌아 , 꺼져!” 연발했고, 처음엔 혼자였던 게 하나 둘, 열로 늘어, 나중에는 학급 전원이 한국으로 꺼지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아이들의 아픔을 보다 못해 그녀는 육성회에 나갔다.


“육성회장이 재일교포였는데 일본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육성회장은 한국사람이라서 무뚜뚝하고 뿌리가 없다고. 그런데 토미꼬씨는 고상하고 예뻐서 한국사람처럼 안 보이네요. 기모노   입어봐요. 잘 어울릴텐데...기모노를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학교에 가면, 일본 학부형들이 일본사람보다 더 일본사람 같다고 다들 칭찬을 해주었어요”   


 여러번 칭찬을 받다보니 일본사람처럼 살아보자는 마음이 솟아올랐다.‘그래, 일본이라는 외국에서 살려면 어서 일본국적을 취득해서 일본인보다  일본인답게 살아야지.’교육방침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촌스러우니까 오늘부터 파파, 마마라고 불러. 부잣집 애들은  그러잖니?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애들하고만 놀아라.”   


 한편으로는 민단의 역사 공부에도 참여했고, 치마 저고리를 입고 젊은 부인회의 부회장일도 맡아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시아버지와 남편 뒷바라지, 일꾼들 식사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따돌림과 폭력을 당하고 돌아오는 아이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고려박물관 개관까지의 

 변화의 바람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아이가 다니던 기독교 계열의 유치원에 찾아갔을 때 학부형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인하 목사는 입을 열였다.“우리 유치원에선 본명을 사용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에서 일본 부모님들도 이해해주십시오.”


 “진짜 이름을 쓴다구? 전기에 감전된 느낌이었어요. 어릴 때는 히로타 토미꼬, 외국인등록증에는 소우 토미꼬, 결혼하고는 이와이 토미꼬. 개나 고양이도 이름이 하나 뿐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자신의 한글이름도 모르던 그녀에게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모노와 보석을 팔아 역사책을 마련했다. 뿌리를 알려면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서 공부에도 몰입했다.


기모노와 보석을 판 일을 알고 남편이 때리는데, 죽을  같아서 도망을 갔어요. 숨어있다가 다시 들어갔죠. 집안일, 13명의 식사차리기   할테니까 밤에 공부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다시 때리면 이혼을 하겠다는 말도 했지요.”


 분별의 눈을 얻은 그녀는 가능하면 결혼을 인생의 호전으로 이끌어가고 싶어 결혼해서 처음 남편과 속내를 이야기했고, 남편도 그런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서른 한살 이후로 생의 의미를 찾은 여인은 더욱 바쁜 발걸음으로 삶의 길을 걷는다. 재일동포의 취직 차별문제, 신용카드회사의 차별문제  시민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도맡아 해왔다. 매일 밤 재일동포의 집을 찾아가 함께 뭉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러던  그녀가  작문이 기독교복음 신문에 실린  여기저기서 강연의뢰가 들어왔다. 20여년 강연회장에 서다가 일인극 무대에 선 건 약 10년  쯤의 일이다.


 “일인극은 연기를 하는 즐거움이 대단히   무대에서 내려오면 왠지 허전해지더군요. 제 자신의 역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확실한  남기고 싶었어요.”

 때마침 신문  면에 한일의 교류사를 다루는 박물관을 만들자는 기사가 실렸고, 그 기사를 읽은 시민들이 모여 박물관 개관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자신의 일인극 무대를 고려박물관 건립을 위한 밑바탕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작년 가을, 시민의 힘으로 한일의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의미를 담은 고려박물관이 그 문을 활짝 열었다.



 송부자의 인생을 거짓없이 보여주는 일인극.“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우리 한국 어머니들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힘겨운 삶을 살아오면서도 강인함과 더불어 지조와 기품을 간직해온 여인네들.“우리의 어머니들은 강인하기도 했지만, 품위가 있었어요. 수많은 고달픈 역경을 겪어오면서도 잃지 않았던 그 지조있는 모습을 전 무대위에서 표현하고 싶습니다.”무대를 보는 관객은 물론, 무대 위에  그녀 자신도 때로 눈물을 보인다. 어머니의 삶과 자신의 삶과 자식들의 삶의 애환을 풀어낸다.



 ‘사랑할  기적은 일어난다그녀의 일인극의 타이틀이다. 처음 교회에 나가 자신을 사랑하란 말을 들었을 때의  막막한 놀라움. 역사를 배운 것과 사랑을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삶의 궤도를 바꾸어놓았다 자신한다. 삶에 냉담한 젊은이들이 참으로 많다. 공생의 사회는 눈앞에 다가왔는데 다가가는 법도 받아들이는 법도 모를 뿐더러,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나는 우리 재일동포 어린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어요. 지금의 교과서로는 재일의 어린이들도 일본의 어린이들도 자신감을 갖을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재일의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일본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차별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기하고 말지요. 저는 이와이 토미꼬라는 제 이름이 일제시대의 노예의 이름임을 알지못했어요. 노예가 자신이 노예란 사실을 알았다면 거기서 벗어나야 하지요. 선과 악을 알았으면 선하게 살아야할 것이고, 사랑과 증오를 안다면 사랑의 길을 걸어야지요. 인간의 기본은 역사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누누히 이야기 한다. 한국의 뿌리를 가진 자신이 왜 일본에서 태어났는가 그 역사를 알았을 때 차별의 근원을 이해할  있었던 그녀의 말투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했다. 고려박물관은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고 함께 나누는 장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재일동포만이 아니라 일본인, 뉴커머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으로 앞으로도 굳건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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