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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Mar 28. 2024

잘 버텨 주었구나~

고창 선운사에서 …

겨울을 잘 견디고 솜털처럼 피어난 꽃망울



노래가 이끌었다.

오래된 노래 중에 '선운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송창식 가수님의 시원한 목소리와 애틋한 노랫말이 귀에 오래도록 남아 언젠가 동백꽃이 핀 선운사를 찾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다가 10년 전쯤에 '이제는 동백꽃이 피었겠지~'하는 마음과 함께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를 2월 중하순에 찾아갔다.

시기가 조금 일렀던 탓일까. 생각보다 동백꽃이 많이 피어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찰로 이어지는 길에서부터 꽤 나이가 든 동백나무가 여럿 있었고 사찰 내부의 절집 뒤편에서는 동백꽃들도 조금씩 피어나 붉은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작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입구에서 이어진 길을 느긋하게 걸으며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사찰 내부로 들어가서도 여러 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동백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래된 고찰 곳곳에 사람들이 남겨놓은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기원의 흔적들이 더 눈에 들어왔고, 쓸데없이 화려하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절집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봄을 재촉하듯 붉게 피어난 동백꽃보다는 정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선운사에 담긴 소박하고 오래된 그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오히려 '선운사'라는 노래의 가사와 더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온 것은 또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멋을 느끼며 산책하듯 사찰 내부를 거닐다가 이제 막 새로이 피어나려는 꽃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마른 가지 끝에 희고 뽀얀 솜털이 보드랍게 품고 있는 꽃망울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바로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었고, 선운사를 다녀오고 10년 남짓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사진 폴더 한쪽에 따로 보관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때 그 꽃망울은 마음에 훅하고 들어와 깊게 자리를 잡았다. 선운사의 동백꽃보다도, 오래된 여러 멋들보다도 더 깊숙이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꽃망울 사진은 마음속 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 마음은 때때로 나의 눈을 이 사진으로 다시 이끌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러 숱한 의미를 나에게 주어 왔다.


참 오래 기다렸을 것이다.

참 오래 기다렸겠다 싶었다.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과는 상관없이 견뎌야 하는 모든 시간은 그 시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이에게는 길게 느껴진다. 저 꽃망울에게도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만 같은 그 겨울을 견디며 기다려온 시간은 참으로 길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말 아무 것도 없어 보였고 정말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새로운 생명을 다시금 피워내기 위해 조금씩 보이지 않게 저 꽃나무의 꽃망울들은 점차 영글어 갔을 것이다. 그리곤 운명처럼 다가온 어느 계절에 이제 제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마친 이 녀석은 작고 뽀얀 솜털로 아직은 추운 날을 견디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준 것이었다.


잘 버텨 주었구나.

잘 버텨 주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견뎌내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그 혹독한 시간을 따뜻함을 그리며 기다리며 버텨내 온 것이 무척이나 대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제는 마음껏 피어나라는 기원도 함께 생겨났다. 또 언젠가 다시 질 날이 있겠지만 오늘의 시간들을 기억한다면 그 또한 견디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그렇게 화려함과 성숙함을 지나 시들어 잠들었다가 다시 아름답게 깨어나는 일을 1년이란 시간에 반복하듯, 우리의 삶 또한 햇살이 비치는 날도, 비바람이 치는 날도, 그러다 견디기 힘들 만큼 혹독한 시간도 만날 것이고 그 또한 지나면 다시 따스한 햇살이 황홀하게 비쳐오는 시간이 있지 않겠나. 다만 그 시간의 주기를 알 수 없어 힘겨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혹독한 시간도 끝은 있다는 것이다.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그 뒤에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는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꽃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시간에 든 단상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깨달은 것은...

눈에 들어온 곳에 마음이 가는 일이 많겠지만 그보다는 마음에 들어온 곳에 더 깊은 눈이 간다는 것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겨울을 맞은 이들에게 봄을 기다리라는 것은 위로가 될 수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결국 봄은 오고 꽃은 핀다.

 마음에 봄을 놓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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