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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옥 Nov 10. 2020

봉재의 정원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임봉재

"딸애라고 공부를 안 시키던 시절이었어요." 

어린 봉재는 ‘호롱불도 아깝다’며 꺼버리는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책을 품고 캄캄한 밖으로 나온다. 달빛 받은 밀대가 반짝인다. 어머니가 이웃집 농사일 해주고 품삯으로 받은 밀짚 더미에 푹 들어앉으니 밀대 빛에 글자가 어른거린다. 국어책에서는 영희와 철수가 뛰놀고, 산수책에서는 덧셈과 뺄셈이 힘겨루기를 한다. 봄밤을 달구는 달빛과 밀대 덕에 글과 셈을 익힐 수 있었던 어린 봉재는 일찌감치 안경을 써야했다. 

지난 봄, 텃밭에서 수확한 보리와 호밀을 갈무리해 원두막 지붕에 널으며 생전 처음 만져본 밀대는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것이 당장이라도 달빛을 내어줄 태세다.  

이제 내겐 ‘밀대’가 ‘봉재’다.   


광주에서 산청으로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인 임봉재 선생님이 사시는 경남 산청을 가기위해 여농기행팀이 모인 곳은 뜻밖에 광주였다. 가톨릭농촌여성회를 만들고 ‘농촌부녀’에서 ‘여성농민’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여성농민운동 대모大母 임봉재 선생님이 사는 곳이 부안이나 김제 어드메 인줄 알고 광주에 모인 일행에게 종옥언니는 "여기서 산청 한 시간 반 이면 가"라며 태연히 답한다. 

‘광주 5.18 40주년’에 참석 못해 영 마음이 불편하다던 남식언니는 하루 전날 내려와 광주항쟁 기념지를 돌아본 후 종옥언니 집 에서 하룻밤 자고 광주 학동 순댓국집에서 종옥언니 부부와 후발대를 맞이한다. 광주는 어딜 가나 맛 집인데 동네사람이 고른 순댓국집이니 맛이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해태타이거즈 야구선수들 신문기사로 도배를 한 순댓국집 구석방에서 그만큼 오래된 인연들이 소주잔을 부딪치며 임봉재 선생님 만나러 가는 길을 축복했다. 

광주만찬을 뒤로하고 종옥언니가 운전 하는 차를 타고 산청으로 향하는 길, 강천휴게소에 들러 멋진 모자 하나씩 둘러쓰고 하하호호깔깔 대며 두 팔 벌려 너른 품 내어 주는 산자락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뭉클한 지리산 동쪽에 자리한 산청에 들어서니 뜨거운 그리움들이 몽골대며 올라온다. 

산청군 입석에 자리한 중촌마을 회관을 지나 막다른 골목에 차를 댄다. 나무대문 활짝 열어젖힌 임봉재 선생님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스물예닐곱으로 돌아간 남식, 종옥, 성자

삼십 년 만에 반가운 포옹과 세월의 흔적을 주워 담는 인사들이 오가고 나무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꽃 마삭줄 덩쿨이 아치를 이룬 정원과 텃밭에서 뿜어내는 향기에 몸과 마음은 이미 황홀경이다. 마삭줄 옆에는 인동초, 백리향, 매발톱, 작약, 체리세이지, 제비꽃, 원추리들이 향기로 피어 연신 코를 벌렁 이게 한다. 향기와 풍경에 취한 우리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마리아상 옆에는 ‘타샤의 정원’을 일군 임봉재 선생님과 스물예닐곱으로 돌아간 남식, 종옥, 성자언니가 꽃처럼 피어난다. 

자연그대로 인 봉재씨가 지리산자락을 배경으로 쓰윽 들어서니 한편의 풍경화가 완성된다. 

여기는 ‘봉재의 정원’이다. 


솔숲을 품다


몇 년 전 퇴임하고 내려온 동생신부와 한울타리 두 집 살림을 하는 봉재씨는 20년 전 솔숲 하나 보고 산청 중촌마을로 내려왔다. 

봉재씨가 한눈에 반한 솔숲 옆에 세운 멋진 농막에서 동생 신부님이 삽겹살을 굽는 동안 ‘봉재의 정원’ 너머 ‘봉재의 부엌’을 너 댓 번 오가며 저녁상을 완성 했다. 파김치, 갓김치에 매실 장아찌며, 삶은 머위와 쌈 거리, 몇 년 묵은 지도 모를 매실주를 나르는 동안 마당 곳곳에 핀 카모마일, 세이지, 박하 향에 정신이 팔려 저녁상이 자꾸 늦어진다.

양파, 마늘 등 겨울작물들이 흙속에서 몸집을 불리는 동안 상추, 케일, 신선초들이 마음껏 초록을 뽐내고 소나무, 편백, 감나무, 석류나무에 둘러싸인 ‘봉재의 정원’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르다. 퇴임선물로 따라 왔다는 복실이는 동생 신부님 주변을 맴 돌더니 음식 나르는 봉재씨를 졸래졸래 따라다니기 바쁘다. 낯선 손님들에게까지 순한 눈빛을 내어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농민운동 한다고 속리산 어디쯤에 산다는 누나 집에 갔다가 눈이 한없이 온 덕에 갇혀 버렸어요. 다음날 미사를 봐야 해서 겨우 차를 몰아 내려왔는데, 그러고 나니 두 번은 못가겠더라고요. 그래서 고마 내려오라고 했죠." 능숙한 솜씨로 구원 낸 고기를 권하며 동생 신부님은 산청 마을에 정착하게 된 연유를 설명한다.

10남매 맏이인 누나가 평생 결혼도 안하고 농민운동 한다고 전국을 쫓아다니며 가난하게 사는 동안 동생 신부님은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가, 아버지는 늦깎이 가톨릭농민회원이 되었다. 

“풀만 무성했던 이 땅을 소개하는데 솔숲이 너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단박에 나 여기 살래요. 해버렸어요"

삶의 원천이었던 어머니가 1999년 두 번째 쓰러지자 봉재씨는 살고 있던 상주 집에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평생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살았던 어머니는 ‘산골집이 춥다’며 적응하지 못했다. 봉재씨에게도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려 했으나 페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동생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건강한 밥상이 한가득 차려졌다. made in 봉재

동생신부 소개로 내려온 중촌마을 소나무 숲에 매료당한 봉재씨는 두말없이 땅을 계약하고 집을 짓는다. 

"회장님 나 돈 없어요. 모자란 것은 나 죽으면 이 집 팔아서 보충하세요" 손에 쥔 돈이 넉넉할 리 없는 봉재씨는 땅과 집짓기를 주선한 성당 사목회장님께 떼를 썼고 회장님은 선선히 그 부탁을 받아주었다. 인복 많은 봉재씨다. 

상주 공동체마을에서 붙박이로 살려고 온 맘과 힘을 모아 지은 집에서 5년도 살지 못하고 산청으로 내려와야 했던 봉재씨는 한동안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가톨릭여성농민회(이하 가여농)에서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운동가로 유목민 같은 삶을 살다가 ‘농촌마을에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에 1995년 돈에 맞춰 알아본 200평짜리 땅은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30명의 주인에게 도장을 받아야 했다. 가격과 위치에 여러 사람이 덤볐다가 '30명 동의서' 문턱에서 포기한 덕에 찾아온 기회를 봉재씨는 놓치지 않았다. 법무사 도움 없이 1년 동안 30명 동의를 받아 땅을 사는데 성공한다. 땅 등기를 위해 찾아간 등기소에서 법무사를 통하라는 직원들을 사흘 품 들여 끈질기게 설득한 대목에서는 감탄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헌집에 빈방 하나를 빌려 지내면서 짓기 시작한 집은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공동체를 꿈꾸는 마을과 첫 집에 듬뿍 정을 들인 봉재씨는 엄마 때문에 이사를 해야 했지만 쉽게 정을 떼지 못했다. 

“집 잘 지었다고 집 산 사람한테 밥 얻어먹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얼마나 집을 잘 짓고 가꾸었던지 새로운 집주인은 감사전화도 부족해서 꼭 한번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잖아도 상주공동체의 그리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봉재씨는 초대에 응했고 그 후로 상주 산골집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몇 해 묵었을지 모를 알콜기 1도 없는 매실주 건배를 끝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봉재의 정원’을 건너 ‘봉재의 부엌’으로 빈 그릇들을 날랐다. 

붉게 타던 태양도 ‘봉재의 정원’을 물들이며 지리산 저편으로 들어가 버리고, 산청 중촌마을엔 봄밤이 까맣게 내려앉는다. 


잿물소녀, 봉재


1942년생인 봉재씨는 거제도 고현에서도 6km 더 들어간 두메산골 시골마을 양정에서 10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지금은 양정이 아파트촌으로 변했지만 6.25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들어선 곳이다. 조부모와 아버지 형제들로 대가족을 이루었던 봉재네는 거제도에 피난민이 넘쳐나자 아래채를 내 주고 제 집에서 비좁은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어린 봉재는 조부모 틈에 끼여 잠을 잤다. 동네 뒷쪽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서자 초등학교 3학년 때 봉재네는 거제 읍에서 3km 떨어진 외갓집 동네 명진 마을로 강제 소개 당한다. 

너나없이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던 때 어머니, 아버지가 남의 집 일을 하고 받아온 품삯은 보리쌀이나 땔감용 밀짚이었다. 목수였던 아버지가 가끔 돈을 받아오면 효자였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드렸고 할아버지 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나올 줄 몰랐다. 대식구 살림을 해야 하니 할아버지 주머니의 돈도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식구가 많았던 봉재네는 배급으로 나온 옥수수로 언감생심 빵 만들어 먹을 생각은 못하고 옥수수죽,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죽이라도 먹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칡뿌리껍질을 벗겨 씹거나 죽을 끓여 허기를 때운 보릿고개에는 형제자매들의 굳은 똥을 어머니가 꼬챙이로 파내기도 했다. 

전쟁으로 폭격당한 민중들의 삶은 어린 봉재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월사금을 못낸 아이들은 학교에서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지만 어린 봉재는 부모님께 월사금 달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월사금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줄 알면 "아이고 잘됐다. 애기나 봐라"고 할 판이니, 시치미를 뗀 체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며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 등교하는 모습을 시계 삼아 책보를 메고 학교로 내달렸다. 학교 안으로 발 들일 수 없었던 어린 봉재는 소나무 언덕에 몸을 숨긴 채 글을 읽고 덧셈, 뺄셈을 공부 하다 하교시간에 맞춰 집으로 내려왔다.

