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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옥 Mar 13. 2020

마이크만 쥐면 기가 났제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오분임

오분임


뜻밖의 그리운 이름을 받아 들었다.  

이루지 못한 삶이랄까? 마치지 못한 숙제랄까?

1989년대 말 대학 졸업과 결혼 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선택한 농촌에서 여성농민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뛰어다녔던 논과 밭, 그리고 그 길에 이어진 마을과 사람들이 가끔 떠오른다. 이슥해진 봄 밤 삽질에, 호미질에 지친 마을 언니들 부여잡고 여성농민문제를 공부했던 기억들은 20여 년의 세월에도 또렷이 기억 한켠을 채운다.

10년을 못 채웠던 여성농민운동가로서의 삶은 ‘여성농민’이라는 단어 하나에 묵직한 애틋함이  올라온다. 밭가에 냉이가 올라오고, 겨울을 이겨낸 연초록 보리싹이 고개를 내밀 즈음이나 모든 것을 빼앗긴 쓸쓸한 겨울 들녘이 헛헛해질 때면 미영 언니와 평택 성자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을 쇠며 이삼십 년 묵은 이야기들을 털어 내곤 한다.

지난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30주년 행사 때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한한순(1대 전남여성농민회)회장님 모습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는 성자 언니 입에서 오분임, 성옥선, 엄영애, 김윤, 장순자, 이정옥, 고송자, 박남식, 이종옥 등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들의 이름들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시작한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찾기는 박남식·이종옥 언니까지 참여한 평택 참숯가마 회동으로 이어졌고 여성농민 전설들을 찾아 나서는 ‘여농 기행’으로 구체화했다.

첫 번째 여농 전설은 최고의 선동가 오분임회장으로 낙점됐다.

“우리 해남 회장님 댁에 갈랐는데 잠은 재워주실라요?” 종옥 언니의 전화에 “응, 그라제 밥도 해줄께” 흔쾌한 답이 오갔다. 수화기 너머 오분임회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짱짱하시다. 30여 년 세월을 살아낸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1월 10일 해남행 약속을 잡고 광주 사는 종옥 언니가 해남까지 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58살 집 앞에 선 83살 오분임


남편과  손수 지은 58년된 집은 오회장에겐 가장 따뜻한 곳이다

“밥은 우리 집에서 김치 놓고 항꾼에 먹으면 되제, 뭣한데 밖에서 먹고 온가?”

한동안 밖에서 서성였을 허리 굽은 그림자가 먼저 반긴다. 목소리와 실루엣만으로도 ‘오분임회장’이지 싶다. 아, 드디어 해남 땅끝에 왔구나.

“여섯 시쯤 갈게요. 저녁밥 주세요”라는 저녁 약속을 깨고 점심을 허술하게 먹은 탓에 해남읍 식당에서 상다리 부러져라 ‘남도밥상’을 받았다. “회장님 저녁밥 먹고 들어갈게요” 다시 전화 한 통 넣고 가물치, 조기, 갈치 생선 발라 먹다 보니, 아차차 5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몇 년 전 고향마을로 돌아온 조카 오은숙 씨의 안내를 받아 해남 현산리 오회장이 사는 그곳으로 바삐 차를 몰았다. 오은숙씨도 1980년말부터 1990년대 광산군에서 농민회, 여성농민회 활동가로 살았던 터라 차안에서는 종옥 언니와 한바탕 옛수다가 쏟아졌다.

겨울 볕이 땅에 떨어지니 시골마을은 후딱 밤으로 치닫는다.

겨울 들녘은 쓸쓸한 듯, 봄을 품어 안은 듯 두 얼굴이다. 백방산을 휘돌아 마을 안 공터에 차를 대니 21살에 결혼해 남편과 지은 58살이나 된 집 앞에 83살의 여성농민운동가, 오분임회장이 서성인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짊어진 허리는 살짝 굽었고 연골이 달아나버린 오른쪽 무릎은 끝내 펴지 못한 채 반가운 잔소리로 ‘내 손님들’을 맞이한다.

결혼하고 이모네 집 곁방살이 3년 만에 마련한 오회장 집은 세월만큼 허름한 채 오회장 손 닿을 만한 곳에 오밀조밀 살림들을 모아 놓았다. 독거노인들이 사는 방안의 흔한 풍경이다.  

‘내 손님들’ 준다고 해둔 저녁밥을 혼자 넘겼을 민망함에 서둘러 질문을 던진다.

