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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Aug 11. 2023

벽초지 문화수목원

사색을 하게 되는 한국식 정원의 수목원


(촬영 : 2008년 3월)


자신만의 매력이 가득하다

벽초지문화수목원을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면 아마 이 문장부터 사용하지 싶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수많은 수목원이 있지만, 그래서 몇몇 곳을 다녀보기도 했지만 이만큼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는 곳은 더 없다고 생각한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을 피워내고 그 꽃들과 함께 한국식, 서양식 정원이 함께 자신의 매력을 피워내는 곳이다. 2005년에 개장한 뒤 재방문을 할 때마다 조금씩 새롭게 업그레이드되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선함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다. 

(촬영 : 2009년 7월)

하이얀 연꽃이 맞이하다.

지금도 여전한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이제는 사라진 것 같다) 초창기에는 수목원 입구 앞에 있는 주차정 건너편으로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는 연꽃을 심어 놓았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기도 전에 작은 연꽃들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름에 소담스레 피어난 순백의 연꽃은 그 자체로도 단아한 아름다움을 발산하지만, 하얀색으로 피어나는 연꽃들 너머로 수목원 입구의 무채색 벽돌 담을 함께 바라보고 있으면 이 수목원은 무엇보다 한국적인 느낌의 수목원일 것이라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다.

(촬영 : 2009년 7월)

 물론 지금도 수목원 내에 연화원이 있고 나무데크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수련과 연꽃을 볼 수 있다. 허나 입장도 채 하기 전에 수목원 내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던 주차장 건너편의 연꽃 연못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겠으나 벽초지에 대한 첫인상을 무척이나 강하게 심어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은 관람객이 많아져 주차장도 따로 크게 마련되어 있고 정문 앞 작은 주차장 너머에도 이런 연꽃밭이 사라졌겠지만(확인된 정보는 아니다. 최근에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처음 벽초지를 찾은 이들에게 강한 기대감과 설렘을 주기에 이 연꽃밭은 너무나도 좋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촬영 : 2009년 7월)


우리의 기억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수변 정원이 펼쳐지다.

벽초지 입구에서 바로 좌측으로 이동하다 보면 시원한 폭포소리가 먼저 우리의 귀를 자극한다. 작은 인공폭포 옆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면 벽초지 연못정원이 나온다. 이곳이 이 벽초지 수목원이 가장 하이라이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머릿속 어딘가에 이미 저장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전혀 낯설지 않은 연못 정원이 시원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TV 드라마나 영화 어디에선가 본 듯한, 특히 사극의 한 장면 같은 그런 풍경이다.(실제로 이곳에서 그런 촬영들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아니면 전생의 삶 어딘가에서 겪었음직한... 뭐 그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발걸음마저 다소곳하게 만들어지게 된다. 사뿐히 걸으며 연못 둘레를 걷다 보면 마치 조선시대 양반이라도 된 듯 느릿느릿 조용히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파련정과 무심교 (촬영 : 2009년 9월)

같은 장소의 풍경이라 하더라도 어느 곳에서 어느 각도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동의 크기는 달라진다. 이곳의 풍경은 폭포 쪽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연못 우측으로 천천히 걸으며 감상하는 것이 좋았고 특히 파련정이라는 정자와 무심교라는 작은 다리를 지난 후에 다시 뒤돌아 그 정자와 다리를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다웠다.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주변의 나무 숲과 더 잘 어우러진 정자와 다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 신기한 것은 눈으로 볼 때는 한국적인 느낌을 물씬 받게 되는 풍경임이 틀림없는데 사진을 찍어 놓으면 몇몇 장면은 한국화라기보다 서양인이 그린 한국풍경 같은 느낌도 받게 된다. 