가다 말다를 밥 먹듯 하며 5학년을 보내고, 6학년을 맞이했다. 6학년 등교 첫날 어린 봉재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다. 6학년 2반으로 배정을 받고 보니 당시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낸 탓에 한 줄 밖에 안됐다. 6학년 2반 담임에 '김진호 선생님'이 호명되자 여자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영문을 모르는 봉재만 뻘쭘하게 서 있었다. 4학년 때 한반이었던 친구가 "봉재야, 앉아라" 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김진호 선생님이 호랑이라서 아이들이 기피한다는 것이었다. 5학년을 제대로 다니지 못해 김진호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봉재는 "나는 교실에서 공부만 할 수 있으면 호랑이라도 괜찮다"고 생각 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김진호 선생님이 "6학년 2반 교실로 들어가"라는 소리에 따라 들어간 여자아이는 봉재가 유일했다. 앉아서 울던 여자아이들도 할 수 없이 봉재를 따라 우르르 교실로 들어왔다. 

김진호 선생님은 분반별로 자리를 배치 한 뒤 시험성적대로 앉혔다. 시험을 본 뒤 아이들을 복도에 줄을 세우고 분반별로 아이들을 앉혔는데 남자아이들로 채워진 1분반에 봉재와 또 한명의 여자아이가 호명되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 구성된 1분반에 여자아이는 둘 뿐이었다. 교육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던 김진호 선생님 덕에 교실에서의 공부시간은 어린 봉재에겐 해방구이자 맘껏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공부시간이 끝나면 봉재는 왕따 신세였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몰려 들었던 거제도에는 전국에서 온 아이들로 학교가 북적였다. 서울이나 제법 도시에서 온 피난민들과 읍내 여자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차려 입었고 어린 봉재만 엄마가 잿물 들여 만들어 준 치마저고리에 머리도 집에서 제멋대로 자른 채였다. 저희들과 다른 입성을 한 잿물소녀 봉재가 감히 공부까지 잘하니 질투가 폭발한 아이들은 봉재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봉재에게 왕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치기어린 어린애들 놀이 같았다. 봉재의 능력과 재능을 담박에 알아챈 김진호 선생님이 학예발표회 때 봉재에게 발표를 맡기자 아이들의 시샘은 한껏 커졌다. 운동신경이 좋아 달리기까지 잘한 봉재는 운동회가 열리면 공책이며 연필을 싹쓸이했다. 잿물소녀 봉재의 재능은 아이들에게 따돌림의 이유일 뿐이었다. 

어린 봉재는 봉재씨가 되어서도 옷과 머리를 손수 지어입고 자른다. 왕따는 어린 봉재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자족하고 자급하는’ 기술을 빨리 익히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똥막걸리’와 아버지


어린시절 가족사진

3대째 카톨릭 집안의 맏이인 아버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귀했던 시절 봉재네 집은 공소로 사용되었다. 어린봉재는 어머니가 전해주는 성서이야기를 들으며 말을 배웠다. 전쟁고아가 많아지자 거제 본당 신부님들은 고아원을 짓기로 하고 목수였던 아버지에게 일을 맡겼다. 급할 때는 성년의 나이로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스무 살 무렵의 청년들이 일을 거들었다. 

태풍이 몰고 온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양철지붕을 얹던 아버지는 함께 일하던 청년일꾼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다가 3층 높이 지붕에서 떨어지면서 척추를 다친다.  

우악스럽게 내리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책이 젖을까봐 가슴에 책 보따리를 품은 채 집으로 내달리던 봉재는 마자루 가마 둘러쓰고 허둥대며 뛰어가는 할아버지와 마주친다. 

봉재가 "할아버지 어디가요?"라고 소리치니 멈춰선 할아버지가 다급히 소리친다 "봉재가? 퍼뜩 가자"며 어린 봉재를 몰아 도착한 곳은 돌파리 병원으로 소문난 읍내 김의원이었다. 사고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친척들까지 병원에 모여 "아버지 다 죽게 생겼다"며 한소리씩 하며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지만 태풍을 헤치고 통영으로 나갈 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신부님과 군수영감이 나서 어찌어찌 여객선에 아버지를 싣고 어른들은 통영병원으로 향했다. 어린 봉재는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며칠 전 아버지는 가만히 봉재를 불러 "봉재, 니 중학교 가고 싶나?" 물었다. 안 그래도 학교에서 중학교 갈 아이들을 모아 입시과외를 한다고 남아서 공부할 사람 손을 들으라고 했는데 봉재는 차마 들지 못했다. 학교 들어갈 남동생들이 줄줄이 있으니 부모님께 말씀 드려봐야 대답은 뻔했다. 봉재네 집안사정을 잘 아는 김진호 선생님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했고 아버지는 웬일로 봉재에게 중학교 갈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혼나거나 회초리 맞을 때 외에는 한 번도 아버지를 독대한 적이 없었던 어린 봉재는 당장 소리라도 치고 기뻐 날뛰고 싶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예"라는 한마디만 겨우 할 수 있었다. “내게도 이런 일이 있다니?" 며칠 동안 중학교에 갈 생각에 황홀한 시간을 보냈는데 아버지의 사고는 어린 봉재에게 한번 올까 말까한 행운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통영병원으로 옮겼지만 지붕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척주 뼈가 겹친 아버지를 수술할 방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른들이 달려들어 아버지의 상·하체를 잡아 늘어뜨려 겹친 척추를 뽑아 깁스를 한 것이 다였다. "평생 방바닥에 등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 말에 크게 낙담한 아버지는 식구들을 불러 병원에 돈쓰지 말고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때 차가 어디 있어요? 외삼촌이 야전침대 매트리스를 구해 소 구루마에 아버지를 태워 집까지 끌고 오셨어요."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뼈에 좋다’며 봉재와 남동생 똥을 막걸리에 걸러 낸 ‘똥막걸리’를 들이켰고 엄마는 마늘 한통을 입에 넣어주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에 똥독 올라가며 걸러준 지독한 ‘똥막걸리’를 한 달 간 복용한 끝에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 있었다. 하느님의 은총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평생 누워 지낼 것이라던 서양의학의 예견을 이긴 민간요법의 승리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똥막걸리’에 의지해 다친 허리를 치료하려다 결국 굽은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ㄷ자로 굽어진 허리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하늘 한번 시원하게 보지 못했다. 

아버지 사고소식을 들었는지 김진호 선생님은 반장, 부반장을 앞세워 봉재를 찾아와 돈 걱정 말고 졸업장을 받아가라고 했다. 며칠 후 어린 봉재는 거제초등학교 46회 졸업생이 되어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장학금을 염두에 둔 김진호 선생님이 중학교 시험을 권했지만 남동생 생각에 봉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다음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남동생 담임을 맡은 김진호 선생님이 제안한 중학교 편입시험도 봉재는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 다음해까지 끈질기게 시험을 권하는 선생님 성의를 봐서 시험도 보고 합격도 했지만 중학교는 남동생들에게 양보하고 엄마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집안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어린 봉재에게 초등학교 졸업장을 안겨준 김진호 선생님은 거제도에 살 때 몇 번 뵈었지만 농민운동 한다고 바삐 살다 1980년대 말 뒤늦게 찾아보니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호랑이 김진호 선생님은 어린 봉재에게 다시없을 은인이셨다. 

인덕 많은 봉재씨다. 


어머니와 수녀원


초등학교를 졸업한 봉재씨는 아버지 사고 후 외갓집이 있는 명진에서 거제읍 성당 앞으로 다시 이사 한다. 성당 소유 논 8마지기 소작을 얻게 된 봉재씨는 엄마와 동네품앗이를 하며 억척스레 농사를 지었다. 모내기철이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날 쪄놓은 모로 모내기를 하고 다시 저녁때 모 쪄놓기를 반복하며 온 동네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손톱은 자랄 새가 없었고 손끝에서는 피가 났다. 

우연히 눈이 간 봉재씨의 손은 농사일로 잔뼈가 굵기도 했지만 류마티스로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있었다. 평생 농사에 바친 손이라고 치켜 올리기엔 봉재씨가 감당해야 했던 세월의 몫이 너무 커 '봉재씨의 손'에 그만 숙연해진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와 집안일을 맡아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 들지 않았다. 천주교집안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인 봉재씨는 수녀가 되면 공부도 하고 집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봉재 니는 목소리가 좋으니 오르겐을 배워라. 노래하고 오르겐을 치면 수녀원 어린이집 같은데서 할 일이 있다."

먼저 수녀원으로 향한 동네언니 말을 떠올린 봉재씨는 밤이면 초를 들고 성당으로 향했다. 잘 놀고 있는 동생 꼬집어 울린 뒤 둘러업고 아이 본다는 핑계로 성당에 가서 오르겐을 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칠판에 악보를 그리고 음악수업을 했던 김진호 선생님 덕분에 악보를 읽을 수 있었던 봉재씨는 음악시간이나 되어야 만져볼 수 있었던 풍금 치던 기억을 되살려 더듬더듬 오르겐을 익혔다. 소문이 났던지 성당에서 오르겐 치시던 분이 봉재씨에게 오르겐을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저음의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노래에도 소질이 있던 봉재씨는 빠르게 오르겐을 배웠고 1950년대 말 쉽게 접할 수 없던 음악의 세계를 만난다. 

오르겐을 치고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자 부산 분도수녀원 수녀님이 대청동성당 유치원을 소개하며 봉재씨에게 중학교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기뻐 소리라도 쳐야 할 봉재씨는 중학교 가는 것은 좋은데 만약 나중에 수녀가 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니 같이 살지 않기 위해 수녀가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아직 어찌될지 모르는 운명 앞에 봉재씨는 신중하고 솔직했다.


수녀원, 배움을 달다.


'나같이 가난한 아이들'에게로  늘 마음이 향했던 수녀원시절

18살 되던 해 선을 보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졌다. 1960년의 일이니 그때만 해도 선을 본다는 것은 집안끼리 혼인이 결정되었고 결혼날짜를 잡는다는 의미였다. 당시 성당 사목회장을 맡고 있던 아버지는 성당에서도 성격이 불같은 호랑이로 소문났다. '선' 보라는 이야기에 봉재씨는 옆집에 살던 정교회장(결혼하지 않고 성당 일을 하는 여성)님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에게도 말 못한 수녀의 꿈을 털어놓으며 '선' 보는 것을 막아달라고 회장님께 매달렸다. 

