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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Sep 06. 2023

철원 고석정 & 꽃밭

가을을 기다리며...

가끔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랬지만 사람은 대개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면 금세 지겨움을 느껴 새로운 것을 찾게 된다. 올 여름도 나에게 그러했다. 마치 '이게 바로 찐한 여름이오.'라고 말하는 듯이 올 여름의 기세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지속했다.

9월이다. 이제 그 기세 좋던 여름이 다 지나가는 느낌이다. 엄청난 폭염과 폭우를 반복한 올 여름은 사람을 밖으로 나다니기 어렵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런지 올 여름처럼 지겹게 보낸 여름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이 얼른 왔으면 하는 생각이 일찍부터 들었었고 그 생각은 가을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강가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고석정에서 바라본 풍경 (촬영 : 2019년 10월)


처음에 몰랐었다.

철원이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할 만한 곳이 되는지 전혀 몰랐었다. 2019년 동료들과 함께 이곳으로 연수를 떠났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을, 철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한탄강의 물줄기와 그 옆으로 이어진 주상절리, 그리고 그 위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시원함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고석정 꽃밭에서는 가을꽃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선선해지는 바람과 함께 훌쩍 떠났다가 가을 냄새를 몸 깊숙이 마음껏 배어들게 할 만한 그런 곳이었다.

고석바위 쪽에서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선 (촬영 : 2019년 10월)


고석정(孤石亭)을 먼저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인근 고석정 꽃밭에서 가을꽃 축제를 하는 기간이 되면 주차장은 오전부터 만차가 되고 안내요원들이 나서서 꽃밭 건너편 임시 주차장으로 안내를 한다. 그러나 멀지는 않다. 충분히 다시 걸어올 만한 거리이다.

꽃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고석정을 먼저 찾았다. 흔히 고석정이라고 하면 강줄기 옆에 외로이 솟은 바위(그래서 孤石이다.)를 떠올리지만 고석정은 정자를 말한다. 고석정 입구를 통과하면 계단이 나타난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주상절리가 오랜 세월 강물에 의해 깎여 높은 수직 절벽이 되었고 그 절벽 위에서부터 계단을 통해 강의 수면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 중간에 고석정이 있다.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 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정자는 숱하게 많은 시련을 겪고 겪으며 부서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한 끝에 1997년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수해를 입어 부서진 적이 꽤 있어 단단하게 세우려 한 것은 이해하지만 왠지 나무가 주는 따뜻한 느낌이 없는 듯하여 아쉬움이 있다.

고석정에서 바라보는 고석바위와 한탄강의 모습(촬영 : 2022년 10월)

그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고석정 그 정자에 오르면 한탄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굽이쳐 들어오는 한탄강 중류의 적당한 물줄기와 옥색 빛깔의 아름다운 강빛,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주상절리 절벽, 그 위로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무성한 나무 숲, 그리고 가장 높은 곳부터 서서히 푸른빛에서 노오란 빛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나뭇잎들까지... 그 모든 풍경들이 한눈에 담긴다. 사실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더 잘 보일 것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무성한 숲이 있어 입구에서 시작하는 계단에서는 보이질 않는다. 이곳까지 내려와서야 비로소 고석바위와 한탄강 주변 풍경들이 제 멋을 드러내는 걸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신라, 고려 때의 왕들은 물론 승려와 조선 때 영의정을 지냈던 사람들조차 이곳에 정자를 세워놓고 그 풍류를 즐긴 것이 아니겠나 싶다. 지금의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저마다 탄성을 내고 휴대폰을 꺼내 그 풍경들을 사진에 담기에 바쁜 모습이다. 날이 좋은 어느 날, 사람이 없는 이곳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그 고요함을 이 풍경으로 가득 채우고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이면 그 자체가 이미 신선의 풍경이 아닐까 싶다.


특이하게도 좁은 모래톱이 고석바위와 이어져 형성되어 있다. (촬영 : 2022년 10월)


풍경은 시선에 따라 바뀐다.

