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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Oct 03. 2016

요도호 납치 사건(1970)

일본현대사 #6 "우리들은 내일의 죠(허리케인 죠)다"

“우리들은내일의 죠’다”, 그리고그들은 북으로 갔다

 요도호 납치 사건(よど號ハイジャック事件/1970년 3월 30)


 68년은 혁명의 해였다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70년은  흐름이 막바지에 부딪혀 식어가던 시기다. 그리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또 한 번 사건을 저질렀다. 비행기를 훔쳐, 북으로 간 것이다. 자신들을 '내일의 죠'라고 외치며.

 스포츠 만화의 원조격인 야구만화거인의 별’(巨人の星) 원작자 카지하라 이츠끼(梶原一騎)의 만화‘내일의 (あしたのジョ-)’는 한국에서는허리케인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날 가난한 마을을 찾아온 후부끼 죠는 불량배들의 싸움에 말려든다마침 그 싸움을 목격한 수십년전 챔피언이 죠를 키우려 하지만, 죠는 권투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싸움을 일삼다 소년원에 들어간 죠는 유명 복서 리키이시 토오루를 알게된다. 일류 프로덕션에 소속되어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리키이시의 권투에 매료된 죠는 리키이시를 쓰러뜨리겠다는 꿈 하나로 마음을 다지고 링 위로 오른다. 실력을 쌓아 챔피언을 향해 달리는 죠와 같은  위에 서기 위해 가혹한 체중감량에 도전하는 리키이시죠와 리키이시의 한 판 승부가 이 만화의 클라이막스다.


 어려운 훈련을 거쳐 점점 실력을 다져가는 죠의 모습에 당시의 청년들은 열광했다청춘과 가난, 그 가난 때문에 이루어질  없는 사랑그리고 투혼이 담긴  만화는 1968년에 연재가 시작된 이래 73년까지 장장 5년간 계속되었다.


 ‘내일의  인기는 현실세계의 장례식’일화만 봐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링 위에서 만난 죠와 리키이시. 8회전 리키이시의 어퍼컷에 다운당한 죠,  KO승을 거둔 리키이시도 몸을 가누질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다몇 분 후 죠에게 들려온 소식은 ‘리키이시가 사망했다는 한 마디.

 리키이시의 사망 소식은 일본의 신문 기사로 실렸을  아니라유명 연극작가이자 연출가 테라야마 슈지 등이 일본 굴지의 출판사 고단샤의 강당에서 리키이시의 장례식을 열었고, 이 장례식에는 700명의 팬이 찾아와, 조문했다.


  이야기를 요도호 납치 사건으로 돌려보면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간 학생들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들은내일의 죠’다라고 말이다.

 그들은 왜 자신들을 ‘내일에 라고 표현한것일까죠처럼 하얗게 타서 재가 될 때까지 혁명을 위해 투쟁하겠다는 얘길까? 아니면죠처럼 불운한 환경을 타고난 사람들과 함께 싸워나가겠다는 걸까? 어떤 평론가는 죠는 ‘반체제 상징이라 하고리키이시는 체제’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체제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리는 죠의 모습에 요도호 납치범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빗대었는지도 모른다. 요도호 납치범이 소속된 ‘적군’ 멤버에 따르면, ‘내일’을 향해 부단히 달리는 모습에 공감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은  북으로 갔나?>

 1970년 북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54-60년까지 북한은 연평균 20.3%의 고성장의 궤도를 달리고 있었고, 70년대에도 연평균 성장률 10.5%로 경제성장 전성기였다그 정세를 알았든 몰랐든 그들은 북에 자신들이 원하는 국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적군(赤軍:세계동시혁명을 꿈꾸던 학생단체)에게는 전세계 동시 혁명을 위한 해외기지가 필요했다처음에 그들은 쿠바를 지목했다가 북으로 변경하였다.


 1970년 3 30우리들은 내일의 라고 소리친 청년들은 하네다 공항에서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올랐다주모자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磨) 9명은 일본도 등의 무기를 휘두르며 평양으로  것을 요구하였다기장의 아이디어로 연료 보충 명목으로 후쿠오카로 향한 요도호는 후쿠오카 공항에서 여자와 어린이들 23명의 인질을 해방시키고평양으로 향한다. 


도중 요도호는 평양이 아닌 서울에 내렸다서울을 평양이라고 속여봤으나, 요도호 멤버   명이 미군을 향해여기가 서울이냐?”고 묻자, 미군은 바로그래서울이다.”하고 대답하여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포공항에서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고 평양으로 향했다이것이 요도호 납치 사건의 전모다.


 적군이 발행하던 책자에 실린 타미야 타카마로의 출발 선언에는 평양행에 대해 이런 이유가 적혀있다.

국경, 민족을 초월하여 만국 프롤레타리아 인민이 단결했을 때 비로소 제국주의 부르주아를 이 지구상에서 깨끗이 쓸어낼 수 있다’그래서 현실 속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국가라고 자신이 믿고 있는 ‘북으로 가서 단결을 위한 힘을 키우겠다는 것이다그는 ‘이 납치가 무장 세계당 건설의 일환이자, 첫걸음이라고 했다북에서 인민들을 위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그들은 비행기를 납치한 것이다.


 북으로  요도호 납치범들의 소식이 알려진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범인 중 한 명은 88년 일본에 잠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형기를 마쳤고또 한 명은 타이에서 달러 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의 복역을 끝냈다주모자 타미야 다카마로도 1995년 자신들의 자녀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바쁘게 활동하던  북에서 심장마비로 목숨을 거두었다.   


  요도호 멤버의 아내 자녀들   사람은 현재 일본에 돌아와있다. 아내들 중에선 일본인 납치에 가담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영국 유학 중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보이는 아리모토 케이코 씨 납치에 자신이 가담하였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다미야 타카마로의 지시에 따라 공작했다고 재판에서 증언했다.

 

요도호 납치범들은 북으로 간 후,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을 여러 차례 표현해 왔으나, 그 작업은 마음만큼 쉽지만은 않았고, 리더였던 다미야 타카마로는 1995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북에는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인민들을 위한 세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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