"나는 느그 아버지 무서워서 못한다"고 손사래 치던 회장님도 계속되는 봉재씨의 호소에 할 수 없이 조카신부가 있는 대구로 봉재씨를 피신시킨다. 1960년 4월 새벽같이 집을 나선 봉재씨는 ‘선’을 피해 도망간 대구에서 4.19혁명을 맞이한다. 지금도 대구 남산동 파출소 앞을 지나던 데모대의 물결이 선하게 떠오른다. 

정교회장님 조카 집에 머물던 봉재씨는 호랑이 같던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3개월 만에 집으로 내려온다. 엄마는 10남매의 막내 동생 아들을 낳았고 아버지는 동생들을 돌 볼 봉재씨가 필요했다.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 엄마는 아들을 다섯이나 낳고도 기가 죽어지냈다. 맏딸 봉재씨를 낳고 바로 이어 아들 셋을 낳았지만 첫째, 둘째아들이 어릴 때 죽어, 셋째, 넷째 아들 다음에 태어난 딸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엄마는 딸을 낳고 혼자 탯줄을 자른 채 밭에 나가 일을 했다. 물론 그 후로도 아들들을 낳았지만 여동생을 낳을 때마다 어머니는 죄인같이 굴었고 할머니의 구박은 더해졌다. 어린 여동생들이 깔깔대며 마당을 뛰 놀면 할머니는 "지집아들이 시끄럽게 논다"고 소리 쳤고 어머니도 덩달아 부지깽이를 들고 여동생들 입단속에 바빴다. 보다 못한 봉재씨가 "할머니는 어릴 때 지집아 아니었나?"고 항의하니 할머니는 "저 지집아 하는 소리 봐라"며 기가 차 했다. 엄마한테 붙들려 부지깽이로 죽지 않을 만큼 맞았지만 어린 봉재씨는 오히려 시원했다. 

봉재씨는 아들을 많이 낳고도 딸을 낳을 때마다 죄인이 되는 여성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니처럼 살기 싫었고 결혼 말고 집을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며 수녀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수녀원을 가려고 해도 대부분의 수녀원에서는 적어도 중학교 졸업장과 지참금 5만원을 요구했다. 졸업장도 지참금도 없었던 봉재씨에게 성심수녀원 모집공고는 한줄기 빛이었다. 

21살 때 성당 신부님께 성심수녀원에 가고 싶다고 추천서를 써 달라고 말씀 드리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봉재씨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 쓰고 새벽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나가 하루 종일 완행열차에 시달리며 서울수녀원에 도착한다. 

봉재씨는 성심수도원에서 1년쯤 살면서 수녀원내에서의 차별을 느끼며 갈등하기 시작한다. 

"수녀원을 택한 것은 결혼을 피해 집을 벗어난다는 것도 있었지만 나같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 였어요" 

수녀원은 대학졸업장을 기준으로 ‘마더’와 ‘시스터’로 신분이 나눠졌다. 마더와 시스터는 수녀복으로 한눈에 구별이 가능했고 할 수 있는 일도 달랐다. 남녀차별을 피해 들어온 수녀원에서 계급차별을 느낀 봉재씨는 "잘난 여자들 뒷바라지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싶어 수녀원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뿌리치고 들어온 수녀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차에 '회개와 쇄신'을 주제로 1962년 10월부터 1965년 12월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내 차별을 없애는 교회개혁을 결의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계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와 사목문제를 협의·결정하기 위해 100년에 한번 씩 열리는 공식회의로 교황바오로 23세에 의해 소집됐다. ‘전례의 변화, 타종교와의 연대, 세상 속으로’ 등 시대변화를 담으려 노력한 바티칸공의회는 봉재씨가 수녀원에서 느꼈던 계급과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교회로의 변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마더와 시스터로 구별되었던 수녀들의 복장도 단촐 하게 통일했다. 공부를 마치지 못한 수녀들은 공부를 더 시키기로 하고 아직 수녀서원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바티칸공의회가 열리던 해 봉재씨는 일본수녀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마음 못 잡고 땡깡(?) 부리던 봉재씨를 성심수녀원에서는 일본으로 보낸 것이다. 원장수녀님은 봉재씨에게 바티칸공의회 결정사항을 알려주면서 수녀원에 남아서 더 공부할 것을 제안했다. 수녀원에서는 총기 있고 똑똑한 봉재씨가 공부를 마치고 수녀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삐딱 선을 탄 봉재씨가 "이제 공부를 해서 뭘 하지?" 하는 생각과 평생 수녀원에서 살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갈 즈음 손에 잡히는 대로 '가톨릭 성인전'을 집어 들었다. 책속에는 스페인 무사였던 '이나시오 로율라' 성인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상이군인이 된 이나시오 로욜라는 현실에 괴로워하며 하느님을 부정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성서를 보고 성령을 입은 이나시오가 33세에 중학교에 들어가 성인이 되는 과정을 쭉 따라 읽었다. "운명처럼 이나시오 로욜라 성인을 만나면서 내가 참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봉재씨는 하느님이 주신 기회를 거역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한다.  

성심학교에서 중1 과정을 마친 봉재씨는 월반해서 중3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고1 과정 학생이 부족하자 성심학교 선생님들은 봉재씨 진학문제로 고심했다. 성심학교는 다른 수녀원에까지 학생모집 공고를 냈고 몰려온 수녀들로 고1 과정을 편성 할 수 있었다. 성심중학교 음악교사가 결근이라도 하면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봉재씨에게 음악수업을 맡길 만큼 봉재씨는 수녀원의 기대와 지원을 한껏 받았다. 

수녀원의 기대와는 달리 봉재씨는 성심학교에서 공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고향에 있는 '나처럼 가난한 아이들' 생각에 괴로웠다. 수녀원에서 오히려 쫓아내주기를 바라면서 문제를 일으켜 보지만 봉재씨를 지키고 싶었던 수녀원에서는 또다시 일본으로 보낸다. 

다시 찾아간 곳은 후지산 근처 시즈오카현에 있는 '수녀수련소'였다. 일본에서도 "부러울 것 없는 아이들이 오는 성심학교에서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 이어지던 차에 둘째 남동생이 대구에서 교통사고로 입원 했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동생은 편지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는 형이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봉재씨는 바로 한국행을 결심한다. 미국인이었던 관구장(한국, 일본 교구를 관장하는 역할)까지 나서 봉재씨의 한국행을 말렸지만 "성서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부모형제가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생각합니다"며 한국으로 돌아온다. 

동생 등록금이 급했던 봉재씨는 한국에 돌아와 외국인 아이들 돌보는 일을 했지만 역시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얼마안가 일을 그만둔다. 수녀원의 도움으로 동생 학비를 마련한 봉재씨는 남은 학업을 마치기로 하고 성심학교 급사 일을 하면서 고3 과정을 마친다. 

드디어 27살 봉재씨 손에 고등학교 졸업장이 쥐어진다.   


필리핀, 신용협동조합을 만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봉재씨는 전문대학이라도 가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1968년 고향 거제도로 내려온다. 마침 같은 수녀원에 있다가 나와서 결혼한 친구 남편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거제고등공민학교를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1969년 음악교사로 합류한다. 말이 음악교사였지 영어, 가정까지 할 수 있는 과목을 다 맡아야 했다. 자신같이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꺼이 즐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 집을 방문해서 엄마들을 만나보면 꼭 우리 집, 우리 엄마 같았어요" 

수녀원 시절 마음은 항상 고향 거제로 향했고 머리는 "나 같은 아이들"로 꽉 차 있었던 봉재씨는 70여명의 1학년 학생들 담임으로 열정을 다했다. 학비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서무담당 선생님에게 "내 반 아이들은 혼내거나 집에 돌려보내지 말라"며 적은 월급을 털어 학비를 대납하며 아이들을 지켰다. 어린 봉재를 지키고 싶어했던 김진호 선생님처럼 말이다. 

2년간 담임을 하고 3년째 되던 해에 성심수녀원에서 같이 지냈던 손인숙 수녀가 방문한다. 노동·도시빈민 등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는 손 수녀님은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는 세이비어대학 부속연구소 씨어솔린에서 운영하는 동남아시아지역 농촌사회 지도자들 재교육과정에 다녀왔다며 봉재씨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나는 거제도를 떠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어요. 여동생 둘도 학교에 데리고 있었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보람 있었구요" 

그러나 결국 봉재씨는 떠밀리듯 1972년 필리핀으로 떠난다. 

등 떠 밀려 간 필리핀에서 봉재씨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만나면서 거제도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 가난한 농촌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든든한 지역공동체의 역할을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커지자 봉재씨는 “한국에 돌아가면 거제도에 신협을 만들겠다”는 꿈을 꾼다. 

한국 신협사례를 중심으로 논문을 쓰려던 봉재씨가 마땅한 자료가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 마침 한국에서 임진창교수가 교환교수로 씨어솔린에 온다. 봉재씨는 임교수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논문 쓸 자료가 없다고 하자 임교수는 크게 반가워하며 한국에 돌아가면 필요한 자료를 보내주겠다며 한국에 돌아오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임교수가 보내준 자료로 논문을 쓰고 무사히 씨오솔린을 졸업한 봉재씨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고맙다고 전화를 하자 공항까지 마중 나온 임교수는 동교동에 있는 협동조합연구원으로 차를 몰았다. 


다시, 거제도


1973년 한국으로 돌아온 봉재씨는 협동조합연구원(이하 연구원)에서 박희섭 원장과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을 만난다. 한평생을 협동조합운동에 바친 박희섭원장은 거제도 출신으로 봉재씨의 출현을 유독 반겼다. 

거제도에 협동조합연구원 지부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어, 잘 됐다며 협동교육연구원 거제도 지부에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고, 봉재씨는 거제도 지부에서 집체교육과 마을단위 신협교육을 맡아 진행했다. 

협동조합연구원에서는 협동조합운동(소비자, 의료 등)에 관한 전반적인 교육을 하고 있었다. 

초기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배우러 전국에서 온 사람들은 지역에서 공동체를 일구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봉재씨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1975년부터 신협직원 채용이 공채로 전환되면서 사명감을 가진 신협 운동가 보다 직장으로 신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협 운동에 회의를 느끼던 봉재씨는 서울본부 교육활동을 접고 거제도 지부 신협 활동에 힘을 쏟았다.  

