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인터뷰
#이 기사는 2002년에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작가 강신자
1961년 요꼬하마시 출생.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덴츠 EYE에서 카피라이터, 플래너로 재직 중 1986년에‘아주 평범한 재일한국인’으로 논픽션 아사히 저널상 수상. 그 후 집필활동으로 전직, 월경(越境), 디아스포라를 키워드로 저작활동을 계속해왔다.
저서에‘한일음악노트’‘기향노트’‘추방의 고려사람’‘안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문화’등이 있다.
봄날의 쌀쌀함이 남아돌던 오후,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난 그녀가‘고려사람 100년의 기억 프로젝트 사진전’의 어시스턴트쯤 되는 줄 알았다. 까만 바지 정장 차림에 하얀 티셔츠를 받쳐입은 그녀는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하나로 살짝 묵고 있었는데 대학생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사진전 토크쇼장에서‘강신자’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을 때 그 앳된 모습이 그녀 안에 내재한 아름다움에서 비롯하는 독특한 센스에 의한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세울 따름이었다.
강신자는 동대법대를 졸업하고 유명 광고회사에 취직하여 카피 라이터로 활동하던 중 1986년‘아주 평범한 재일한국인’으로 논픽션 아사히 저널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 살아가는 입장에서 폭넓은 집필활동을 펼치고있으며, 텔레비전, 라디오 등에서도 활약하고 있고, 현재 구마모토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강신자씨는 재일3세이신데 조부모님의 고향은 어디시며,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일본에 오시게 되셨나요?
조부는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 경상남도 진천에서 진천출신이신 조모를 만났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조부는 부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일하고 있다가, 1931년 먼저 단신으로 일본에 와서 가와사끼에 근거를 두고 어느정도의 기반을 쌓은후, 이듬해 조모와 아버지를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에 온 이유? 확실한 것은 들은 적이 없지만 당시 조선반도를 떠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조금이라도 좋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강신자씨께서는 자신이 재일교포란 사실을 언제 알았으며 처음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전 어느날 갑자기 제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안 게 아니라 성장하면서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알게되었어요. 결정적으로 외국인이라고 느꼈던 것은 14살 때 구약소에 가서 지문을 찍고 외국인등록증을 받았을 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어린아이란 게 왜 좀 다르면 자기 자신이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지곤 하잖아요. 저도 외국인이란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가슴 두근거리기도 했지요. 반면에 재일한국인은 일본회사에 취직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손윗분들로부터 매일같이 듣고 자란 탓에 재일한국인이란 사실이 한편으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감각도 몸에 배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났는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인가요? 강신자씨 속에 한국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을 결코 아니예요. 반대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때 먼저 그 속에 자신의 터를 발견하지 못하는‘한국’이라는‘국가’나‘민족’의 형성과정, ‘일본’과‘국가’나‘민족’의 형성과정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내 관심은 근대 이래, 인간과 국가나 민족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또는 어떻게 해서 관계를 끊어왔는가 하는 점을 내 나름대로 명확하게 해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나’라는 어디에도 뿌리를 가지지 않는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서 초월해야 하는 대상을 명확히하기 위한 작업인 것입니다.
◯재일동포에 대한 명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일동포, 재일교포, 재일코리언,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등. 강신자씨는 어떤 호칭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저는 ‘식민지 시대에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온 조부모를 가진 일본에서 한국국적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온 인간’입니다. 재일교포, 재일동포,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코리언. 간략한 단어들도 얼마든지 있긴 하지만 어느 하나도 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없어요.‘재일’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어떠한 호칭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개인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버리고, 그 개인에게 상표를 붙여서 그 사람에 대한 상상력을 정지시켜버리는 효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다면, 강신자씨는 자신을 일본인, 한국인 어느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쪽도 아닙니다. 일본국민으로서의 일본인도, 한국국민으로서의 한국인도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한국의 국민이긴 하지만. 피-언어-문화-기억(역사)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민족공동체 및 국민이란 틀 속에 나는 들어갈 장소가 없습니다.
강신자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고 단호히 부정했다. 그 틈새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틈새에 위치하게한 한국과 일본을 보다 깊이있게 바라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한일에만 연연해하지 않고 보다 더 커다란 세상 안에 존재하는 틈, 그 틈에 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발길을 고려사람이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고려사람 100년의 기억
고려사람, 조선반도에 뿌리를 가지고 구소련에서 살아온 40여만명의 사람들. 19세기 중반부터 기근에서 헤어나기 위해, 또 일본식민치하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으로부터 러시아의 극동지방으로 흘러간 사람들과 그 후예들을‘고려사람’이라 부른다. 그들의 삶은 안주(安住)가 아닌 이주(移住)의 삶이었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희망 하나 안고 들어간 그들은, 전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한다. 스탈린은 고려사람들이 일본인과 얼굴이 비슷해서 스파이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중앙아시아로 추방해버린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다녀오셨는데 거기 사는 고려사람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풍요로운 생활입니까?
무엇을 풍요라고 해석해야 될까요? 경제적으로는 일본, 한국과 비교하면 풍요롭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그들은 풍요롭습니다. 다민족사회 속에서 살아왔고 여러가지가 혼합된 문화를 살아가고 있습니다.‘혈통’과‘땅’의 주술이 느슨하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안주의 땅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기에 앞으로의 그들이 살아가기 위한 풍요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나요?
