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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Oct 03. 2016

전설 속 영웅, 역도산의 죽음(1963)

일본현대사 #7

전설  영웅 역도산의 죽음(1963년 12월 15)


프로 레슬러 역도산(39세),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다이. 1963년 12월 8  도쿄 아카사카 캬바레에서 발을 밟았다”“밟지 않았다의 다툼으로 인해 대일본흥업사원 무라타 카츠시(村田勝志/25)에게 복부를 찔려 부상을 입어 아카사카 산노병원에 입원했으나 15일 오후 9시 50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아사히 신문 1963년 12 16 


 일본에서 활약하는 유명인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피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요즘 유명세를 타는 어느 연예인이, 요즘 부쩍 텔리비전 출연이 잦은 어느 정치가가 본래는 한국인이라는 설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설이 수두룩한 것만 봐도 아직 일본이 개방된 사회가 아님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남들과 다른 것이라면 우선은 감추어 두어야 득이 된다고 해야할까?


 유명인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에 가끔 귀가 솔깃하기도 하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애쓰고 싶다. 왜 그들이 일본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또한 너무 궁금해하고 싶지 않다그래도 가끔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 무척이나 반갑다.


 역도산. 60년대 초 일본에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 1924년 농부 김석태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일제치하에서 함경도와 만주 간도를 떠돌며 생활하던 중 14살  씨름대회에 나가 우승을 거두어  용력을 자랑한다. 1939년 16세의 김신락을 씨름 대회에서 처음 본 일본 스모계의 거물 타마노우미 우메키치는 김신락을 일본의 스모계에 등단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김신락은일본 사람이 되기 싫다. 고향에서 살겠다고 항거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김신락은 일본행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기까지 하였으나 타마노우미의 강제적인 결정으로 1940년 일본행에 몸을 실었고시쇼노세끼의 한 스모 선수 양육소에서 스모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쇼와시대 일본의 영웅역도산>

 일본에 도착한 김신락에게 제일 처음으로 주어진 것은 위조된 호적등본이었다.

 본명=모모타 코지(百田光浩)

 생년월일=타이쇼 13년 11월 14

 본적=나가사키현 오오무라

 호주=모모타기지요시(百田巳之吉)

 뿐만 아니라 김신락의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까지 완벽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김신락은 모모타 코지가 되었고스모 선수로는 리키도잔(역도산)이란 이름으로 등단하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이는 역도산의 좌우명이었다그는 스모에서 이기기 위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나 밖에 없는 씨름판을 사용할  있는 사람은 선배선수들이었지만 역도산은 선배선수들에게 자기도 끼워달라고 끈질기에 설득하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선배선수들에게 내동댕이 쳐지면서도 연습에 힘을 기울였다. 


 역도산은 1940년 처음으로 스모 대회에 출전하여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인기를 손에 쥐고 승진을 해나갔다. 1949년 세키와케에 등극하여 출세의 길을 걸었으나 내장 디스토마에 걸려 잇달은 패배를 계속하였다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스모대회에 출전하였고, 그해 10 10 5패라는 기록을 남기었다병마와 싸워이겨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역도산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나 1950년 9 새벽 그는 자신의 집에서 홀로 단발식을 거행하였다스모계에서 빠른 성공을 쥐었으나 더이상의 등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에 지나지 않았다이 홀로 만의 단발식은 스모계의 묵은 인습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었던 것이다.


 스모계를 떠난 역도산은 공사장의 간부로 전전하던  프로레슬링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52년 하와이로 떠난 그는 레슬러로서 다시 태어나 미국 등지에서 여러 선수들을 제압한다. 195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협회를 창설하고 일본의  프로레슬러로써 그는 텔리비전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다.


 전쟁의 실패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있던 일본 사회는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그 때 역도산은 까만 타이츠를 입고 가라테잽을 무기로 미국의 거대한 선수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려갔다. 텔레비전이 궁하던 시절가두 텔레비전 앞에 모인 사람들은 역도산의 모습에 열광하였고역도산의 인기에 불이 붙을수록 텔레비전 판매량도 늘어만 갔다. 역도산은 반칙을 일삼는 레슬러와는 달리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일본 사람 모두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일본 사람들은 이미‘영웅 되어버린 그를 일본인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영웅=일본인’이란 공식속에서 그의 위조된 과거는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역도산의죽음>

 미국 원정브라질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자 역도산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선수들이 일본을 찾았다스카이 하이 리, 돈 레오 조나던 등이 그에게 도전하였으나 역도산에게서 승리를 빼앗아갈 수 없었다. 역도산은 후배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박치기 왕으로 유명한 김일을 길러냈고,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끼도 그가 발굴한 선수들이다브라질 원정에서 만난 안토니오 이노끼는 상파울로 농민 시장에서 짐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브라질 스포츠 대회 포탄 던지기에서 우승을 거두어 이미 유명인이었던 그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프로레슬링 선수로 만들었다. 야구선수였던 자이언트 바바도 프로레슬링 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끼가 처음  위에  것이 1960년도의 일이었고그로부터 3년후 역도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1963년 12 7 하마마츠시 체육관에서 결투를 끝낸 역도산은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목욕을 마친  신문을 읽고 잠이 들었다역도산이 미국에 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과 점심식사를 마친 역도산은 다시 잠들었으나 1시간도 못되어 전화가 울렸다미국 선수 데스트로이야가 술을 마시고 있으니 동참하라는 전화였다. 술자리에 참석한 역도산은 라디오의 방송 출연 때문에 아카사카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던 도중 어느 조폭의 칼에 찔려 입원, 15 저녁 숨을 거둔다.    


 역도산의 죽음을 두고는 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범인의 진술에 따르면 역도산이 밟을 밟고는 안밟았다고 시치미를 떼었기 때문에 칼로 찔렀다고 하였으나, 범인과 역도산은 이전부터 얼굴을 알던 사이로 술자리에서 몇번 티격태격한 일도 있었다 한다범인은 7년형을 살았다. 또역도산의 두번째 수술이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수술  물을 마시면 안되는  목이 말라 꽃병 속의 물을 마셔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역도산을 이야기   또하나 빠뜨릴  없는 것이 조폭과의 관련성이다서민의 스포츠로 인기를 올리는 프로레슬링계의 수입을 조폭이 가로채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역도산도 있었다는 설이다역도산은 프로레슬링 뿐 아니라 리키 스포츠팔레스, 클럽 리키리키 아파트먼트 등을 경영하는 실업계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였으나 역도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조선청년사에서 만든 책 속의 그는 우표(1995년)로까지 발매된 적이 있는 북조선의 민족적 영웅이었으며일본인이 쓴 역도산은 쇼와 시대의 텔레비전 세계의 영웅이었다. 때때로 그는 전후 미국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프로레슬링으로 말끔이 씻어준 영웅이었고, 때때로 그는 술망나니였고때때로 그는 조폭이기도 하였다.


 단 하나 알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생을 멈춤없이 걸어왔다는 사실만이었다빠른 결단력과 강인함 하나만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이란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누군가의 철저한 계락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여하튼 그는 재팬 드림을 가장 완벽하게 이룩한 전후 시대의 최초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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