협동조합연구원의 멋쟁이 봉재씨

거제도에서 마을단위 신협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새로 생긴 조합 회계를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를 졸업한 여자아이들에게 맡기고 신협 복식부기를 가르쳤다. 그러나 복식부기와 실무를 몸에 익힐 만 하면 보수와 업무환경이 더 좋은 직장을 구해 떠났다. 새로 사람을 뽑아 훈련시켜봐도 마찬가지 여서 결혼해서 마을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교육시켜 회계를 맡겨보았다. 그러나 월말에 점검 가서 회계장부를 달라고 하면 출납기록은 오간데 없고 오직 입으로만 한달간 들고 난 출납액을 줄줄이 토해낸다. 

반복되는 현실 앞에 한계를 느낀 봉재씨는 마을로 돌아다니며 교육하는 것보다 자신이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농촌탁아운동을 고민한다. 봉재씨의 고민을 들은 협동조합연구원 사람들은 유치원 교사 자격증 취득을 권했고 마침 열리는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부속연구소 깔멜 교육과정에 다녀올 것을 제안한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나뉘어 진행 되는 교육과정에 유치원코스가 있다는 말에 솔깃해진 봉재씨는 이스라엘 행을 결심한다. 

이란 테헤란에서 주1회 이스라엘 가는 비행기에 맞춰 준비 했다. 당시에는 외국 나갈 때 한사람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이 100달러였다. 

‘거제석유비축기지반대운동’ 전력으로 여권발급부터 쉽지 않았던 '이스라엘행'은 도착하기까지 고생길이었다. 

이스라엘 가면 사진과 슬라이드를 많이 찍어오라는 동료의 부탁에 경유지인 홍콩에서 슬라이드 필름을 사느라 환전한 돈의 절반 이상을 써 버렸다. 그런데 홍콩에서 하룻밤 자고 떠난다던 비행기가 고장으로 하루 더 홍콩에서 묵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게 예정에서 하루를 더 홍콩에서 묵고 테헤란에 도착했으나 이스라엘 가는 비행기가 3일 후에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3일 묵을 호텍방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공항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Evin호텔에 방이 하나 있다 하여 밤중에 택시타고 찾아가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 봉재씨는 ‘하루 숙박비가 60달러’라는 호텔 직원 말에 깜짝 놀란다.  

"지금도 Evin 호텔이름을 잊지 못해요. 가진 돈이 40달러밖에 없는데 하루 호텔방이 60달러라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호텔에 사정이야기를 하고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받아서 겨우 연락을 하니 대사관 직원은 도울 방법이 없다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멍해진 봉재씨는 공항 갈 택시비만 남기고 가진 돈을 다 주고 공항에서 노숙할 생각으로 짐을 빼는데 호텔 직원이 다급히 부른다. "프론트에 가보니 방을 예약한 사우디아라비아 남자가 서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미안하다며 방을 빼주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이 자신은 어젯밤 친구 집에서 잤고 지금도 그럴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방을 쓰라고 하는 거예요." 한국대사관에서 뺨맞고 얼얼해져 있는데 인연 한 점 없는 외국인에게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인복 많은 봉재씨는 이역만리에서 또 한 번 이렇게 위기를 넘긴다.  

하얗게 눈이 내리던 11월 Evin호텔 끝내주는 전망을 보며 이틀 잠자리는 해결했지만, 수중에 돈이 없던 봉재씨는 호텔방 수돗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허기진 채 비행기에 오른 봉재씨는 기내식으로 제공된 콜라를 허겁지겁 마셨다가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 기억에 봉재씨는 지금까지도 콜라,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를 입에 대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까멜에 도착했지만 여권발급 지연과 비행기 고장까지 겹쳐 늦게 도착한 탓에 유치원과정은 이미 정원이 차버렸다. 

영어로 진행하는 과목 중 지역사회개발과목은 수강이 가능하다는 말에 겨우 수강신청을 하고 8개월간 지역사회개발 과목을 공부했다. 유치원교사 자격증은 놓쳤지만 거제도에서 지역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봉재씨에게 오히려 맞춤한 과목이었다. 

이스라엘에서 8개월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봉재씨의 농촌과 지역, 교육에 대한 그림과 희망은 더욱 커졌다. 


농촌부녀에서 여성농민으로  


여성농민이 미래다.

1976년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봉재씨에게 손인숙 수녀는 "너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이라며 수원교구 공소에게 활동하던 엄영애씨를 소개한다. 

이스라엘에서 방금 도착한 만큼 지역사회운동에 열의가 팽팽했던 봉재씨는 엄영애씨, 손수녀와 "쇳불도 단김에 빼자"며 ‘농촌부녀’활동을 모색한다.  

세 사람은 농촌부녀들을 모집하기 위해 우선 홍보물을 내기로 하고 최초의 여성농민 소식지 '농촌부녀 1호'를 발간한다. ‘농촌에서 온 편지’ 같은 내용들로 채워 낸 소식지는 세 사람 이름으로 3호까지 나왔고 이후 가톨릭 농촌여성조직의 대표 소식지가 된다.

봉재씨는 겸업하던 협동교육연구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성들을 교육했다. 작은 방에 옹기종기 엄마들을 모아놓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면 엄마들은 눈을 반짝이며 응대했다. 전국교육을 하면 여성농민운동에 뜻은 있지만 가톨릭신자가 아닌 여성들도 찾아왔다. 정신없이 전국을 다니며 교육한지 1년도 채 안된 1977년 1월 14일 경기도 발안천주교회 교육원에서 한국가톨릭농촌여성회를 결성했다. 1대회장에 김영자씨가 선출되었고 2년 후 봉재씨는 2대회장을 맡는다. 

가톨릭농촌여성회 교육은 전국교육, 지역교육, 마을교육으로 나눠 진행되었는데 전국교육은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참가자들과 세미나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은 지역으로 내려가 지역교육의 주체가 되었다. 마을교육 또한 강사를 제외하고는 마을회원들이 준비하고 주관하며 지역여성들의 역량을 키우는 장이 되었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진행된 가여농 초기 여성농민교육은 ‘농촌문제의 원인과 과제, 농촌여성문제, 농촌여성운동사, 협동 활동사례, 농촌여성 건강문제, 가정간호법, 노래와 놀이, 가톨릭농촌여성 활동방향’ 등 여성농민문제의 본질과 운동의 필요성부터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정보까지 여성 밀착형 교육으로 손색없었다.

봉재씨와 엄영애, 손수녀 3인방이 만들기 시작한 농촌부녀는 1985년까지 8년간 34호까지 발행되며 가톨릭여성농민회 기관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여농 소식지는 그 후로 ‘품앗이’ ‘여성농민’으로 제호를 바꿔가며 1987년까지 꾸준히 발행되었다. 

그러나 아직 혈기왕성한 30대 중반 농촌여성 활동가 봉재씨는 교육을 해도 바로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농촌여성들의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 같으면 충분히 이해할 텐데 그때는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을 해야지 왜 도로아미타불이 되는지 이해도 안 되고 속만 상하더라구요” 신협 운동 하면서 만난 농촌여성들도 농촌현실과 회계 등의 교육을 해도 다음 달이면 까맣게 잊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가톨릭농촌여성회 활동을 하면서 똑같은 문제와 마주한 봉재씨는 떠돌이 교육보다 한마을에 들어가서 사례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톨릭농민회를 찾게 되었고 당시 협동조합과 지역공동체운동을 활발히 이끌던 가톨릭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를 찾아간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지역은 사람도 많고 운동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니 농촌을 원하면 경상도가 좋겠다며 본당 대부분이 농촌지역인 안동교구 두봉 주교를 소개한다. 

1979년 봉재씨는 안동으로 두봉 주교를 찾아간다. 1954년 한국전쟁의 상흔이 완연한 한국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란 눈의 프랑스인 두봉 주교는 1969년 안동교구 주교가 되면서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동 가톨릭농민회를 만들고 농민회관을 세우는 등 가톨릭 농민운동의 근간을 만든 두봉 주교는 ‘오원춘 사건’으로 알려진 ‘영양 불량씨감자투쟁’을 적극 지원해 승리로 이끈 가농 운동의 숨은 공로자이다.  

두봉 주교는 봉재씨를 반기며 정호경 안동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와 권종대 회장, 정재돈 총무를 소개한다. 

마침 아래층 안동교구 농민회사무실에 있던 세 사람을 만난 봉재씨는 성당, 교회,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이 없고 새마을운동이 잘 안된 곳으로 자신을 보내 달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한다. 안동교구는 농촌지역 기초조사가 잘 되어 있었다. 자료를 바탕으로 봉화 1개마을과 예천 2개 마을을 후보로 찍었다. 봉화와 예천을 가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교구청을 나온 봉재씨가 몇 걸음 떼는데 정재돈 총무가 뒤 쫓아와 봉화마을 사람이 마침 농민회사무실에 왔으니 만나고 가란다. 

“일이 되려니 일사천리던가” 싶어 봉재씨가 가던 길을 접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봉화 구천마을에 산다는 전우익 선생이 “우리 동네를 왜 올라고 하니 껴?”라며 반가이 맞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미 인겨’ 책 저자로 유명해진 전우익 선생은 해방 후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서 활동하다가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6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 후 귀향해 40여 년 간 꼼짝 않고 농사를 짓고 글을 짓던 전우익 선생은 당시까지만 해도 봉화, 안동까지만 이동의 자유가 있는 사회안전법 감시자였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두봉 주교, 가농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내던 터였다.  

“사실은 좀 쉬고 싶은 곳을 찾는데 그 마을이 좋을 것 같아서요”라는 봉재씨의 대답에 전우익선생은 “오세요. 와도 되니더”라고 화답했고 "오늘 당장 가보자’는 전우익 선생 제안에 두 사람은 두 말 없이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로 향한다. 

낡은 기와집들이 들어찬 마을 앞 에는 냇물이 흐르고 새마을운동의 광기에도 허물어진 기와집과 어그러진 돌담이 남아 있던 마을풍경에 봉재씨 마음이 설렌다. 

“선생님, 이 마을 너무 좋아요. 빈집이 있을까요?” 단박에 마음을 정한 봉재씨가 물으니 전선생은 호호백발에 허리가 반쯤 굽은 76세 할머니 집으로 안내한다. ㄱ자 집으로 방2개를 터놓은 방은 얼마나 오랫동안 손을 안 탔는지 흙이 떨어져나가 대나무가 드러난 채로 살짝만 밀어도 벽이 흔들릴 정도였다. 낡아서 떨어진 창문은 창틀이 흔적을 알릴뿐이었다. “이 아가씨만 좋다면 나야 괜찮니더”라는 말로 주인할머니 허락을 받은 봉재씨는 대나무살 드러난 흔들리는 흙벽도, 떨어져나간 창문틀도 고향집처럼 반가웠다. 

