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세잔, 서로 다른 시간표

by 레이트 블루머

피카소는 스물여섯 살에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을 그렸다.

이 작품은 지난 30년간 출판된 미술 교과서의 90% 이상에 실린다고 한다. 20세기 미술의 방향을

바꾼 기념비적 작품이다. 피카소는 이 한 작품을 통해 기존 미술의 방향을 해체했다.


“나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그의 말처럼 그는 보이는 세계를 해체하고, 머릿속 ‘개념’을 캔버스에 옮겨 놓았다.

그 이후로도 피카소는 60년 넘게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라고 꼽히는 작품은 지금도 스물여섯에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아비뇬의 처녀들.jpg 아비뇽의 처녀들, 피카소

여기 또 다른 거장이 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 화가 폴 세잔.

대표작으로 흔히 꼽히는 사과를 그린 정물화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그리고 생트 빅투아르 산 Mont Sainte-Victoire 연작들은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나기 10년 안팎, 예순이 가까운 나이의 그림이라는

점에서 피카소와 사뭇 다르다.


사과가 있는 정물.jpg 사과가 있는 정물, 세잔

폴 세잔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망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미술학교로 이끌었다. 인생의 청춘기와 중년기, 화가로서의 그의 삶은 실패에 가까웠다. 파리 살롱에 작품을 거듭하여 출품했으나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당시 최고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실패한 천재 화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세잔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세잔은 친구 눈에도 좌절과 실패의 주인공이었다.


그럼에도 세잔은 나이가 들어서도 고집스럽게 들로 나가 붓을 들었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오직 자연뿐이다.” 세잔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생트 빅투아르 산을 여러 번 그렸다. 같은 산인데, 그 산을 바라볼 때마다, 계절마다, 시선에 따라 다른 산이 되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약속의 땅을 보고 있기에 죽기 살기로 작업하고 있다. 나는 조금 진전을 이루었다. 왜 이렇게 늦어서야, 이렇게 어렵게야 진전해야 하는 걸까?”

생트 빅투아르 산.jpg 생트 빅투아르산, 세잔

세잔이 말하는 약속의 땅.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는 그 땅을 향해 평생을 두고 조금씩, 매우 늦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 화가이다. 그만의 약속의 땅을 향해 그는 늦었지만, 어렵지만 진보했다.

그가 원하는 약속의 땅에 도착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또 다른 시대의 올드 마스터로 평가받는다.


청년 학생들과 장래의 진로에 대하여 얘기해 보면 대부분 피카소와 같은 젊은 천재를 꿈꾼다. 나라도 그럴 거 같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이왕이면 빨리 성공하면 좋을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은 아무래도 덜 쫓기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청춘들의 시계는 피카소의 시간표에 맞춰져 있다. 채 스물다섯이 안된 청춘들이 “이 나이에 이룬 게 뭐지?” "해놓은 게 없어요"라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사람마다 시간표가 다르다. 어떤 이는 피카소의 시간표를 따라, 또 어떤 이는 세잔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진보'이다. 내 약속의 땅을 향하여 어렵지만, 늦더라도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세잔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대는 오늘도 당신만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있나요?"


당신의 시계는 어떤 시간표 위에서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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