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늦은 저녁, 소리도 없이 소복히 함박눈이 서울에 내렸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지 눈이 내리면 마냥 좋다. 이런 저런 추억과 사람과 공간들이 자꾸 떠오르게 된다. 그 중 제주의 눈 풍경도 종종 떠오르곤 한다.
서울에 사는 제주 사람, 혹은 제주 출신 서울 사람인 나는 명절이면 고향을 찾아간다. 그곳 제주에도 눈이 꽤 자주 내린다. 물론 쌓인 눈이 쉽게 녹아 오랫동안 그 풍경이 유지되지는 않지만, 한번 내리면 펑펑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소복하게 쌓인 눈 풍경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어느 해 설 연휴였다.
겨울을 통상적으로 12월부터 2월까지라고 하지만 제주는 이미 그 석달의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 봄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동백꽃, 유채꽃 등 꽃들이 피어나며 이곳이 따뜻한 남쪽 나라임을 증명한다. 그러다 어느날 느닷없이 함박눈이 밤새 내려 세상을 하얗게 바꿔 놓기도 한다. 그해 설에도 그랬다. 친척, 이웃들에게 세배를 가기 위해 차를 끌고 나갈 수도 없을 만큼 눈이 많이 왔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은 하얗게 바뀌어 있었고 도로에는 스노우 체인을 묶은 버스나 SUV 차량 몇 대만 겨우 다니고 있었다. 오전에 집에서 차례를 지내두고 오후에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나섰다. 사진 실력이 별로 없었던 때라 눈 사진을 찍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작정 나섰던 길이었다.
눈 속에 묻힌 봄풍경을 만났다.
새벽눈으로 온통 새햐얗게 바뀐 세상, 그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봄을 준비하던 풍경들이 하이얀 풍경 속에 숨어있는 듯 묻혀 있었다. 검붉은 색이 아니라 이제 갓 피어난 듯 맑고 선명한 붉은 색을 띠는 동백꽃이 반쯤은 눈을 뒤집어 쓴 채 빼꼼히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겨울에 피기 시작해 봄까지 이어지는 동백꽃은 향기가 없다. 묵묵히 추위를 견디며 오로지 색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결국은 봄을 이끌어 온다. 그런 동백꽃이 흰눈에 감싸 안긴 채로 붉은 빛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눈이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어쩌면 흰 눈의 색에 대비되어 더 그래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꽃의 색깔이 전에 없이 더 맑고 밝고 투명한 붉은 색이었다. 불현듯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 눈의 차가움이 이 꽃을 괴롭혀 동해(凍害)를 입히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결국 꽃잎이 상하고 색이 탁해지며 말라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지금의 이 아름다운 대비가 단 몇 시간 혹은 며칠만에 사라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더 서둘러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다.
이내 사그러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차가운 눈이 봄꽃에 해를 입히는 것 또한 순리가 아닐까 싶었고 그렇게 한들 동백나무가 꽃들을 계속해서 피워내지 않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동백은 한창 봄기운이 만연하는 4월까지도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지금 사진에 담은 저 꽃이 설령 동해를 입어 진다고 해도 다른 꽃망울들이 또 제 색을 피워낼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추위 속에서 수많은 시도와 좌절 끝에 결국은 봄이 오게 되는 것이니까. 봄이 온다고 잔뜩 설렜다가 다시 추위에 움츠려본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