70년대 말, 30대중반의 깡마른 여자가 구비 구비 산골마을 허물어져가는 집 곁방살이를 하는 것이 무에 그리 신나는 일이었겠냐 만은 어렸을 때부터 독립적인 생활에 도가 튼 봉재씨는 대궐 같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 마냥 들떴다.

“농촌마을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것이 괜찮았냐”고 묻는 성자언니에게 “마을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할까봐 그것이 제일 무서웠지 혼자 사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는 한 번도 안 해 봤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찌감치 어머니와 농사 지으며 동생들을 키워낸 봉재씨에게 남의 시선과 수근거림은 중요치 않았다. 목표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어 보이는 봉재씨다. 

농촌마을에서 여성활동가가 살아남기 힘든 시절이었다. 

구천마을은 전 씨들 집성촌으로 예전엔 봉화에서는 알아주는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치마양반이라고 들어봤어요?” 라고 묻는 봉재씨에게 “바지사장은 들어봤다”며 현문우답(?)을 해버렸다.

‘몸이 아파 요양 온 아가씨’로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봉재씨는 도배와 창문을 새로 바른 자신의 방을 마을책방으로 꾸몄다. 신협연구원 동료에게 책을 모아 보내달라고 SOS를 쳐서 마련한 책은 책장이 없어 방바닥 신세였지만 아이들은 교과서를 들고 봉재씨 책방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교육열이 높았던지 호기심인지 몰려든 아이들 공부를 봐주었고 책을 빌려가는 아이들도 생겼다. 말 그대로 마을 공부방인 셈이었다. 

“한 아이가 매일 소설책을 빌려가는 거예요. 이상해서 아이에게 너 이 책을 매일 한권씩 읽니?”라고 물으니 아이는 도리질을 치며 빌려간 책은 할머니가 읽는다고 한다. 문맹률이 높을 때 인데 그것도 할머니가 매일 한권씩 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궁금증이 더해진 봉재씨는 다음날 책 읽는 할머니를 찾아 나섰고 ‘치마양반’ 유래를 듣게 된다. 

봉화에서 전 씨 집안 땅을 밟지 않고 갈 곳이 없을 정도로 부자마을로 소문난 이 마을 사람들은 몰락한 양반집 딸들과 결혼을 많이 했다. 바깥일을 꺼리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양반가 여성들이다보니 농사일은 논일이건 밭일이건 자연히 남자들 몫 이었다. 이 마을에서 남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풀 메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치마양반’은 몰락한 양반집 딸과 결혼한 남편들을 지칭하는 말로 지금 듣기에도 생소하다.

이동네 여자들은 치마는 정강이가 보이면 안 되고 팔이 보이는 옷은 입지 않는다. 바지는 물론 금지다. 봉재씨가 처음 이마을에 집 보러온 날 만난 동네 구멍가게 아가씨는 청바지차림의 봉재씨가 이 동네 살 러 올 거라고 건네는 인사말에 ‘옷부터 치마로 바꿔 입으라’고 강력히 조언한다. 

예전의 봉재씨 같았으면 펄쩍 뛰었겠지만 지역사회개발 과정을 공부한 뒤로는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달라도 반격하지 말고 그저 예, 예하라’는 가르침을 떠올리며 “예, 예”하고 넘겼다.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비닐멀칭 안한다고, 농약 안친다고, 온 동네사람이 잔소리를 해도 그저 “예, 예‘ 대답하고는 봉재씨 하고 싶은 대로 자연과 사람에게 이로운 농사를 짓는지혜를 발휘한다. 

“그 마을에서는 일부러 바지만 입었어요. 치마에서 한번 지면 또 다른 것을 요구하니까 앞에서는 예, 예 해놓고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어요.”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에 이골이 난 봉재씨는 호미를 들고 젊은 엄마들과 산을 오르며 약초를 캤다. 남자들만 일하는 모내기에도 끼여 모내는 솜씨를 자랑하며 마을사람들과 어울려갔다. 

책을 빌리고 공부 하러 온 아이들로 시끌벅적 했던 봉재씨 집도 1980년 5월 18일이 지나면서 공기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날도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고 있는데 새마을지도자가 술에 잔뜩 취해서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재씨 에게 삿대질을 하며 “우리 동네에 쉬러왔다고?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라며 소리치고 행패를 부렸다. 다음날 다시 찾아온 새마을지도자는 공청회 발표 자료를 앞에 내놓으며, 봉재씨를 닦달한다. 1980년 4월 17일 경제인연합회를 빌려 농민문제를 주제로 연 첫 공청회에서 봉재씨가 발표한 가농과 가톨릭농촌여성회 발표를 문제 삼은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가톨릭농민회와 관련 있는 봉재씨를 예의주시 해 왔는지 모를 일이다. 

모내기철인데도 봉재씨 집에 공부하러 오던 아이들 발길이 뚝 끊어졌다. 알고 보니 이 마을 주민 30%가 월북가족인데 빨갱이(?)로 소문난 봉재씨에게 아이들을 보낼 리 없었다. 

역경이 닥칠수록 투지가 강해지는 봉재씨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벗어나려고 모내기하는 들녘을 찾아다녔다. 부지깽이 손도 빌린다는 모내기철이니 마을사람들은 일솜씨 좋은 봉재씨 손을 반나절이나마 빌려야 했다. 

마침 언니가 ‘마을이 너무 예쁘고 좋다’고 하니 속는 셈 치고 여름휴가를 언니 집에서 보내기로 하고 여동생이 봉화 집에 쉬러 왔다. 여동생을 데모하다 피신 온 여학생인줄 알았는지 봉재씨가 일하러 간 사이 경찰서장은 혼자 있던 여동생에게 취조하듯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오전 모내기 마치고 돌아온 봉재씨가 서울에서 간호사하는 동생인데 휴가차 쉬러 온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던 경찰서장은 직원신분증을 확인하고 나서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경찰서장이 돌아가자 여동생은 ‘언니가 나쁜 길에 들어섰으니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데려가라고 했다”며 울면서 언니에게 같이 서울로 올라가자고 사정했다. “우리 집에서는 언니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고 경찰서장에게 항변하던 동생이 걱정을 잔뜩 안고 떠나고 경찰의 감시는 심해졌다. 

형사를 붙여 봉재씨를 감시하기 시작했고 소문은 안동교구 두봉 주교에게 날아갔다. 두봉 주교와 안동농민회사람들은 더 이상 마을에서 활동하기 어려우니 나오라고 했지만 봉재씨는 “저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설령 죽인다 해도 저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니 나쁠 것도 없지요. 지금 나가면 오히려 나쁜 선례가 되니 견뎌보겠다”며 오히려 설득했다. 봉재씨는 자신을 감시하는 지서장에게 오히려 “당신이 나를 지켜 달라”고 선방을 날리기도 했다. 억압과 탄압에는 우회와 타협을 모르는 봉재씨다.  

상황이 이러니 가톨릭농민회 이병철 회장까지 찾아와 가톨릭농민회에서 일하자고 제안한다. 봉재씨는 ‘가톨릭농촌여성회’ 활동 하다가 어떻게 ‘가톨릭농민회’ 일을 하냐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찬배, 정성헌씨 등 가농 활동가들이 찾아와 설득하기도 했고 더 이상 마을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봉재씨는 가여농 활동가들과 상의 끝에 1982년 가농 여성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가톨릭농촌여성회는 감사를 맡아 관계를 유지했다. 마을에 들어 간 지 2년만의 일이다. 

가여농 지역조직과 가농 지역여성분회와의 관계와 해외후원금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가농 조직으로의 유턴은 봉재 씨이기에 가능했다. 


받들 봉(奉), 있을 재(在)


이사진, 참 멋지다. 

“제 이름이 어떻게 봉재가 되었는 지 아세요?” 1940년대 한국전쟁 이전 세대치고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봉재’라는 이름에 또 무슨 차별이 있을까 싶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올렸던 40일 기도를 기억하며 예수부활 즈음에 천주교인들이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는 사순절이 1968년 이전에는 봉재(封齋)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말이다. ‘지집아’들이 환영받지 못했던 시절 맏딸로 태어난 여자아이는 이름도 없이 크다가 일제 때 공출 거두려고 호구조사 나온 면서기 앞에서 할아버지가 아무렇게나 툭 던진 한마디가 이름이 되었다. “저 지집아 봉재 때 낳았으니 봉재라고 해라”

집안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나온 막내 작은아버지가 아는 한자를 총동원해 호적에 올린 이름은 받들 봉(奉), 있을 재(在)로 사순절을 뜻하는 봉재(封齋)는 면했다. 아무리 한자 뜻이 달라도 봉재가 사순절임을 천주교인들이라면 다 아는 터라 어린 봉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원망 스러웠고 봉재라고 불리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농민운동을 하면서 한자로 풀어 쓴 수풀림(林), 받들봉(奉), 있을재(在) ‘사람들이 숲을 이루고, 그들을 모시고 사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재탄생 하면서 봉재씨는 ‘임봉재’가 마음에 쏙 들었다. 평생 사람들 속에서 민중을 받들고 살라고 할아버지와 막내 작은아버지가 거든 셈이다.  

이름 때문에 봉재씨는 군대에 갈 뻔도 했다.  

“열서너 살 때였을 거예요. 한번은 면서기가 서류를 들고 와서 ‘임봉재’어디 있어? 라며 저를 앞에 두고 찾는 거예요. 봉재씨가 “전데요?”라고 나섰지만 “넌 지집아잖아. 호적에 아들로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야?”라며 오빠를 찾아오라고 성화다. 

짐작컨대 ‘봉재’라는 이름만 보고 면서기가 당연히 남자라고 적은 것이 분명하다. 여자이름이 옥자, 명자, 정자, 순자가 대세였던 시절 제가 ‘봉재’라고 나서는 지집아 앞에 면서기는 낭패다 싶은 얼굴로 어린 봉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공출과 군대, 현대사 질곡을 대변하는 두 단어가 봉재씨 이름을 웃프게 한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죠 


70대 초반의 동생 신부님이 70대 말을 살고 있는 누나에게 일을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 보지만 몸이 기억하는 가난과 배고픔은 저절로 땅을 돌보고 곡식을 심고 거두게 한다. 

