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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Oct 18. 2023

부석사

한여름이었다.

2016년 7월 말, 여름이 제 기세를 마음껏 펼쳐나가기 시작할 무렵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를 찾았다. 저 옛날 책을 소개하는 한 TV프로그램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다루며 부석사는 책의 명성과 함께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언제 한 번 나도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지 수년이 지난 후 한여름에야 이곳 부석사를 찾게 되었다.

부석사 전경

부석사(浮石寺)에는 부석이 있다.

사실 부석사는 무량수전도 유명하지만 원래는 무량수전 왼쪽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부석바위 덕에 더 잘 알려진 사찰이다. 이 바위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마치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데 그래서 '부석(浮石)'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이고 바위에도 한자로 이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고도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석의 바로 아래는 예전에는 아주 깊은 골짜기였고 그 아래에서 쳐다봐야 뜬 돌처럼 제대로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인가 그 골짜기를 메워버림으로써 뜬 돌의 의미를 지금은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여튼 이 바위에는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그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로 유학 갔던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귀국길을 호위하고 무량수전 뜰아래에 깃들어 부석사를 영원히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전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고 화엄사상을 구현한 약간은 독특한 가람배치를 갖고 있는 절이라고 한다.



절마당에 여름을 맞은 수국이 복스럽게 피어있다.

하지만…

그런 전설과 역사적 배경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부석사의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저 이 산속에 자리 잡은 부석사의 고즈넉함에 매료될 뿐이었다. 절의 규모가 작지만은 않았음에도 마치 어미 품 속에 포근히 안긴 아기처럼 여름 산의 너그럽고 풍성한 품 안에 평화롭게 안겨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어느 사찰 건물도 산 풍경 속에서 저 혼자 뽐내려 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짙고 옅은 초록과 간간히 양념처럼 붉고 푸른색들의 꽃들 속에 절 전체가 고요히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여름임을 보여주듯 절정의 아름다움을 피워낸 청보랏빛 수국이 절 풍경을 뒤로 세워놓고 복스럽게 얼굴을 내민 모습이 평화로운 그림 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음을 온통 뺏기고 말았고 그 덕에 마음은 점차 비워져 갔고 고요해졌다.



삼층 석탑 뒤로 범종루가 보인다.

부석사의 범종루는 특이하다.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하늘에서 보면 華(빛날 화)의 글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화엄사상의 구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가람배치의 중심, 즉 세로축에 해당하는 곳에 범종루가 있다. 그래서 이 건물에는 특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전통 건축물은 앞면이 좌우로 길고, 측면은 짧다. 그런데 이 범종루는 앞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옆에서 보면 확연히 다르다. 앞면이 짧고 측면이 길다. 가로로 편안히 앉아있는 모습이 아니라 세로로 쭉 뻗어있는 구조이다. 그래서 범종루의 앞면 난간에 서서 내려다본다면 봉황산의 줄기와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세를 한눈에, 마음속에 한껏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앞면은 분명 팔작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뒷면은 맞배지붕이다. 한 건축물의 지붕이 이렇게 다른 경우를 다른 곳에서는 잘 보지 못했다. 이유를 찾아보니 뒤쪽 언덕 위에 있는 무량수전 때문이라고 한다. 무량수전의 지붕을 짓누르지 않도록 이런 치밀한 설계를 했다는 것이다.


범종루 안에 있는 법고

특이점이 또 있다.

그런데 범종루의 특이점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범종루 아래쪽의 계단을 통해 뒤편으로 올라서서 범종루 누각에 올랐는데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범종이 보이질 않았다. 범종루에 범종이 없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실되고 중건하는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는 범종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하늘의 날짐승을 상징하는 운판, 바다와 강 등의 물짐승을 상징하는 목어, 그리고 땅의 들짐승을 상징하는 거대한 법고가 있을 뿐이었다. 이 셋을 모두 아우르는, 그리고 인간을 상징하는 범종은 없었다. 범종은 범종루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다 말고 고개를 오른쪽 뒤로 돌리면 그곳에 따로 범종각이 있고 그 안에 있었다. 다른 사찰에서도 범종만을 따로 설치해 놓은 범종각이 있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범종루라고 불리는 곳에 범종이 없고 따로 범종각을 만든 것은 낯선 일이었다. 무슨 사연이나 이유가 있었겠지만 알 길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범종루 뒤편으로 부석사 현판을 단 안양루가 보인다.

극락으로 가는 길, 안양루.

범종루를 지나면 각도를 살짝 틀어 안양루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보통은 일자로 이어지게 가람 배치를 하는데 이곳은 약간 각이 바뀐다. 산세 때문인지 풍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살짝 각이 틀어져 있는 것은 안양루 위에서, 혹은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는 절 앞자락의 풍경에서 그 의미와 빛이 발현된다.