무심교 뒤쪽 버들길에서 본 연못 정원 (촬영 : 2009년 7월)
무심교 쪽에서 바라본 파련정(촬영 : 2009년 7월)

특히 무심교 쪽이나 이미 그 다리를 지나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파련정이 일품이다. 정자 건물 자체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육각 정자이지만 파련정을 둘러싼 거대한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이 미세한 바람을 바다 하늘하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연못가의 수초들이 받아 함께 움직이는 모습,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연못이 받아 맑게 반영으로 보여주는 풍경은 정중동이라는 말 자체를 그대로 현실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지극히 한국적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저도 모르게 받게 된다. 

멀리서 바라본 파련정(촬영 : 2009년 7월)


휴식을 위한 풍경을 만나다.

그렇게 결코 작지만은 않은 연못정원을 한 바퀴 다 돌 때쯤이면 '깨달음의 정원', '잔디농원'으로 길이 이어진다. 어쩌면 정원의 이름에 "깨달음"이란 단어를 넣을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곳에 다다르면 이내 알게 된다. 이제 연못을 다 돌았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면 그저 길일뿐이지만, 연못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억새꽃이 하얗게 피어나고(그래서 사색이 많아지는 가을이면 더 좋다.) 그 너머로 이미 꽃이 다 진 연이 그 이파리마저 쇠해가는 풍경을 만들어 내면 그 앞의 벤치 하나만으로도 그곳에 사람을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멍하게 그 풍경 속으로 침잠해가는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무엇을 깨달을 지야 사람마다 다 다를 일이지만 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곳에서 생각해 볼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굳이 어떤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저 복잡해졌던 머리와 가슴을 텅 비워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벤치와 억새 너머로 파련정이 아련히 보인다.(촬영 : 2009년 9월)

그리고 그렇게 무언가를 내 안에서 비워낼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은 잔디정원으로 이어진다. 꽤 넓은 잔디밭이 잘 관리되어 푸르게 펼쳐져 있고 주변의 나무 그늘 아래로 아까의 그 벤치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멍하니 앉아 사색에 잠기거나 이곳에서 편안한 에세이 한 권 읽어보는 것도 좋은 공간이다. 음악을 듣기에도 참 좋다. 일행이 있다면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워보는 것도 좋다. 

(촬영 : 2009년 9월)

특히 중간에 큰 나무 밑에 벤치는 참 매력적이다. 큰 그늘을 만들어 준 나무 아래로 두세 명이 앉을 수 있는 벤치 하나가 이곳의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다. 언젠가 누군가가 심어 놓은 이 큰 나무는 몇 십 년이 흐른 뒤 또 다른 누군가의 휴식을 위해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앞선 사람의 노고가 뒷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얼핏 하게 되는 공간이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펼쳐진 잔디밭은 어린아이들이 놀이터가 되었고 가끔 날아드는 새들의 쉼터도 되었다. 이곳은 그렇게 휴식을 위한 풍경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촬영 : 2009년 9월)

이 잔디마당과 연못 정원 사이에는 주목이 두 줄로 열 지어 서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작은 숲터널이 생겼다. 아이들은 그냥 그대로 재잘거리며 뛰어갈 수 있는 높이지만 성인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야 한다. 자연이 만들어낸 작고 아름다운 이 풍경은 사람을 지극히 겸손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을 갖고 있다. 아름답다고 해서 제멋대로 달려들 수 없게끔 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러해야 함을 전달하기 위해 이런 풍경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촬영 : 2009년 9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은 우리의 자연과 정원이라면 우측으로 들어가면 서양식 정원이 나온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한국식 정원은 나무와 연못, 온갖 풀로 가득해 사람을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라면 서양식 정원은 하늘을 향해 훤히 트여있는 공간이고 사람의 손으로 무언가를 다 정돈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여느 유럽의 정원이 대체로 그렇듯 잘 정비된 잔디밭과 여러 조각들, 그리고 나무 하나하나마다 정원사의 손길이 닿아 예쁘게 다듬어 놓은 모습이 이곳 세미원 서양정원에도 가득하다. 