전쟁 통에 대식구 맏딸이었던 열너댓 살 봉재는 옥수수 배급을 받는 날이면 머리에 인 옥수수가루를 한 번도 내리지 못하고 15리길을 걸어 집까지 왔다. 쉬려고 짐을 내리면 누가 다시 머리에 얹어줄지 모르니 목이 부러질 듯 아파도 다리쉼 한번 못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수녀원을 통해 고등학교까지 마쳤고 영어를 잘하고 음악적 재능까지 있었던 봉재씨는 얼마든지 개인적 출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봉재씨가 거쳐 온 교육과정은 교사의 길도, 교수의 길도, 예술가의 길도 충분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이 놓일 때마다 봉재씨 가슴을 잡아 끈 것은 고향 거제도와 어머니였다. 

완강하게 탈출했던 고향땅과 어머니의 삶은 봉재씨가 살아낸 여성농민운동, 농민운동, 생명운동의 ‘필요충분’ 조건이었다.  

누군가 “너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봉재씨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면 뭐라도 하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어머니처럼 살기 싫어 결혼은 안했지만 농촌여성들과 자신의 삶이 별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다 존중했잖아요. 신앙의 가르침을 삶에서 살아내야 하는데 삶에서 신앙이 일치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됐죠.” 

어린 시절 공부는 해야겠고 수녀원 제안은 덥석 받지 못했던 여러 대목들은 봉재씨의 신앙관과도 같았다. 봉재씨는 농촌여성들이 변해야 다음세대 여성들에게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리핀에서 협동조합을, 이스라엘에서 지역사회개발 공부를 하면서도 뇌리를 떠나지 않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은 고향 거제도와 어머니 같은 여성들이었다. 

국제회의는 한국의 농업 농민 농촌의  실상을 알리는 무대였다.  

봉화 구천마을을 나와 1988년까지 가톨릭농민회 여성부장으로 일하면서 국제회의에 참여해 세계여성들과 교류했다. 외사촌 명자의 영어교과서와 성당 야학, 수녀원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 덕분에 가농 국제회의는 봉재씨 담당이 되었다. 아프리카, 남미,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15개 국가에서 열린 가톨릭 국제회의는 한번 열리면 한 달씩 진행되었다. 국제회의 한번 다녀오면 곤죽이 되어 귀국 후 한 달 동안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다운 여행을 못한 것이 아쉽다. “브라질에서 회의를 하는데 유럽활동가들이 아마존 강 폭포를 보러 같이 가자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거절했어요.” 가농 여성부 일을 혼자 해내야 했던 때라 일정 맞춰 귀국하지 않으면 지역 활동가들도, 봉재씨도 밀린 일 해내느라 힘이 들었다. 안 그래도 여성부 활동가들이 자주 바뀌던 때라 한 달 회의에 이어진 여행은 봉재씨에게 ‘너무 먼 당신’이었다.  

“우리는 독재정권에서 농업과 농민들의 생존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런 논의를 하는데 유럽 활동가들은 농촌청소년 레크레이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바쁜 일정 짬 낸 보람이 없는 것 같아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점차 처한 상황과 문화가 다름을 이해하게 되면서 불공정한 농산물 가격과 정치제도로 갈수록 변두리로 나앉게 되는 농민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농민들의 투쟁을 국제사회에 적극 알리는 역할을 했다. 

열권이 넘는 봉재씨 앨범 속에는 외국인 친구들과의 교류와 협력이 가득하다. 트렌치코트와 원피스, 양산으로 한껏 멋을 낸 협동교육연구원 시절의 봉재씨는 신여성 대표주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네팔 여성 활동가와 한복을 서로 바꿔 입고 찍은 사진은 발랄했고 유럽, 아프리카 활동가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도 봉재씨의 까칠한 세련미는 넘쳐흐른다. 

‘지구가 좁다’며 한 세상 원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봉재씨가 슬슬 부러워진다. 


호랑이굴


“농촌부녀지를 내면서 별 고민없이 쓰고 말했던 부녀(婦女)라는 글을 한자로 펼쳐보니 글자 자체에 차별을 담고 있더라고요.” 

‘가톨릭농촌부녀회’를 ‘가톨릭농촌여성회’로 바꾸려고 하니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부녀와 여성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해서 에미와 어머니가 같냐고 했더니 아무 말 못하더라구요.” 

그 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미경씨 제안으로 농촌여성교육을 함께 한 봉재씨는 1984년 열린 ‘농촌여성운동 지도력 개발 세미나’ 발제를 하면서 농촌에 살고 있는 ‘농촌여성’이 아닌 여성이면서 농사짓고 사는 주체적 의미의 ‘여성농민’으로 용어 전환을 제안한다.  

부부가 가농 활동을 할 경우 여성에게는 내조자의 역할을 강요하고, 여성들의 모임과 논의를 분파로 몰아 부치던 80년대 초 가농 여성부장 역할을 맡으며 봉재씨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외쳤던 가농 활동가들이 일상생활에서도 평등세상을 실천하는지 알고 싶었던 봉재씨는 일부러 임원들 집을 찾아다녔다. 아내는 연기 가득한 아궁이에 불땀을 집어넣으며 밥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데 도우러 들어갔던 봉재씨 마저도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성화를 쳐대는 임원들을 보면서 봉재씨는 “호랑이굴에 더 남아 싸워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충남 당진 매산 공소에서 여성분회를 만든다고 방문한 형제님 집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 집도 불 때서 밥을 해먹었는데 연기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형제님이 자매님과 같이 부엌일을 하는 거예요.” 형제님은 밥상도 아이들을 불러 들게 하고 자매님과 봉재씨를 아랫목에 앉혔다. 아이들에 말에 의하면 평상시에도 아랫목은 엄마 자매님 자리였다. 1980년대 중반 농촌마을에서 보기 힘든 풍경을 안긴 형제님은 아직도 가농 회원으로 생명운동을 모범적으로 하고 있다. 봉재씨는 김상덕, 권종대 회장도 삶과 일, 투쟁이 일치한 존경하는 농민운동 동지들로 꼽는다. 

1989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뜨고,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면서 가톨릭여성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는 전국조직으로 각각 통합을 결정한다. 가농은 1년간 공부와 논의를 거쳐 생명운동의 길을 가기로 하고 생명 농사꾼 봉재씨는 여성최초로 마산교구연합회, 전국 회장을 맡아 가농을 이끈다.      

씨앗을 심어 거두고 또 다시 종자를 남겨 순환하는 농사, 순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 속에 겸손, 소박한 봉재씨의 삶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동생 신협교육 수료식에 오신 아버지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봉재씨는 꼭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유도 모르고 똥을 싸도록 맞았던 적이 있었어요.” 한국전쟁 당시 집이 두 채였던 봉재씨 네 집은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방을 비워 피난민에게 내주었다. 그 방과 마을에 들어찬 피난민 아이들과 어린 봉재는 학교를 함께 다녔다. 

피난 오기 전 꽤 살던 집안이었는지 아래채 여자아이는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아침마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껌을 사서 씹었다. 소나무 송진이나 봄이면 밀 껌 밖에 모르던 봉재씨는 원피스 여자아이가 씹던 껌에 알록달록한 색이 입힌 것을 보고 크레파스를 섞어 색 껌을 만들어 씹기도 했다. 송진 껌을 질겅이다가 향기에 못 이겨 “껌 조금만 줄래?”라고 하면 원피스 여자아이는 씹던 껌을 눈곱만큼 떼 주었다. 원피스 여자아이는 씹던 껌을 잘라 주면서 “껌 갚아라”고 했던 모양이지만 단내 나는 껌에 취해 건성으로 대답을 했는지 봉재씨는 눈곱만큼 얻어먹었던 껌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나가던 나그네에게 밥을 대접하면서도, 피난민들에게 방을 내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본 적 없는 어른들을 보고자란 어린 봉재에게 ‘눈곱만큼 얻어먹은 껌을 설마 갚아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셈법이었다. 

돈이라고 본 것은 먼발치에서 할아버지 허리춤에 달려있던 엽전뿐이었던 어린 봉재에게 원피스 여자아이는 껌 3개를 갚으라고 빚쟁이처럼 독촉했다. 돈을 본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어린 봉재는 빚 독촉에 공부도 머릿속에 안 들어왔다. 학교를 마치면 원피스 여자아이를 피해 포로수용소 통해 가는 가까운 길을 버리고 산길을 둘러 늦게 집으로 오곤 했다. 

어느 날 집 근처 언덕에서 어린 봉재가 내려오는 것을 지키고 섰던 아버지는 “회초리 꺾어 와라” 한마디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늦게 왔다고 그런가?”하며 집 뒤 미류 나무를 꺾어 방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문고리를 걸고 숟가락까지 단단히 채운다. “니가 뭘 잘못한지 아나?” 사정없이 내려친 미류 나무 회초리는 종아리뿐만 아니라 온몸을 고통스럽게 했다. 밖에서 할머니와 엄마가 말리며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잠긴 문안에서 아버지는 살점이 떨어져나가도 매를 멈추지 않았다. 밖에서 애타게 말리던 할머니가 문살을 부수고 문을 연 틈을 타 죽도록 도망쳤지만 아버지도 질기게 어린 봉재를 쫓으며 회초리를 내리쳤다. 아버지 매질에 못이긴 어린 봉재는 결국 옷에 똥을 싸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따끔따끔한 종아리에 된장 바르는 감촉을 느끼며 정신이 돌아오는 어린 봉재의 귀에 “쪼깐한게 뭣 한다고 빚을 졌겠노?”라며 혀를 차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도 그렇지 나한테 한번이라도 안 물어보고” 

어린 봉재는 눈을 감은 채 속울음을 울며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아 버린다.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지운 대신 ‘절대 남에게 돈을 빌리지 않는다’는 원칙이 봉재씨 몸에 독하게 새겨졌다. 

“100원이면 라면 서너 봉지 살 수 있을 때 돈이 없어서 6개월을 라면으로 버틴 적이 있어요. 나중에는 하도 질리니까 스프 대신 된장을 풀어먹었더니 좀 낫더라구요.” 

어린 봉재씨 눈에는 남편을 잃고 구멍가게를 하는 아주머니도 딸이든 아들이든 억척같이 아이들을 학교 보내는데 논을 5~6마지나 갖고도 아이들을 학교에 못 보내는 아버지가 너무 무능해 보였다. 집에서는 호랑이지만 면서기 앞에서 잔뜩 주눅 드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태도도 싫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써오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머니 직업난까지 항상 ‘무’라고 체크를 하셨다. 농사를 짓는데 왜 아버지, 어머니는 직업난에 ‘농업’ 대신 ‘무’라고 체크 하는지 속상한 어린 봉재는 선생님 보기도 민망했다. 