하여튼 그 안양루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데 앞서서 저 멀리 한 노파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분은 이 계단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에서 이 안양루까지 이르는 계단의 수는 108개라고 한다(실제로 세어본 어떤 분은 108개가 조금 넘는다고도 한다). 사찰의 계단 높이를 생각하면 안양루까지의 계단 108개는 무척이나 가파르고 힘겨운 여정이다. 물론 옆으로 돌아가는 길도 있다. 그 길로 가면 살짝 돌아가기는 하지만 가파름에 따른 힘겨움은 조금 덜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노파는 꿋꿋하게 무릎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극락세계까지 가는 길은 108개의 번뇌를 힘겹게 딛고 지나야 하는 것을 그 노파는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한여름에 작은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뚜벅뚜벅 오르는 그 모습이 증명하고 있었다.

108 계단의 끝에 다다른 노파의 걸음


그렇게 올랐더니 …

노파의 바람과 기원을 따라 안양루 아래쪽 계단을 통해 안양루 위쪽으로 올랐다. 누각의 내부는 여타의 다른 절의 누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양옆으로 배롱나무가 있었고 여름을 맞아 붉은 꽃들이 피어올라 초록의 단조로움을 다채로움으로 바꾸어주는 것은 이 시기에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고 즐거움이었다.

안양루 내부에서 바라보는 배롱나무의 꽃은 일품이었다.

극락세계를 말하는 '안양'의 뜻은 건물 자체나 그 건물의 상징으로는 미천한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도, 심지어 알아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극락은 안양루가 자연에서 빌려온 건물 밖의 풍경이었다.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극락세계였다. 주변을 둘러싼 붉은 꽃 너머로 그간 걸어 올라오며 만난 사찰 건물들의 지붕들이 허리를 낮춰 엎드려 있고 그 너머로는 봉황산 줄기가 뻗어내려가고 머얼리 아스라이 소백산 줄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 어떤 속세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숨 막히는 시원함이 가득했다. 극락이 뭐 별 거 인가? 이렇게 어느 평화로운 세계에 먼지 같은 한 존재가 되어 그 아름다움이 일원이 되면 그것이 곳 극락이고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드디어 만난 무량수전

기나긴 주저함과 기다림 끝에 부석사에 왔고 입구부터 이어진 108 계단을 모두 올라 안양루에서 극락 같은 평화로움을 맛본 뒤 다시 조금 더 올라 드디어 부석사 무량수전을 만났다. 무량수전의 첫인상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노승의 옅은 미소 같은 느낌이었다. 바랠 대로 바랜 낡은 단청은 이미 빛을 잃어 원래 목조의 나무색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었고 심지어 무량수전 네 글자가 적힌 현판마저 세월의 풍파 속에서 무던히 무심히 시간을 조망하며 흘려보낸 듯한 느낌이었다. 건물 뒤편으로 펼쳐진 푸른 나무들에 안겨 있으면서 오래되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선연한 느낌과 함께, 절 마당에 있는 작은 석등 주변에서 서성이며 차마 다가서지는 못하고 그저 절집만을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그윽하게 내려보며 은은하게 품어주는 것이 마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아온 중생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리다가 맞아주는 노승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결코 작지만은 않은 규모의 절집이지만 웅장함이나 화려함보다는 포근함과 소박함이 느껴졌다.

노승 같은 모습으로 맞아 준 부석사 무량수전


한여름의 낮이라 찾는 이가 많지 않았음에도 절집은 문을 모두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날이 더워 그런 것이겠지만 출입문은 활짝 열어두었고 세로로 긴 창은 아래쪽을 열어 바람길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리의 전통 건축이 가진 멋이고 선조들의 지혜라 하겠다. 아마도 날이 더 더웠다면 그 창을 들어 올려서 처마에서 내려온 걸대에 올려 완전히 열어 두었겠지. 하여튼 이 모습은 그저 날이 더워 열었다기보다 마치 산 아래 속세를 향해, 더 정확히는 속세의 사람들을 향해 열어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 어떤 어려운 고민을 품고 찾아온 중생이라도 기꺼이 맞이하여 툭~ 하고 선문답 같은 깨달음을 내려주는 고승의 모습처럼 무량수전의 이 한여름날의 모습은 딱 그랬다.

국보 18호이니,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니 하는 그런 수사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 건물 자체가 갖고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주변 환경과의 조화, 이런 것들이 이 순간, 이 공간에 있는 모두를 포근히 품어주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라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말했던 그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라는 책이 TV에서 소개되었을 때 구해서 읽었었다. 그런데 하도 오래전이라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최순우 작가님께 죄송한 마음 ㅠㅠ). 그런데 그 제목의 의미를 직접 무량수전에 가서 단번에 이해를 했다. 무량수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바라본 건물 자체의 매력도 있었지만 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그 앞에 펼쳐진 극락세계를 바라보는 것에 있었다. 안양루에서도 그랬지만 그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무량수전을 등 뒤에 놓고 그 앞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산 아래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108 번뇌를 계단 하나하나에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마음이 비워진 그곳에 멀리 소백산 줄기와 백두대간의 능선들이 하나하나 겹쳐지며 펼쳐진 시원하면서도 평화로운 세계가 한가득 들어왔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몇몇 사찰 건물들은 지붕만을 드러내며 그저 있는 듯 없는 듯이 시선 아래로 숨겨지고 넓은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 옛날 의상대사가 무엇을 보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그가 추구했던 화엄세계가 어떤 의미로 이곳에 구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은, 그리고 심지어 불교와 승려들마저도 이 세계 안에서는 있으나 있지 않은 것 같은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사소한 미물들이 사바세계에서 아웅다웅하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며, 이곳까지 오며 그 세계에서 겪었던 많은 고통과 미련, 욕심들을 다 버리게 되고 결국엔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된다는 것을 무량수전에 도달하면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의상대사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최순우 작가님은 그런 의미를 간파하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라고 제목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량수전을 볼 것이 아니라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그 앞에 펼쳐진 세계를 비워진 마음에 한껏 담아내라는 것이겠지.