고석정에서의 감탄을 뒤로하고 다시 계단을 걸어 고석바위 옆 작은 모래톱까지 내려갔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우선 고석바위가 생각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보인다. 외로이 서있는 돌이라 고석이라 불렸을 텐데 외로움보다는 오히려 묵직함과 굳건함의 느낌이 강했다. 실측해 보면 제주 바다에 외돌개라는 바위보다는 작겠지만 외돌개는 진정 홀로 서있는 외로움이 느껴지는 반면 고석바위는 강인한 느낌이 더 많이 든다. 바위 끝에 있는 소나무들 때문인지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느낌마저도 든다. 그래서 임꺽정도 어쩌면 이 바위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바위에는 임꺽정이 은신하였다는 자연 석실이 있고 건너편에는 돌벽을 높이 쌓고 석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의적이라고 불리는 임꺽정은 이곳에 칩거하며 산성 본거지로 삼았다 한다. 당시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곳 철원을 통과하여 조정에 상납할 조공물을 탈취해 빈민을 구제하는 등 부패한 사회 계급에 항거했다는 그에게 이곳은 크고 작은 싸움으로 힘겨워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데 무척이나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철원이라는 곳은 궁예의 꿈과 좌절을 비롯해 예로부터 많은 전투와 전쟁이 이어진 곳이고 심지어는 한국전쟁 때에도 고석정이 소실되는 등 역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늘 있어왔던 곳이다. 지금도 분단의 현실과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주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통통배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세상의 변화를 스스로 증명하듯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풍경은 시선에 따라 바뀌고 그에 따라 마음도 바뀌는가 싶었다.

강가의 좁은 모래톱에서 바라본 고석바위. 유람선이 참 한가롭다. (촬영 : 2019년 10월)


다시 꽃밭을 향해 걸었다.

사람들이 꽤 있어 번잡스러웠지만 그 속에서도 무언가 고요한 풍경에 취한 듯한 느낌을 받고 다시 길을 되돌아 나왔다. 내려갈 때도 꽤나 험해 보였던 그 돌계단을 다시 오르는데 이제는 그 높이와 경사 때문에 힘듦까지 몸에 얹혀졌다. 헉헉대는 숨소리와 마음처럼 따라오지 않고 자꾸만 뒤처지려는 다리를 부여잡고 겨우 그 계단을 다 올라왔다. 오르고 나니 평지의 걸음은 한결 수월했다. 사람 참 간사하다. 다시 주차장 옆에 있는 광장과 상가들을 만났다. 광장에서 시원한 생수 한 병을 마시며 잠깐 쉬고 광장 주변의 부속 건물들 뒤편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고석정 꽃밭으로 가는 길이다. 꽃밭의 입구는 두 곳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를 통해 갈 수도 있고 처음에 주차를 했던 임시주차장을 나와 도로를 건너면 바로 또 다른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오히려 그곳이 더 입구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산 능선이 배경으로 펼쳐진 곳에 촛불맨드라미의 색이 구불구불~ 그림을 완성한다.(촬영 : 2022년 10월)


대형 인공 꽃밭으로 그림을 그리다.

사실 꽃밭 입구로 들어서기 전부터 어마어마한 넓이와 그곳을 가득 채운 꽃들이 눈에 들어온다. 굳이 들어서지 않아도 전경이 다 보인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내 취향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사진에 담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이렇게 대규모이며 인공적인 꽃밭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들판에서 때를 기다려 스스로 피어난 작은 야생꽃들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툭하고 제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하드에 저장된 꽃 사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이곳도 처음에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요즘 여러 지역에서 지자체가 나서서 꽃을 테마로 하는 대형 꽃밭나 정원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몇 군데를 다녀봤는데 많은 꽃들이 뿜어내는 엄청난 색과 향 말고는 그다지 큰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다. 다만, 이곳 철원의 꽃밭은 다른 지역보다 조금 다른 점들이 있었다. 그저 넓고 평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높낮이가 있는 땅에 밭고랑을 곡선으로 뽑아낸 곳도 있어 그나마 덜 인공적인 느낌이 있다. 또한 주변을 둘러싼 산 능선들이 있어 밭의 풍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이 강했다. 다양한 꽃을 색깔별로 그 곡선에 피워내어 산 능선과 제법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전체적인 조화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관람로 길가의 코스모스 너머로 꽃밭이 펼쳐진다. (촬영 : 2022년 10월)
가을이 되면 댑싸리가 붉게 물든다. (촬영 : 2019년 10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주변 풍경과의 조화도 좋지만 그래도 꽃은 그 하나하나의 매력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예쁘다. 꽃밭에는 백일홍, 천일홍, 댑싸리, 구절초, 맨드라미, 억새, 코스모스 등 여러 가지 꽃들이 축제 시기에 맞춰 꽃을 피워냈다. 구획별로 나뉜 꽃밭에는 유사한 색들의 같은 품종 꽃들이 줄지어 피어있다. 히 천일홍이 참 많았는데 품종별로 다른 색을 보이는 꽃들이 심겨 있었다. 보랏빛, 분홍빛, 하얀빛을 내는 일반 천일홍뿐만 아니라 딸기의 색과 모양을 닮은 진주황빛의 천일홍 스트로베리 품종도 있었다. 인간의 관념으로 분류해 놓은 이름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하나의 그 꽃들은 저마다의 키와 색으로 작지만 뚜렷한 자신만의 의미를 발산하고 있다. 역시 꽃들은 하나하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하얀 속살이 보랏빛을 뚫고 올라오는 듯한 천일홍 (촬영 : 2019년 10월)


