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마 산장 사건과 컵라면(1972)

일본현대사 #1 혁명을 위해 폭력의 칼자루를 거머쥔 청년들

by 김민정

혁명을 위해 폭력의 칼자루를 거머쥔 청년들

아사마산장 사건


일본인들은 얌전하다. 일본인들은 데모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게 정말일까? 일본에서도 피터지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미일안보 조약 반대 시위를 했고, 불평등조약이란 이유로 한일국교정상화 협상에도 반대했으며, 베트남 전쟁에도 역시나 반대의견을 내세웠고, 미국에 의존한 사회체제를 바꾸자며 온몸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검거되고, 체포되고, 발길질 당하며 점점 세력을 잃어가게 되었고, 그리되자 더욱 과격해져서, 테러를 일으키고,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결국 산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당시 젊은이들이 일으킨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학생시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아사마 산장 사건은 세상을 바꾸려던 젊은이들이, 정부와의 싸움에서 지고, 도망가던 중, 동료를 자기들 손으로 죽인 잔인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은, 동료를 살해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고, 쉽게 시위에 참여할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서 '시위' '데모'는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아니라, 사회에 누를 끼치는 존재로 떨어져버렸다.


<1968년 혁명의 불빛>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 세상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변혁의 시기였다. 비틀즈 해산(1970), 지미 헨드릭스 사망(1970), 프랑스 5월 혁명(1968), 김대중 납치 사건(1973), 요도호 평양행 사건(1970)…미니스커트, 장발, 청바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춘의 뒷면에는 시대적 아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 끊임없이 행해지는 약자에의 차별과 무시된 인권, 전쟁과 핍박세계 각지에서 학생운동이 발발했다. 1968년, 미국에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이탈리아에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바꾸어보겠다고 일어선 젊은이들이 헬멧을 쓰고, 학교를 점거하고, 체제와의 심한 몸싸움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대투쟁, 일본대투쟁으로 시작된 운동은 대학환경의 개선, 산학협동체제부정, 대학관리에의 학생참여를 비롯하여 반미주의운동, 계급해방운동, 사회주의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일본 전국에서 잇달은 학생 운동을 저지하려는 일본 정부는 경찰을 투입하고, 곳곳에서 학생들이 체포당하자, 학생측은 이에 반격을 강화한다. 반격에 따라 정부의 탄압은 점점 심해지고, 이에 대항한 학생들 역시 심한 폭력으로 맞서는 끝없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운동은 외부적으론 경찰과의 싸움으로 멤버를 잃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학교파, 당파로 나뉘어 폭력을 사용한 세력다툼이 끊이질 않게 되면서, 사회적인 신뢰도 잃게 된다. 또한 경찰서장 자택 폭발물 사건(경찰서장의 아내가 사망), 신주쿠 크리스마스트리 폭발 사건(경찰 1 사망, 통행인 11명 중경상) 등과 같은 본격적인 테러까지 일으키게 되면서 일반 시민 지지자를 잃게되는 결과를 낳았다.


68년에 타오른 혁명의 불빛은 일본에선 혁명의 과격화로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하고, 7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한 파벌인 연합적군파는 지명수배자의 신분에 지지자마저 잃어 자금부족, 인원부족을 겪는 학생운동 멤버들은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산으로 숨게 된다. 도중에 우체국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고, 경찰서와 무기점을 습격하여 무기까지 소지한다.


그리하여, 1972년 2 19, 동상에 신음하며 지친 발걸음을 옮긴 연합적군파 5명이 아사마산장에 숨어들었다. 눈과 얼음에 뒤덮인 가루이자와 지역은 하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홀로 산장에 남아 있던 여주인을 인질로 사로잡은 젊은이들은 체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임한다.