아득히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능선들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

아쉽지만 다시 속세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가끔씩 절집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일상에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을 잠시 잊게 되기 때문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이고 여백이 있어야 그곳에 글씨를 적을 수 있다. 이 엄청난 평화와 안정의 세계를 가슴속에 채웠으니 다시 힘을 내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은 오를 때도 힘겹지만 내려다 볼 때는 무서움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옆길로 천천히 내려가기로 했다. 내리막길에 시선을 주다가도 종종 다시 절집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행을 하며, 혹은 사진을 찍으며 새로 생긴 습관 중에 하나가 이렇게 자꾸 옆을 보고 뒤를 되돌아보고 하는 것이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대상은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겠구나 하는 나름의 깨달음도 얻기도 했다.

옆길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정면을 바라보며 오를 때의 안양루와 무량수전과는 또 다른 멋이 내려오는 길에 보였다. 다만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건물들이 산에 포옥 안겨 있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왜 그런 느낌이 계속 들까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큰 나무가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유명하다는 사찰들을 다니다 보면 심지어는 보호수로 지정될 만큼 큰 나무들이 사찰 안에 하나씩은 있는 경우가 흔했다. 한 사람의 팔로는 다 감싸 안을 수 없는 엄청난 크기와 세월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그 절의 또 다른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부석사에는 적어도 천왕문을 통과한 이후에는 그런 나무들을 보지 못했다. 물론 오래된 나무는 있다. 의상대사의 지팡이라고 알려진 나무가 있기는 한데 그것도 조사당 안에 있어 작다. 이렇게 건물의 높이를 넘어설 만큼의 큰 나무가 없어 부석사는 가람 전체가 아담한 느낌을 주고 산에 포근히 안긴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특히 주요 건물 앞에는 키 작은 나무들만 오밀조밀하게 잘 크고 있을 뿐 웅장한 느낌을 주는 요소는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 같은 미천한 중생에게는 편안함으로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것을 내려올 때 보았다.

내려오면서 절 건물들을 다시 되돌아보니 계단을 통해 끊임없이 올랐던 산비탈이 보였고 건물을 지을 때마다 석축을 쌓아 올려 높이를 조절한 것들이 보였다. 그 석축들은 최근에 쌓은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이곳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조성할 때마다 쌓아 올린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석축에 들어간 돌들은 정으로 쪼아 다듬은 흔적은 거의 없는 자연석들이었고 그것을 가져다가 이리저리 맞추어 놓고 그 사이 빈 틈에는 작은 돌들로 메꾸며 석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돌들 위로 담쟁이가 뻗어 올라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뻗어갔던 담쟁이가 세월이 흘러 다 말라 줄기 일부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들도 보였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담쟁이들이 이곳을 채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나름의 사연과 고민, 기원을 품고 이 사찰을 오르내렸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 또 그의 어머니… 중생들의 번뇌는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고 반복되었을 것이고 부석사는 그 많은 번뇌들을 이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너른 세계에 다 품어왔을 것이다.

때로는 목마른 이들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고, 때로는 제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찾은 이들을 조용히 기다리며 그를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절이 가진 그 포근함과 어울림, 조화로움 만큼이나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스님들 또한 중생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품어주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면서 만난 몇 가지 풍경들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하였다.




새롭게 피어난다.

아무리 사바세계가, 속세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그곳을 살아가야 하는 중생들은 인(忍)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서도 조화를 찾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천성으로 타고난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평소 고통 속에 괴로워하다 가끔씩 어디선가 용기를 얻어 번뇌를 견디며 살아간다. 거칠고 척박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도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것이 또한 속세가 아닐까 싶다. 오래된 기와지붕 위에서 싹이 트기도 하는 것처럼, 부석사 조사당의 처마 아래에 있어 비나 이슬을 맞기 힘든데도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의상대사의 지팡이, 선비화(골담초)처럼 말이다.

높은 수준의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평화로움을 우리 중생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 내겠지만 그래도 속세에서도 새롭게 피어나는 무언가는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시선의 변화, 생각의 변화만으로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도 힘들다면 부석사를 한 번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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