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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Oct 03. 2016

미소라 히바리

일본현대사 #9

쇼와 최고의 엔터테이너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미소라 히바리. 9살 때 데뷔하여 발매곡수 1035곡158편의 영화, 89편의 연극의 주연을 맡아온 최고의 엔터테이너일본국민과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며 살아온 국민 가수세간에는 아버지가 한국인이란 소문도 있었다.  일본인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가수 미소라 히바리 그녀는 누구였나?

 

1989년 6 24일본 열도가 조용히 흐느꼈다엔카의 여왕이라 불리우던 최고의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52세의 한창 나이로 타계하였다일본 신문과 방송은 마치 국상이라도 난 듯 그녀를 추모했다. 팬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았고일본정부는 그녀에게 여성최초로‘국민명예상 수여하였다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는 1937년 생선가게를 경영하는 가또 마스키치(加藤增吉) 프로듀서였던 어머니 가또 키미에(加藤喜美枝) 장녀로 태어났다쌍둥이 자리, 혈액형은 O본명은 가또 카즈에(加藤和枝).

 아버지 마스키치는 멋을 아는 사람으로 외출을  때에는 생선 냄새가 나지 않도록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는 버릇이 있었고음악적 성향도 풍부하여 1945년 딸인 미소라 히바리를 보컬로미소라 악단’이란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미소라 히바리가 어렸을 때는 어린 소녀가 엔카를 부른다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음악활동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원래 말이 없던 미소라 히바리는 말이 없어 오만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다또한 출석일수가 부족하여 쉬는 날 혼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기고 했다고 그녀의 자서전 ‘흐르는 강물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에서 털어놓고 있다.


<투철한 프로정신>

 9살  데뷔풍부한 표현력과 훌륭한 가창력으로 일본 전국민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던 미소라 히바리는 생전에  1035곡을 발표하였다이 숫자를 월평균으로 잡아보면 한달에 2곡은 발표해왔다는 얘긴데, 이는 가요계의 깨뜨릴 수 없는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항상 바쁜 연예생활에 임하면서도 프로의식이 투철했던 그녀는 모든 무대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자서전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그녀는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있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까지 해내야 한다나도 인간이기에 때로는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물론 너무 아파서 쉬고 싶을 때도 있었고열이 심하게 나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무대 위에 서왔고무대 위에 서는 것, 그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미소라 히바리의 모습임을 잊지 않았다.

 

팬이 미소라 히바리에게 염산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10대 소녀는 히바리의 얼굴을 망치면 인기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컨서트를 준비하던 미소라 히바리 얼굴에 염산을 부었다. 목이 따갑고 얼굴이 뜨겁게 불어오른 미소라 히바리에게 스태프들은 물을 뿌리려고 했는데 미소라 히바리는지금 물을 뿌리면 무대 위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하기까지 하였다결국 컨서트는 중지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 때 일을 생각하며 히바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나는 그녀를 아직도 미워합니다이런 사람은 팬이 아니죠. 아주 불안한 대상이죠무엇보다도 저를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한 것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에게 투철한 프로정신을 가지게   그녀의 어머니였다히바리를 연예계로 이끈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연예계에 들어간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은 다름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 키미에는 히바리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고, 히바리가 100 무대에 서면 100  무대 뒷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미소라 히바리는“항상 어머니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수가 없었고긴장해서 좋은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훗날 고백하고 있다. 1981 키미에가 타계하자 히바리는 버팀목을 잃은 슬픔에 잠겨야했으나 그래도 공연을 포기하지 않았다. 


<온국민의 벗>

 미소라 히바리는 대중음악분야뿐 아니라 일본영화계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시대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영화’가 최고의 오락이었던 시절, 미소라 히바리는   없이 영화의 주연으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였고미소라 히바리가 출연하는 영화들은 높은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일본국민들미소라 히바리는 허리띠 졸라매고 개미처럼 일해야했던 일본국민의 벗이었다.

 미소라 히바리를 최고의 아역스타로 발돋움하게한도쿄 키드’에서 당시 13살이었던 그녀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난 오른쪽 주머니에 꿈을 가지고 있고 왼쪽 주머니엔 껌을 가지고 있어

 가진 것이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시절미소라 히바리의 해맑은 얼굴과 당당한 모습은 일본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전쟁패전부흥의 시대를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어두운 구름에 덮힌 막막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미소라 히바리로부터 작은 희망 한 점 얻으려 하였다. 부디 괜찮다고내일은 좀더 나을 것이라고 그런 말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 훗날 타계한 미소라 히바리가 특별명예상을 수상한 이유는 암울한 일본을 건져내어 경제대국으로 이끈 공로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말한다자신은 키가 작고 얼굴도 평범하다고. 그런데도 스타가  것은 하늘 아니 부모님이 주신 목소리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이라고. 미소라 히바리는  재능을 키워서 스타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자 사명이라고 일찌기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노래든 완벽히 소화해내고자 하였고 보다 완벽한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사생활까지 제쳐두고 만능 엔터테이너로 살기를 고집한 미소라 히바리는 침체된 일본사회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일본역사상 최고의 스타로 군림해온 미소라 히바리는 16세에 요꼬하마에 거대한 저택을 지었고 20세에 히바리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1962년 가수 고바야시 아끼라와 결혼하였으나 2년  이혼아버지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의 죽음 또한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게 하였다.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얻어 두터운 애정으로 키웠으며 그녀가 죽은  아들 가또 카즈야(加藤和也)가 히바리 프로덕션을 맡아 미소라 히바리를 추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끝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소문은 여전하다. 일본사람들은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인이었다 하면“아, 역시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구나.”하며 어느정도 납득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한때는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사람들 내부에 한국사람중에는 미인, 미남이 많다, 예능에 뛰어나다는 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면 역사는 근대안에 한정된 것은 결코 아닌가 보다.

 미소라 히바리그녀가 한국인이었건 일본인이었건 그녀는 쇼와라는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름다운 하늘에서 지저귀는  마리 종달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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