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현대사 #4 오키나와, 미국과 일본의 경계
오끼나와 반환(1972년 5월 15일)
1995년 가을 오키나와는 소란스러웠다. 세명의 미군에 의해 초등학생 소녀가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어린 소녀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는 ‘미일안보조약’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주장하며 기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여행사 포스터에서만 보아왔던 오키나와는 에머랄드빛 바다와 맛난 돼지고기 요리, 쨍쨍한 태양과 그 태양빛을 받고 자라난 열대과일이 싱싱한, 이국적인 분위기의 리조트지였다. 그 찬란한 아름다움의 뒷면에 미군기지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그 때 어렴풋이 알았다.
<‘류큐왕국’에서‘오키나와’까지>
현재 오키나와는 일본의 47도도후켄(都道府縣)에 속해있다. 인구는 약 1334천명으로 일본전체인구의 약 1%, 면적은 2271만㎢로 일본전체의 약 0.6%에 불과하다.
옛날의 오키나와 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약 2만년전 동남 아시아, 중국 남부 등의 육로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오키나와에서 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일본 열도로 부상하여 조몬인(繩文人)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인간의 전래는 빨랐으나, 국가 건설이 더디었던 오키나와에서는 14세기에야 겨우 국가가 발흥하였고, 15세기초 류큐(琉球)왕국이 통일을 하면서 본격적인 국가가 건설되었다. 류큐왕국은 16세기까지 국제무역으로 번성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중국과 일본의 굴레에 얽매이기 시작하였다.
중국과 조공, 책봉관계를 맺어 이후 450여년에 걸쳐 중국 책봉사가 류쿠에 머물렀다. 또한 1609년 일본의 사츠마번(薩摩藩)은 류큐에 침입하여 속국으로 만들고, 300년 동안 류큐에 머무르게 된다. 사츠마번은 류큐에서 생산되는 흑설탕을 싼 가격에 사들이고, 일본 본토에서 생산되는 생활필수품을 비싼 가격으로 류큐에 팔아 이득을 보았다.
일본 정부는 쇄국정책의 방패로 오끼나와를 이용하여, 구미열강의 진출이 오끼나와까지만 미치도록 하는 방침으로 열강과 무역을 행하여 왔고, 류큐의 처리를 고심해 오던 중 일본으로 통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류큐의 일본통합은 타이완 원주민들이 류큐의 어부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비롯한다.
1871년 류큐 미야꼬지마(宮古島)의 어부들이 태풍의 영향으로 타이완 원주민족 주거지에서 도착하였는데 여기서 54명의 어부가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계 주민의 도움으로 이듬해 류큐로 돌아왔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국 속민인 류큐인을 살해한 타이완 원주민족의 징벌을 청에게 요구하였으나 묵살당하자 군대를 이끌고 원주민족 공격에 나섰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일본의 징벌행위를 인정하였다는 것은 즉 ‘류큐가 일본땅’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쳐 1879년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조치로 류큐왕국은 폐지되고 일본의 오끼나와현으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미군정과 오끼나와 반환>
일본 땅이 된 오끼나와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손에 들어간다.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전투지는 다름아닌 오끼나와였다. 1945년 3월 23일 오끼나와에 미군 비행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어 이후 90일간 오끼나와는 태평양 전쟁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이 세달 동안 20여만명의 인명이 손실되었는데, 전사자 중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았으며, 일본 군국주의의 세뇌와 선동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적군의 포로가 되면 여자는 욕을 보이고, 남자는 갈갈이 찢겨 죽는다고 교육받은 민중들은 동굴 속에서 집단자살을 행하였다.
미군이 오끼나와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의 일본본토 상륙을 저지할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사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하에 오끼나와의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어갔다.
미국은 일본본토에서 육박전을 벌이는 대신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폭을 투하하여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전후 초기 미소대립이 강화될 것을 예상했던 미국은 일본을 자신들의 우호국으로 만들어야했다. 또한 오키나와를 일본으로부터 분리시켜 미군의 군사적 요새를 두고자 하였다. 오키나와를 희생시킨 일본은 대신 한국전쟁특수를 누리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에서‘조선특수’‘조선붐’으로 불리우며 경제대국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오키나와에서는‘엔’ 대신‘달러’가 통용되고 있었고, 미군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이 낳은 혼혈아가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오키나와에 들어가려면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오키나와를 나오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미군정에 항의, 반대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오키나와에 고립된 상태로 생활해야 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에서 힘입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정 반대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간다. 미군정의 통치에서 벗어나 일본본토와 똑같이 독립된 대우를 받고자 오키나와 일본복귀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70년대 초반 비단 오키나와 뿐 아니라 일본본토에도 퍼졌고, 닉슨 대통령과 사또 수상의 수뇌회담에 의해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반환된다.
<진정한 평화에의 외침>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된 이후에도 미군 기지는 여전히 오키나와에 위치한다. 일본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 이 땅에 미군기지의 70%가 자리하고 있다. 이 기지로부터 한국으로, 베트남으로, 군대는 파병되었다. 오키나와는 미국이 관련된 모든 전쟁의 발진기지가 되어왔고, 앞으로도 전쟁의 요새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오키나와는 미군이 주둔한다는 직접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의 요새’라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어온 오키나와는 언제나 약자였다. 약자로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평화’을 염원한다.‘전쟁이 없는 세상’을 사람들은‘이상’일 뿐이라 한다. 그렇다면 현실은 무엇인가? 오키나와의 평화운동가 아와곤 쇼코(阿波根昌鴻)씨의 말을 빌린다.“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인물들은 포성도 들리지 않는 별장에서 돈계산을 하고 있다.”이것이 전쟁의 실체다.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어두운 현실을 안고 있는 오키나와는 그 존재 자체가 평화에의 외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