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차를 떠나보내며 …
기어이 보내고 말았다.
이제 겨우 15살, 정확히는 14년에 5달을 살아온 차를 기어이 떠나보내고 말았다.
아직은 주행거리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차를 타고 다니며 큰 문제도 없어서 주행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차였다. 속도도 잘 나오고 이런저런 부품들도 제때에 다 교체를 해주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직까지는 멀쩡하고 너무나도 젊은 차였다.
문제는 매연이었다. 경유차의 한계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새 차를 받은 그 해에 나온 경유차들 중에서도 유독 매연이 많이 나오는 차종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싼타페였다. 차 나이가 7~8세가 되면서부터 2년 주기로 찾아오는 자동차 검사에서 걸핏하면 배기가스 문제로 말썽을 부렸다. 그러다 한 번 불합격 판정을 받아 정비를 받기도 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 자동차 검사 시기만 되면 긴장도와 스트레스 수치가 솟구쳤다.
이별의 계기가 생겼다.
그러다 올해 초 새로운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노후경유차 조기폐차 지원금 제도가 올해부터 대상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이었다. 10년 이상된 노후 경유차 중 5등급 판정을 받은 차량에 대해 지원해주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DPF를 설치하지 않은 4등급 차량도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딱 내 차에 맞는 조건이었다.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내 직장에서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잠정 중단했던 차량 5부제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더해졌다. 마음이 더욱 움직였다. 이 기회에 친환경 차량으로 바꾸면 지원금을 받고 차를 바꿀 수도 있고 차량 5부제에서도 예외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쳤다. 무엇보다 2년마다 찾아오는 자동차검사의 악몽 같은 스트레스도 이제 끝낼 수 있었다.
결국 이별을 선택했다.
고심 끝에 올해 6월 결단을 했다. 신차를 구입하기로 마음먹고 계약을 했다. 딜러는 차량 생산이 밀려 새 차는 내년 4월에나 나온다고 했다. 싼타페도 조기폐차 지원금 대상이 맞다고 확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3주 전쯤, 계약 후 별 소식이 없던 딜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말쯤 새 차가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직 조기폐차 지원금이 남았으니 서둘러 절차를 밟고 폐차를 진행시켜야 하니 차량등록증을 사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도 또 며칠 뒤 조기 폐차가 확정되었으니 차에 있는 모든 짐을 정리해 두면 다음날 탁송기사가 차를 가져갈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내년 4월에야 새 차가 나온다고 해서 올 겨울까지는 이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진척되면서 무언가 조급해지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다.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차에 있던 짐을 모두 정리했다. 아직 쓸만한 차량 용품들은 같은 차종을 갖고 있는 동료에게 넘겨주었고, 트렁크나 콘솔박스에 오랜 시간 동안 묵혀있던 물건들은 과감히 버렸다. 그러고도 남은 소소한 몇 가지는 종이백에 넣어 따로 두었다. 차는 이제 이 차가 처음 내게 왔을 때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음날 그런 차를 끌고 마지막 출근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약속대로 탁송기사가 왔다. 차량 상태를 기록하느라 몇 장의 사진을 찍던 그가 나에게도 사진을 좀 찍어두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불현듯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멀찍이 서서 차의 전경이 담기도록 사진을 한 장 남겼다. '사진은 또 왜 이렇게 이쁘게 나왔는지...'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차를 바라보았고 이별하기에는 아직 너무 좋은 상태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리고는 더 생각할 새도 없이 탁송 기사는 차 키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차를 타고 사라졌다. 형용할 수 없는 헛헛한 기운을 안은 채 주차장을 걸어 나왔다.
뜻밖의 일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날이 멀지 않았음도 직감하고 있었다. 심지어 구체적인 시기마저 예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갑자기 당겨지면서 싼타페와의 이별은 갑작스런 일이 되었고 뜻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이별을 맞이하는 짧은 순간에 참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만남이 시작될 때의 설렘과 그 시작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첫 장면으로 해서 가족들을 병원으로 공항으로 태워다 주며 느꼈던 많은 감정과 생각들,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좋은 곳을 향해 달리던 장면들, 서늘한 바람을 맞으려 썬루프를 열고 음악을 틀어둔 채 딱히 정해지지 않은 사진 촬영지를 향해 홀로 나서던 장면들, 농사용 짐을 잔뜩 싣고 텃밭을 다니면서 "이거 경운기인 것 같아."라고 하며 동료 텃밭러들과 웃던 장면들, 2열 시트를 접어 평탄화를 해놓고 거기에 드러누워 쏟아지는 밤별들과 함께 잠들었던 장면들, 낯선 곳에 주차하다가 뒷 범퍼 아래를 찌그러트렸던 장면, 우회전을 하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있는지 확인하느라 앞의 벤츠를 못 보고 들이박고 놀라고 엄청난 수리비가 나오는 걸 보며 또 한 번 놀랐던 기억들, 그리고 올해 6월 자동차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쩔쩔매다가 네 번의 시도 끝에 겨우 통과하고 검사소 직원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까지 ……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지가 않았다.
사실 차를 처음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새 차로 바꾸려는 결심을 하면서 그리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원래 준비되었던 시간이 갑자기 단축되어 그랬는지 무언가 몽글몽글 가슴속으로 피어오르고 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한용운 시인이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라고 표현했던 그 시 구절 하나하나가 새삼스레 마음속에 와서 박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찌, 어느 이별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으랴.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게 어찌 사람에만 해당되는 말일까.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같은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수많은 기억들이 서로에게 새겨졌다면 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무렇지 않은 이별이 될 수는 없다. 함께 했던 그 차는 이미 떠났지만 함께 했던 기억들은 차마 떠나지 않음에서 생기는 감정 탓에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다시!! 한용운 시인은 그의 시 '님의 침묵'의 마지막에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을 남겼나 보다.
다시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만남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어느 순간 이별을 생각하게 되고. 그 이별을 위한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명분으로 삼고, 상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 혼자 이별을 준비하고, 때가 되면 결심하고 이별을 하는…….
아무리 준비해 봐도 이별은 결코 가벼울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애써 이별을 준비해 봐도 결국은 소용없는 일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