(촬영 : 2009년 9월)

여러 신화 속의 신들을 조각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면 중앙에는 역시 조각상들이 여럿 함께 있는 분수대가 있다. 정방형으로 이루어진 유럽 어느 작은 궁의 정원 같은 모습을 재연해 놓은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어딘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꽤 들었다. 개인적 성향의 차이겠지만 이곳은 쉼을 위한 정원, 사색을 위한 정원이라기보다는 구경을 위한 정원, 사진 찍기를 위한 정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다. 

(촬영 : 2009년 9월)

그런 정원이 풍경 끝에는 왠지 서양의 고대 양식을 따르는 꽤 그럴싸한 궁전이 작게나마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지만 여기에 그런 것은 없다. 서양 정원 입구에 있는 말리성의 문이라고 하는 건축물이 그나마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오히려 한 옆으로 작은(사실 그리 작지도 않다) 집 한 채가 있다. 그린하우스라고 불리는 곳인데 마치 스위스 정도쯤에 있을 것 같은 건물이다. 지붕의 각도 크고 아치형의 창문에 빨간색 창틀이 그런 느낌을 준다. 이곳에는 휴게 공간과 함께 기프트숍이 자리 잡고 있다. 더운 여름에 방문했다면 이곳에서 잠깐 더위를 식힐 수 있겠다. 

(지금 현재는 이곳 서양식 정원은 새 단장을 위해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가을쯤 다시 오픈은 한다고 하니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기대해 볼 만하다. )

(촬영 : 2009년 9월)


꽃들의 축제가 펼쳐진다.

벽초지 입구를 지나면 바로 여왕의 정원이라는 곳이 나온다. 입구로 들어와서 바로 만날 수 있는 곳이기에 입장할 때 바로 볼 수도 있고 나올 때 천천히 살펴볼 수도 있다. 이곳은 계절별로 그 시기에 맞는 꽃들을 심어놓은 화분을 통해 봄부터 가을까지 꽃잔치로 오는 이들을 환영한다. 그렇기에 사실 입장 후 이곳을 외면하고 바로 한국식 정원으로 발길을 옮기기는 쉽지 않다. 

(촬영 : 2009년 9월)

벽초지는 계절마다 이런저런 축제를 연다. 봄꽃축제, 국화축제 등 꽃을 테마로 하는 축제도 물론 있다. 9월 말에 방문했을 때는 한창 국화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입구 바로 앞 여왕의 정원에 형형색색의 국화를 심어놓고 개화시기를 맞춰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봄에는 튤립을 포함한 여러 꽃들이 제 색과 향을 맘껏 뽐내기 위해 이곳으로 나선다. 겨울에는 빛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촬영 : 2009년 9월)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꽃 축제들 말고도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작은 풀꽃들이 저마다의 때를 맞춰 꽃을 피워내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자신의 때를 기다려 자연의 온도와 빛과 습도에 맞춰 꽃을 피워낼 때를 정확히 알고 피워내는 꽃들이 있다. 나무 밑 작은 수풀 속에서 피워내는 그 꽃들은 축제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그렇게 꽃을 피워낸다. 이 브런치의 다른 매거진에 올렸던 사진 역시 이곳에서 발견한 꽃이었다. (https://brunch.co.kr/@tolbaram77/63)


(촬영 : 2016년 5월)
벽초지의 풀꽃들 (촬영 : 2008년 3월)





벽초지 수목원은 꽤 괜찮은 곳이었다. 입장료가 만만치 않지만 충분히 둘러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테마 정원이 각각의 매력을 물씬 드러내고 있으며 자신의 취향껏 충분히 즐겨볼 만한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식 정원은 그 안에 푹 빠져 마치 내가 정원의 일부가 되듯 녹아들 수 있었고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비워내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수목원이 아닌, 그냥 숲이 아닌 사람을 차분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또 많이 업그레이드되어 바뀐 것들도 꽤 있고 더 좋아진 부분도 많겠지만 오히려 한국식 정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매력을 축적해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촬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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