아버지와의 대립은 1979년 오원춘사건 이전까지 40년이 넘도록 팽팽하게 이어졌다. 

1978년 영양농민들의 불량감자종자보상투쟁에 영양군과 농협 등 당국이 무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1979년 1월 안동교구 사제들이 농민투쟁을 지원하면서 보상도 받고 농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그러나 몇 달 후인 5월 당시 영양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 오원춘 회장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 울릉도에 감금 폭행당한 사건이 알려졌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는 박정희 정권과 전면적 투쟁을 벌였다. 유신독재와 긴급조치법 등으로 민주인사들을 탄압했던 서슬 퍼랬던 박정희 정권은 오원춘 회장 뿐 아니라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씨 등 가톨릭농민회원 3명을 구속했고 봉재씨 등 농민회원 7명이 구류를 살았다. 

오원춘 사건으로 뒤숭숭 한채로 대구법원을 오가던 차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고 집으로 달려가니 어머니는 죽기 직전 사람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누워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봉재씨에게 아버지는 대뜸 “너는 왜 정부가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난리를 치냐”며 큰소리부터 낸다. 

봉재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천주님의 자녀로 예수님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가르치셨잖아요. 만약 이 땅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부를 제자로 삼지 않으시고 아버지 같은 농부를 제자로 삼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르며 제대로 사는 일, 농민운동은 그런 겁니다.”  

말을 마친 봉재씨가 어머니를 당장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화를 내며 “니 쪼대로 해라”며 돌아 앉았다. 봉재씨는 그길로 진영성당에서 사목하던 동생신부와 상의해 부산 분도병원에 어머니를 입원시켰다. 3일간 검사를 받은 어머니는 1980년 회갑 무렵 위를 2/3이상 잘라내는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하루 만에 깨어난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고 집으로 가버린 아버지부터 찾았다. 지집아들이 떠든다고 부지깽이 들고 여동생들 입단속을 해대던 어머니가 아버지 다음으로 찾은 사람은 손녀딸이었다. 왠지 씁쓸해진 봉재씨를 붙잡고 문병 온 작은어머니가 “봉재 니가 큰일 했다”며 눈물바람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목숨이라고 판단했는지 집에서 장례 치를 생각까지 했었다. 느닷없이 내려온 봉재씨가 부산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자 “여태까지 내팽개치더니 엄마를 병원에서 죽게 한다”며 제수씨가 봐 온 술상 앞에서 크게 화를 내셨다고 한다. 

며칠 후 어머니가 다행히 살아나자 아버지는 친지들을 모아놓고 한턱 거하게 내며 “봉재가 지 에미를 살렸다.”며 기분좋아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사이 지옥과 천국을 오가셨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삶의 원천이었다. 

“1980년 오원춘사건에 대한 항의로 고성에서 농민대회를 크게 하기로 하고 준비하는데 누가 봉재야, 봉재야 하고 부르는 거예요.” 분명 아버지 목소리였다. 정부하는 일에 반대한다며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가 여기는 웬일로 오셨는지 의아해 하며 돌아봤더니 “나 왔다. 바쁘겠다. 수고해라”며 환한 웃음을 남기고 일행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가농에 가입했고 농민대회에 참석하러 오셔서 큰딸에게 멋적은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아버지 나름의 '화해'였다.  

고성농민대회 이후, 아버지는 출장길에 집에 들른 봉재씨에게 어머니를 통해 처음으로 차비를 쥐어주었다. 아버지에게 똥 싸도록 회초리를 맞은 후 40년 만에 느껴보는 부정에 봉재씨 가슴 저 편이 싸하다. 

1993년 암 투병 하던 초대 가여농 김영자회장 장례식과 삼우제를 치루는 와중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장례를 집에서 치를 거면 모시고 가라는 병원 측에 양해를 구해 큰 딸 오기까지만 응급실에 있기로 하고 아버지와 온 식구가 봉재씨를 기다렸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첫차로 달려간 봉재씨가 아버지 귀에 대고 “봉재 왔어요”라고 소리치자 혀까지 말려들어 간 아버지는 그제 사 “아”하고 숨을 바투 쉰다. 동생신부가 임종을 돕는 주모경을 외우자 봉재씨 손에 잡힌 아버지 손목의 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 

아버지와 한평생 얽히고 설켰던 실타래가 ‘턱’하고 떨어진다. 


안기부에서 9일


가농 전국회장을 맡았던 서경원 전 의원 방북사건으로 1989년 정국은 시끄러웠다.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의 방북에 이어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서경원의원이 1988년 방북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6월에는 남한 청년학생대표로 임수경 학생이 세계청년학생축제 참여를 위해 방북한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휘몰아쳤다. 

친하게 지냈던 월간지 편집장 후배에게 갑자기 ‘집으로 좀 오라’는 전화를 받고 봉재씨는 갸우뚱하며 후배 집으로 간다. 자정이 넘어 도착 한 후배집에 도착한 봉재씨에게 자신이 안기부에 연행되었는데 봉재씨 동선을 묻더란다. 봉재씨를 불러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왔으니 피하라는 후배 말에 늦은 밤 뒷문을 통해 경찰을 따돌리고 피신했다. 가농과 지인들을 통해 여기저기 알아보니 서경원 회장 방북사건에 봉재씨가 연루되어 안기부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1985년 당시 가농여성부장이었던 봉재씨는 아프리카에서 열린 가톨릭농민회 국제총회에 당시 가톨릭농민회 서경원 회장과 함께 갔었다. 회의를 마치자 서경원회장이 ‘독일에 있는 친구 집에 들렀다 간다’며 봉재씨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할일이 태산 같았던 봉재씨는 거절하고 벨기에에서 서경원 회장을 독일 가는 기차에 태워 보낸 것이 알리바이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때 서경원 회장은 독일 들렀다가 북한으로 향했고 뒤늦게 밀입북이 알려지면서 연행되었다. 가농 뿐 아니라 농민운동판, 정치권까지 서경원씨 주변이 난리가 났다. 가농 활동가들과 상의 끝에 자진출두해서 결백을 증명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생 신부에게 자신의 상태를 간단히 전하고 지인 집에 며칠 피신한 뒤 정성헌 사무국장을 만나기 위해 가농회관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대전 가농회관 앞에 내리자마자 잠복해있던 형사들이 양쪽에서 튀어나와 봉재씨를 잡으려 했다. 달리기에 자신 있었던 봉재씨는 죽을힘을 다해 뛴 덕에 경찰 손이 닿기 전에 가톨릭농민회관 정문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있었다. 가농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마친 뒤 대전 안기부 요원에 의해 연행된 봉재씨는 차에 태워진 채 서울로 향했다. 한 밤중에 서울로 들어선 차가 삼일 고가도로를 타는 것을 보고 “아, 남산으로 가는 구나, 이제 죽을 수도 있구나”며 절망감에 봉재씨는 눈을 감아버린다. 남산 중앙정보부에 내리자 형사들은 봉재씨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데려간다. 삐걱하는 쇳소리와 함께 형사들이 풀어 준 눈앞에는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봉재씨 다리가 ‘탁’하고 풀린다. 봉재씨는 “여기는 안기부다. 마음 단단히 먹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늘에 계신 그 분께 기도를 올린다. 그제사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하 2층 취조실로 들어서자 가지고 있던 소지품은 물론 묵주반지까지 빼앗겼다.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 

여기는 안기부다. 

‘어렸을 때 가출한 비행소녀 봉재씨는 위장해서 수녀원에 갔고 서경원 회장을 꼬셔 모로코를 통해 북한을 다녀왔다.’ 형사들이 만들어 놓은 진술서에서 봉재씨는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도 가고 북한에도 몇 번이나 다녀온 고정간첩이 되어있었다. 김일성에게 공작금까지 받아서 포섭활동을 했다는 각본을 미리 짜놓고 3명의 형사가 밤낮 없이 봉재씨를 취조했다. 

“나는 모로코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 줄도 몰랐어요.” 안기부에서 풀려난 뒤 지도를 보고 모로코가 아프리카 대륙에 붙어 있는 나라인 줄 알았다는 봉재씨는 지난해 드디어 30년 만에 모로코로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기(氣) 운동을 하며 건강을 살피던 봉재씨는 신발을 벗고 가부좌를 틀고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형사들이 써놓은 진술서에 절대 도장은 찍을 수 없으니 어서 검찰로 넘기거나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했다. 

“단식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좁은 취조실이 얼마나 답답하던지 서성거리다가 자술서를 쓰던 여자형사 머리를 만져주니 시원하다고 좋아한다. 다른 형사들도 너도나도 안마를 해달라고 해서 돌아가며 안마를 해 주었다니 안기부 취조실이 맞나 싶다. 

천주교 국제단체에서 대통령과 각계각층에 편지를 보내는 등 활발하게 펼친 구호활동도 한몫 했고 서경원 회장 당사자가 잡혀서인지 형사들은 봉재씨를 심하게 다루지 않았다. 

취조실에서 며칠을 그렇게 보내는데 잠깐 열린 문 사이로 아는 활동가가 지나가는 것을 본 봉재씨는 취조실 바깥세상이 궁금해졌다. 물도 마시지 않는 단식과 기(氣)운동으로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던 봉재씨는 화장실을 핑계로 다른 방 분위기를 살피기로 한다. 마침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신문쪼가리에는 ‘임수경 방북’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늘 아침 취조실에 들어오던 형사가 “요즘 왜 이렇게 임씨들이 시끄러워?”라며 신경질적으로 내뱉던 말이 이 말이구나 싶었다.  

“영장 없이 연행해서 구속시간을 연장해야 했는지 두 번 정도 형사들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라구요.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물어서 내 딴에는 형사들 골탕 먹인다고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했죠.” 

서울이라 보리밥 하는 식당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봉재씨에게 형사들은 보란 듯이 강남 한복판에 있는 고급 보리밥집으로 봉재씨를 데려간다. 형사들 골탕 먹이느라 보리밥집을 애써 떠올렸는데 작전이 실패하자 없던 입맛도 떨어져 한술도 뜨지 않았다. 

평생 농민의 삶을 끌어 안고 살았다. 

“난 그때 소나타를 처음 들어봤어요.” 피아노 소나타 밖에 알 리 없었던 봉재씨는 일행 앞에 선 차를 보고서야 소나타차를 알게 되었다며 해맑게 웃는다. 가난을 긍지로 아는 자의 호기로운 웃음이다. 