그래도 가을꽃은 코스모스이다.

그래서 이곳 고석정 꽃밭에도 코스모스가 많다. 다른 꽃밭들과는 달리 코스모스를 심어놓은 곳은 색깔별로 구분하지 않았다. 아니,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고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너른 들판에 씨앗을 흩뿌려 놓았던 것인지 진분홍, 연분홍, 하얀 꽃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피어있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차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던 여느 시골길 옆에서 만난 도로가의 코스모스 같은 느낌, 자연스레 피어난 코스모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꽃들마다 제각기 피는 시기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가을꽃이라 하기에도 무색하게 채 더위가 다 가시기 전부터 피어나는 코스모스가 있듯이 이곳에서도 이미 꽃이 지고 있는 모습을 한 녀석부터 아직 꽃봉오리로 맺혀 있는 녀석들까지 그 모습들이 제각각이었다. 그중 꽃잎 끝으로 갈수로 하얀빛에서 찐한 보랏빛으로 번져가는 색을 품고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코스모스 하나가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그리 정성스럽게 피어난 모습이 기특해 나 또한 정성스레 사진에 담았다.

(촬영 : 2019년 10월)


철원의 가을은 다양하다.

꽤나 넓은 이 꽃밭을 다 돌아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물론 찬찬히 하나씩 살피며 걷다 보면 더 걸릴 수도 있다. 가을꽃들이 만발한 이곳을 여유롭게 걷다 보면 살랑거리는 바람에 사뿐히 흔들리는 꽃들의 모습에 가을 정취를 흠뻑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철원의 이곳들을 돌아보는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이 딱이다 싶은 생각이다. 물론 철원은 이 두 곳 말고도 돌아볼 만한 곳들이 더 있다. 사전허가를 받고 DMZ 쪽으로 가면 옛 노동당사를 비롯한 분단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도 있고(사실 고석정 꽃밭도 예전에는 탱크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한다.) 궁예가 세운 도읍지로 알려진 너른 평야도 볼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잔도길로 만들어진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동절기에는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도 할 수 있다. 은하수교를 찾아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건너보고 그 앞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다.




휴전선 접경 지역인 철원. 묘하다~!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문득문득 묘한 느낌이 든다. 내가 걷고 여행하는 이 길에서 조금만 더 안쪽으로 가면 군인들이 총을 들고 철조망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스치게 되면 내가 너무나 아름다운 이곳에 감탄을 하며 여유롭고 평화롭게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지금은 휴전선과 맞닿아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궁예의 옛 도읍지를 보면서는 역사의 무상함과 이념의 헛됨을 절실히 느꼈었다. 이 좋은 곳을……. 몇십 년을 기다리는 듯, 산과 들판과 자연은 예전과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여전히 우리는 이념으로 갈라쳐진 채 시간만 흐르고 있고 이 좋은 곳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궁예의 옛 도읍지. 저편 산 너머로는 철책선에 가로막혀 넘어갈 수가 없다. (촬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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