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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Nov 01. 2023

푸른 태양을 본 적 있나요?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푸른 태양을 만나다.

2016년 쿠바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직항이 없어 캐나다를 거쳐 가야 했다. 그 캐나다 토론토행 비행기를 타고 북극을 지날 때였다. 이 이야기는 쿠바 여행기(아래 참고)에서 자세히 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은  분명 밤의 시간이었으나 그 겨울의 밤하늘로 태양이 숨었다 나타났다를 하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태양이 푸른색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오던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비한 경험이었다. 지구에서 태양의 저런 푸른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롭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간 내가 보았던 태양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푸른 태양의 경험이 담긴 쿠바 여행기 ↓↓↓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항상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 살아오면서 우리의 경험으로 축적된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이것은 진리다.'라는 귀납적 추론의 결론을 내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된 진리를 통해 이 세계를 판단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교류한다. 하지만 그 진리라는 것들은 새로운 발견과 경험을 통해 진리가 아니었음이 증명되기도 한다. 천동설을 비롯한 몇몇 물리 법칙이 그런 과정을 거친 위대한 과학자들에 의해 결론이 뒤바뀌었다. 우리는 그런 엄청난 연구를 하는 과학자도 아닐진대, 아무것도 아닌 나 하나가 경험한 세계를 가지고 세상의 것들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옳지 않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려고 한다.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은 새로운 상황이나 새로운 사람에 의해서 늘 다른 결론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푸른 태양의 경험도 그런 나의 생각을 더욱 지지해주는 근거가 되었다.


터널비전(tunnel vision)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심리학에서도 자주 쓰는 말로 우리말로는 '터널 시야'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주변이 보이지 않게 되어 오직 한 방향만 보는 현상을 말한다. 마치 터널을 지날 때 우리의 시야가 터널 안으로 제한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푸른 태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터널 시야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운이 좋아야만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푸른 태양을 모른다고 해서 터널 시야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도 없다. 그 개념은 이럴 때 쓰는 개념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순간이 되면 너무나도 좁은 시야를 가진 편협한 인간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본 것만이 옳고 그래서 내 판단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스스로 터널에 가둘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시야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스스로 정신의 터널에 매몰되어 있어 빠져나올 곳 하나만을 바라보듯 정답도 오로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내 안의 잘못된 믿음이 없는지 늘 반추하면서 섣불리 결론이나 정답이라고 단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변에는 이러지 못하고 정신의 터널에 갇힌 채 가지가 본 것, 자기가 경험한 세계,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만이 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확증 편향이 거의 신념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에게 푸른 태양을 본 적이 있다고 하면 단박에 '그런 태양은 없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내 평생 그런 건 본 적이 없다. 사기치고 있네.' 이런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희귀한 경험을 한 사람들, 혹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의견은 이렇게 묵살되곤 한다. 이런 일은 종종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꼰대라는 평을 듣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또는 계층 간의 갈등, 직위 간의 갈등으로도 이어진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심리학에서는 터널 비전의 원인을 생존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의 생존 욕구는 먹고사는 문제가 담긴 본적인 생존 욕구에 대한 본능은 아닌 것 같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생존 욕구일 듯하다. 나의 살아온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부정되거나, 나의 그동안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신념이나 가치와 다른 생각을 만나게 되면 스스로에 대한 방어기제가 먼저 작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칫 내가 부정당하거나 나 자신이 옳지 않다고 평가되는 식의 느낌을 받게 되면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평가절하되고 경쟁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거기서 오는 생존 본능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니… 

그러니까 차라리 쿨하게 인정을 해버리는 것이 어떨까 싶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세계와 다른 생각이 있음을 깔끔하게 인정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자칫 터널 비전으로 인한 맹신이 힘이나 권력과 결합하게 되면 강압이나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른바 꼰대라고 불릴 만한 나이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 것도 좋지만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새로운 것들을 인정하려는 모습이 더 매력적이다. 내가 지나온 길에 펼쳐진 세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설령 다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걸 우리가 다 인식할 수도 없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사회적 생존은 어우러짐에서 이루어진다. 소신과 맹신은 다르다.

명심하자. 터널에서 사고가 나면 일반도로보다 더 심각하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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