9일간의 취조 끝에 대전행 버스표를 주며 담당형사는 “제가 이 일을 수 십 년 했는데 선생님같이 태연한 사람은 두 번째 입니다.”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세상이 좋아지면 그때는 제가 선생님 따라 농민운동을 하지요.”라고 덧붙이는 안기부요원에게 봉재씨는 “그때 저는 반대편에 서지요.”라며 격조 있는 펀치를 날린다.  

봉재씨가 기(氣)수련과 단식으로 9일간 안기부취조를 견디는 동안 아버지는 혈압으로 쓰러지고 집안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1999년 두 번째 쓰러져 종합검사 1주일 만에 ‘특발성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한달 입원한 뒤 거제도로 모시고 왔다. 1년에 겨우 한두 번 집에 들르면 항상 손을 잡고 “조심 하그라”며 차비 몇 푼을 쥐어주시던 어머니는 쓰러져서도 “봉재 시집가기 전에는 눈을 못 감겠다”며 봉재씨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딸이 어머니에겐 죽어서도 풀지 못한 한을 남긴 꼴이 되었다. 

부모님의 시집가라는 잔소리 때문은 아니었지만 삼십대 후반 “봉재씨는 결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봉화 구천마을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기 전 봉재씨는 여성농민들을 만나면서 실망이 컸다. 왜 농촌의 젊은 엄마들은 아는 만큼 실천하지 않는지 답답했던 봉재씨는 ‘농촌 여성들과 나의 삶이 달라 이해가 부족했다’는 데 생각에 미치자 자신을 바꿔보기로 마음먹는다. “활동을 보장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시집 가겠다”고 말하니 김영자 회장이 득달같이 남자 한 명을 선보였다. 농민회원은 아니지만 일단 ‘사귀어 보자’ 마음먹고 탐색을 했는데 바로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그길로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꿈꾸는 일은 봉재씨 인생에서 털어 버렸다. 

평생 결혼 안 한 딸을 가진 어머니라는 한을 남겨드렸다는 죄책감에 시작한 어머니 병수발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발성 뇌수막염’은 치매로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예쁜 치매를 앓았다. 봉재씨를 자신을 보살펴주는 좋은 아주머니로 인지한 어머니는 “나는 큰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이 아주머니한테 와서 살고 있다”며 봉재씨 눈을 피해 아들, 딸 찾으러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농민운동 하는 큰 누나와 농민회 지도신부 하는 큰 형님, 뒤늦게 농민회원이 되신 아버지 덕에 공무원 신분으로 항상 기 한번 크게 켜보지 못했을 셋째 동생이 어머니가 쓰러진 다음 해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사망했다. 어머니의 치매가 어쩌면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새벽이면 집 뒤에 있는 동생묘소 주변을 파헤치길 반복했다. 거제도에서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봉재씨는 산청 집으로 어머니를 모셔 온다. 

긴병에 효자 없는지 어머니를 잘 보살피려고 모시고 왔는데 자꾸 아들, 딸 집에 간다면서 봉재씨 눈을 피해 집을 나가는 어머니를 나무둥치에 묶어두고 밭일을 하고 밤잠을 자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잠시 봉재씨 눈을 피해 문 밖으로 탈출을 했어도 마을회관 앞에 진치고 있는 마을사람들에게 들켜 어머니는 마을회관 모정에 꼼짝없이 갇힌다. 마을사람 전화를 받고 어머니를 찾으러 가면 “아이고 저 할매 나 잡으러 온다.”며 마을사람들 뒤에 숨곤 했다. 착한 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9년이 어머니에게 어떤 세월이었을지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 막내 동생 집으로 마실 갔던 어머니가 절대 봉재씨 집으로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막내며느리를 일해 주는 아주머니로 대했지만 막내아들 집이 편하다는 어머니를 차마 모시고 올 수 없었다. 그렇게 막내아들 집에서 1년을 살던 어머니는 다시 쓰러지고 병원으로 옮긴 지 1주일 만에 돌아가신다. 

가농 마산교구 회장을 할 때 출장을 가려던 봉재씨는 느낌이 좋지 않아 밤에 어머니를 돌보고 날이 밝으면 회의에 합류하려던 참이었다. 새벽 한 시쯤 어머니의 호흡이 가빠지고 의사선생님이 준비를 하는 좋겠다는 말씀에 동생신부를 부르고 이어질 듯 떨어질 듯 숨을 내쉬는 어머니에게 “엄마 누가 제일 보고 싶어?”라고 묻자 어머니는 봉재씨를 보며 “봉재가 제일 보고 싶어”라고 겨우 대답한다. “내가 봉재라고 해도 어머니는 나를 몰라보더라구요.” 봉재씨가 큰 딸이름을 물었더니 “큰딸 이름은 봉재 둘째부터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사람들이 “큰 딸은 뭐해요?” 라고 물으면 “봉재는 뭐 하는지 몰라요. 근데 바빠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늘같이 믿었던 큰 딸이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자신을 떠나면서 모녀의 삶은 멀고도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1993년 돌아가신 아버지도, 2007년 돌아가신 어머니도 봉재씨 삶의 원천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두 분 다 임종을 지켰으니 봉재씨는 효를 다한 셈이다. 


씨앗, 할머니 


2018년 나온 책 ‘씨앗, 할머니의 비밀’에 봉재씨가 소개되었다. 종자를 지키는 여성농민 9명의 이야기가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 전개되는데 봉재씨 이야기는 ‘산나물들아, 봄꽃들아 고맙다’라는 제목으로 봄 편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의 삶도, 가부장 정서 가득했던 고향 거제도도, 때론 무기력해 보이고 때론 호랑이 같던 아버지도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내며 살았던 것처럼 배고픔과 가난의 대명사였던 농업과 농촌을 봉재씨는 한평생 품어 안고 살았다. 

“배를 곯아봐서 그런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거리라고 생각해요.” 광우병사태나 코로나19를 겪으며 먹거리와 생명농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니 봉재씨는 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가 맞는 말이란다. “먹는 것이 해결 안 되면 고통스럽거나 죽잖아요.”

얼마 전 큰마음 먹고 미장원에서 자른 머리가 마음에 안 차서 가위를 들고 다시 손을 봐야 했다. 필요한 옷은 본을 뜨고 재봉틀을 돌려 손수 지어 입는다. 식·의·주가 다 봉재씨 손에 달려있다. 자족하고 자립하는 삶에 대한 나의 로망을 수 십 년 전부터 이룬 봉재씨가 부러울 뿐이다.  

가농이 생명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계급투쟁과 생존권 투쟁이 중요하지 한가하게 생명농업을 하냐’고 비판하던 목소리도 있었다. 화학비료와 제초제 등 농약에 의존하는 관행농과 자연농, 생태농을 하는 농민들 간의 갈등이 컸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생태적 삶이 자본과 맞짱 떠야 하는 험난한 길임을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를 때이기도 했다.

“생태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자연의 순환적 이치대로 산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야 우리 몸과 마음에 영양 가득한 먹거리를 보충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당귀, 취나물, 엄나무순, 산초열매, 꽈리, 백련초 등 봉재의 정원을 가득 채운 풀과 열매, 꽃으로 담은 효소와 장아찌는 봉재씨 부엌 한 켠을 채운다. 생명농업의 기본인 효소는 반찬으로도 먹고 천연농약과 퇴비로도 쓴다. 할미꽃 효소는 벌레와 해충을 막아주고 군불 땔 때 나오는 목초액은 노린재를 잡는데 효과적이다. 양파껍질은 우려내면 훌륭한 해충기피제다. 생태뒷간에서 재와 함께 모은 똥, 오줌은 효소찌꺼기에 잡목을 넣어 삭히면 질높은 천연퇴비로 다시 태어난다. 

봉재씨에게 쓰레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모두에게 이로운 농사’이고 ‘모두에게 이로운 삶’을 산다. 

“생명의 시작은 씨앗이에요.” 

봉재씨는 1985년 아프리카 말리에서 열린 가농 국제회의에 참여하면서 씨앗을 중요성을 알게 된다. 

“먹을 것이 없어 기아에 시달리던 말리가 수 십 년 전에는 벼이삭이 출렁이는 풍요로운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죠.”

아프리카를 앞 다퉈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열강들은 그 지역 땅과 기후에 맞는 작물 대신 파인애플, 사탕수수, 바나나 등 돈이 되는 작물을 대량생산한다. 작물의 다양성이 사라진 농장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화학비료와 농약이 투입된다.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땅은 생명력을 잃었고 씨앗도 씨가 마르면서 아프리카는 기아와 가난의 땅이 되었다. 

“종자를 모은다고 하니까 할머니들이 봉투째 내주시는 거예요.” 그중 몇 톨씩만 덜어내 종자를 얻어온 봉재씨는 3년 동안 먹지 않고 다시 씨를 받아 불려나갔다. 수비초, 붕어초 등 25년째 채종하고 있는 토종고추종자 옆에는 지구반대편 열대에서 온 토종고추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외래종도 해마다 우리 땅에서 적응해 먹을 수 있으면 토종 씨앗이지 옛날부터 이 땅에서 자란 씨앗만 토종이 아니라는 것이 봉재씨 설명이다. 우리 땅에 뿌리를 내린 토종씨앗은 다양한 영양, 다양한 맛. 다양한 생물의 생산성을 높여 풍성한 밥상을 만들어낸다.  

봉재씨의 생명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에만 있지 않다. 건강을 살리고 밥상을 살리고 땅을 살리는 일이다. 씨앗은 식량주권, 식량자급의 기본이다. 내 손에 씨앗이 없으면 지속가능한 농업도, 생명농업도, 식량자급도, 식량주권도 보장 받을 수 없다. 

땅을 갈아엎는 경운을 하지 않는 봉재의 정원에는 민들레, 당귀, 방풍, 취나물 등 다년생 식물들이 하염없이 피고진다. “제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하늘이 내려주신 열매와 잎, 약재와 꽃을 필요한 만큼 거둬 먹고, 다시 밭으로 되돌릴 뿐이지요.” 

매일 아침 지리산 어드메에서 날아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눈을 뜨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토록 아름다운 하루를 주셔서”라는 기도가 절로 터져 나온다. 

향기에 이끌려 나온 봉재의 정원에는 이미 새들이며, 햇살이며, 지렁이며, 뿌리며, 꽃이며, 열매들이 제 할일에 바쁘다. 

봉재씨도 한손 거들러 텃밭에 나선다.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이 마리아상을 한 바퀴 돌아 봉재씨를 감싸 안는다. 

여기는 ‘봉재의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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