아사마산장 투쟁은 열흘에 걸쳐 진행되었다. 사건 당시 경찰측 약 30000명이 동원, 경찰측과 운동가들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경찰측 3명(민간인 한명 포함)이 사망, 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열흘간 경찰측은 인질 구출을 최고 목표로 삼고, 범인들과 신경전을 싸워 이기기 위해 밤새 산장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 범인들의 수면 시간을 빼앗았다. 2월 28일 아침 8시부터 산장 공격을 시작하여 오후 6 17 인질을 구조하고, 범인을 체포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세상을 바꿀 있으리라 자신하던 젊은이들의 묘지>


그런데, 아사마산장 사건의 본질은 간신히 운동의 목숨을 연명해온 이들의 단순한 인질극이 아니었다. 아사마산장을 찾을 밖에 없었던 궁지에 몰린 운동가들의 행적에는 무서운 진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동료 14명을 구타, 살해했다

산속 행군은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는 학생도 있다. 도망을 사람은 처형을 받는다. 총괄과 자기비판. 총괄이란 사상으로 완전무장을 하는 것으로 아픔도 배고픔도 느끼지 않는 경지에 달하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혁명투사’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들은 동료를 구타, 기절시키고, 기절에서 깨어났을 때 새로운 인간, 즉 혁명투사로 태어날 있다는 논리를 신봉했다.

처음엔 산에서 도망치려다 잡힌 동료를 구타하였는데, 나중에는문을 힐끔거렸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을 상상했다고 하여 구타, 기둥에 결박시켰다. 여자 동료가 화장을 했다는 이유로, 남녀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단체의 어머니의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산에서 내려갔을 점심을 사먹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고 결박된 동료들은 하나 죽음으로 향한다. 구타를 자행한 동료들은 그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한 것은 혁명투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우리한테 맞아서 죽은 결코 아니야.’

그리하여 14명의 젊은이들이 체제와 싸워보지도 못한 목숨을 다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자신하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동료의 손에 의해 무참히 피흘리며 죽어갔던 것이다.

연합적군 멤버들은 아사마산장에서 체포, 산악캠프부근ㆍ도시에서 체포, 자수하여 대검거되었다. 동료들의 총괄을 지도한 연합적군의 최고 간부 모리 츠네오(森恒夫) 이듬해인 1973년 1월 1일 자살, 간부 나가타 요코(永田洋子), 사카구치 히로시(坂口弘:아사마산장에서의 총격전 지휘)는 재판을 거쳐 1993 사형선고를 받았다.


<컵라면과 미디어의 시대로>

아사마 산장 사건의 여파는 한 세대의 죽음을 뜻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체제와 싸우려던 젊은이들은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일본 현대사에서 오래도록 사라진 존재로 자리한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이전까지 일본의 젊은이들은 결코 체제와 싸우려하지 않았다. 대학 교내 식당의 밥값이 올라도, 조용히 오른 밥값을 내며 "사정이 있었겠지."라고 순응했고, 자민당 정권이 내내 계속되어도 자민당에게 맡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젊은이들은 살아온 것이다. 311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탈원전 시위가 시작되면서 드디어, 일본의 젊은층이 '시위'를 하러, 사회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여하튼,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인해, 오래도록 일본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시위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두어 두었으며, 덕분에 자민당은 장기집권을 할 수가 있었다.

아사마 산장 사건은 생방송으로 방영이 되었고, 당시 밤을 새던 경찰관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도 자연스레 전파를 탔다. 아사마 산장 사건의 숨은 주인공은 '컵라면'이다. 젊은이들의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은 사라지고, 물 붓고 3분이면 완성되는 간편식인 컵라면이 전세상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티비로 방영된 컵라면의 영상'. 미디어 시대의 완벽한 도래를 뜻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주목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40년이 훌쩍 지났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방에서 뛰쳐나와 탈원전을 외치고, 안보법안 반대 시위를 외쳤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민당이 장기 집권을 하고 있고, 막대한 세금을 쓰는 도쿄 올림픽을 치룰 예정이며, 안보법안은 물론이고 집단적 자위권 용인까지, 40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회가 현재진행형으로 돌아가고 있다.

44년 전, 과연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연 무엇이 그토록 생명보다 소중한 이상이었을까?

생명의 소중함이 결여된 혁명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사마산장까지의 그들의 발길은 자신들이 목숨을 빼앗은 동료들의 망령으로부터의 도피였는지도…….

여전히 세상엔 아파하는 이들이 있고, 여전히 가난한 이들이 있고,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동료 14명을 죽음으로 몰아 낸 학생들이 마지막에 다다른 , 그곳은 아사마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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