내가 중앙아시아를 탐방하여 체재한 약 2주간 정도의 기간에는 피부로 차별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다민족사회니까 민족간의 마찰이나 갈등은 당연히 있습니다. 고려사람은 소련시민으로 러시아어, 러시아문화 속에서 자라 성공을 손에 넣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어 새로운 공용어가 탄생하고 문화의 배경이 바뀌면 거기에 바로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고려사람의 현재의 약점이예요. 그렇지만, 고려사람은 소련시대에 열심히 공부하여 나름대로의 지위를 쌓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나름대로 경의를 표해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사람은 조선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채 러시아의 문화 밑에서 자라왔다고 되어있는데, 그들은 자기자신을 어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고려사람은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시민, 현재는 그 나름대로의 주거지가 있는 국가의 국민입니다. 그러므로 사진가 안 윅토르도 국적상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인입니다. 또 소련의 교육을 받아 자라온 세대는 문화적으로는 러시아문화의 인간이라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강신자가 고려사람의 기억을 찾아나선 것은 한 곡의 노래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어느 고교 교사의 손에서 탄생한‘천연의 미’란 노래는 일제시절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 지금도 수많은 한국인이 이 곡을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라고 알고 있을 정도다. 고려사람들의 기억에서도‘천연의 미’는 잊혀지지 않는 노래다. ‘고국산천’이란 제목으로 바뀌어 불리는 천연의 미는 고려사람 100년의 희노애락을 함께 해왔다.
천연의 미에서 발생한 인연은 안 윅토르라는 사진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고려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해온 안 윅토르. 고려사람만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온 안 윅토르는‘과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천연의 미’에서‘고국산천’에의 기억, 안 빅토르씨의 사진에 있어서의 기억, 강신자씨가 중앙아시아의 여행에서 찾은 이러한 기억에 있어서 미래란 무엇입니까? 모든 기억은 미래와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기억은 희망입니다.‘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이야기되어온 이 세계의 커다란 이야기의 근경에 놓여진‘디아스포라’의 기억 속에 자리한‘민족’‘국가’를 초월하는 시선과 자세. 그것을‘희망’이라고 나는 부르고 있습니다.
강신자가 말하는 국가, 민족, 그리고 개인
◯강신자씨는 자신의 기억, 노래의 기억, 고려사람의 기억을 쫓아왔습니다. 그 속에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기억입니까? 아니면 민족의 기억입니까? 기억 속에서 수용해야할 근본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쪽이냐 하면 개인의 기억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틀로부터 삐져나오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뛰쳐나오거나, 그에 연연하면서도 하루하루를 살아온‘인간의 기억’. 그 기억을 나중에 모아서 다시 민족이라는 틀 속에서 정리하여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꾸미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러한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거나 국가를 생각하는 것은 민족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이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에 연결되기 쉽고 또 이용되기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향을 생각하다. 그것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커다란 틀이나 추상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같은 토지에서 함께 살아온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에의 향수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있어서 태어나 살아온 요꼬하마는 아주 소중한 장소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장소,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그리움을 국가에의 사랑, 민족에의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구조로서의‘민족주의’‘내셔널리즘’을 우리들은 충분히 의식하고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으로‘민족주의’‘내셔널리즘’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거기에 인간이 무비판적, 무사고적인 상태로 빠져들었을 때가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민족주의’‘내셔널리즘’에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할‘민족’이나‘국가’의 형태를 모색하는데 있어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할까요? 민족 국가라는 개념을 개인의 존개가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이 지금 알고 있는‘민족’‘국가’는 자연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공물인데, 인간은 자칫 운명적으로 거기에 속해있다고 느끼곤 하지요.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사상이나 상상력이 국가와 민족에 얼마나 얽매어있는지 알았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강신자와의 인터뷰를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내게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어투는 단호했고, 그녀의 이야기에는 깊이가 있었다.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기는데 주력해보았다.
한국과 일본의 틈새에 살아오던 그녀가 처음 의문을 느낀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아니었을까? 나는 누구인가, 내 터는 어디인가? 이제 그녀의 질문은‘재일3세’에 대한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고려사람이란 누구인가로 의문은 뻗쳐나갔고, 모든 모호한 틈새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주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나가고 있다.
“요즘은 일본의 남쪽 끝 오끼나와의 야에야마 제도에서‘일본인’이 되는 것을 강요당하거나‘일본인’인 것을 부정받아온 사람들, 즉‘일본인’의 경계선상에서 떠돌며 살아온 사람들의 소리, 노래,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자신의 지금까지의 궤적을 비추어보며, 앞으로의 자신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일3세로 살아온 강신자에게는 적어도 네 개의 이름이 있다. 우선 일본 이름인 다케다 노부꼬, 그리고 본명인 강신자. 강신자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쿄 노부꼬, 끝으로 결혼한 남편성에 따라 가끔 이마무라로도 불리워지곤 한다. 강신자는 말한다. 이 모든 이름이 바로 자신이라고. 어느 하나도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다.
도쿄대학 졸업, 덴츠 입사, 논픽션상 수상. 화려한 프로필을 보고 그녀에게 묻는다. 자신의 길이 순탄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문다.“글쎄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건 결국 결과뿐이지요. 무대 뒷면의 고달픔을 보여줄 수 있다면 단박에 설명이 가능할 텐데. 저에게 있어서 기억을 좇는 일은어떤‘사명’같은 거예요. 시작하면 끝을 보는 거구요.”
인간내면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공존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강신자 자신 또한 그러하다 한다.“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그를 위해‘나 여기 있어요’하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치곤 하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아주 연약하고 고독한 존재입니다. 한편으론 군중속에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가운데 불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가볍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강인하다고 하기보다 딱딱하고 곤란한 존재가 저인지도 모릅니다.”
‘고향은 미래에 있다.’ 는 말로 강신자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추억 속에 고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고향은 작가가 작품을 쓰기 시작한 그곳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고향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 이루어낸 그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강신자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