“농민운동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나는 해남 땅끝에서 온 오장근 딸 오분임이다


“난 지금도 박정희, 종필이가 제일로 미워. 종필이가 일본 가서 강제징용자, 원폭피해자, 위안부 할머니들 피해보상에 대한 협상을 잘못해서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잖아”

오회장은 두세 살 때 일본 징용 끌려가 장애를 입고 돌아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한이나 풀자고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까지 올라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숱하게 데모를 했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4번도 갔었다. 그런 날은 경찰 눈을 속이려고 옷을 뒤집어 입고 접근하기도 했고, 조계사에 불공하러 간다고 속이기도 했다.

“한 번은 종필이 집 앞에서 강제징용자유족회 사람들이랑 원폭피해자들이 모여서 데모를 했어. 내가 종필이 대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니 경찰들이 싹 나와서 우리 일행을 둘러싸더라고”

오회장은 한-일 협정 실무책임자였던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지금도 종필이라고 부른다. 대궐 같은 종필이 집 앞에 서고 보니 속에 불이 난 오회장은 ”우리 아버지들 목숨 가지고 큰 집을 지었냐! 종필이 너 때문에 일본 새끼들이 목에다 힘주고 보상 다 줬다고 하잖냐” 며 억울한 김에 소리를 질러댔다.   

'강제징용자유족회' 활동을 하며 세상살이에 눈 뜬 오회장은 일본대사관 앞이든 종필이 집 앞이든 항상 자신을 “나는 해남 땅끝에서 온 오장근 딸 오분임이다”라고 소개했다. 오회장은 “해남이 서울서 몇천 리여?" 무지막지한 일본 놈들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 가서 온 가족이 한평생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막아선 경찰들도 무섭지 않았다.

오회장은 온몸을 던지며 죽기 살기로 싸웠다. 경찰들도 그 기세에 움찔움찔 물러섰다. 오회장이 지나갈 때면 “저 엄마 속엔 역사가 들었어”라고 경찰들이 말할 정도로 '강제징용유족회' 투쟁은 역사 앞에 정당하고 당당했다.  

오회장은 인터뷰 내내 박정희, 종필이 이름만 들어도 지금도 이가 갈린다고 한다. 오회장의 삶엔 아버지의 한이나 풀어주려고 시작했던 '강제징용유족회' 활동이 옹이 박혀 있다.

농민운동과의 만남은 '강제징용자유족회' 활동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뜬 오회장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농민운동이 진짜

농민의 요구를 담은 머리띠가 아직도 방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오회장은 해남군 농민회장을 맡고 있던 정광훈씨를 만난다. 1978년 전남 기독교농민회 창립에 참여했던 정광훈 회장은 해남군 농민회를 만들어 부당한 농지세, 부당수세, 부당의료보험과 수입 농수산물 등 봇물처럼 터지는 농업·농민문제에 앞장서고 있었다.  

해남 YMCA 윤상철, 강용학 회장 등도 그때 만난 농민운동가들이다. 김남주 시인 동생 김덕종 씨는 오 회장을 농민회 엄마라고 불렀다.

1987년 전남에서 시작된 수세거부 투쟁은 1988년 전국적인 고추값 제값 받기 투쟁으로 이어졌다. 전국고추생산지역대책위와 전국수세폐지대책위가 공동으로 1989년 2월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연 ‘수세 폐지 및 고추 전량 수매 쟁취를 위한 전국 농민대회'에 2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이는 기염을 토하며 농민운동은 대중화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강제징용자유족회'활동을 토대로 오회장은 기독교농민회, YMCA농민회, 해남군 농민회 활동을 하며 여성농민운동가의 길로 들어선다.

“정광훈 회장이 무슨 일만 있으면 나를 부르는 거야”

정광훈 회장은 “드디어 농민운동 짝꿍을 만났으니 옳다 됐다”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정광훈 회장은 5.18 당시 시위 주도, 농민대회, 민중대회 주도, 한미 FTA 저지 등으로 3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청년 같은 순수함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투쟁현장을 달구기도, 녹여내기도 했던 정광훈 회장은 이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전국민중연대 대표,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내 결혼식 주례선생님 이기도 하다. 나 뿐이겠는가? 그즈음 결혼한 젊은 농민운동가들의 단골 주례선생님 이셨다.

2011년 정광훈 회장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해남이 없어진 것 같았다’는 오회장은 농민회 모임만 있으면 자신을 챙겼던 정광훈 회장의 부재가 너무도 섭섭하다.

2018년 해남농민회는 오분임, 강용학, 윤상철 회장의 팔순잔치를 공동으로 차렸다. 누구보다 멋들어진 축사를 했을 정광훈 회장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말들은 허공을 헤맸다.

“농민운동하면 수세, 농지세, 도로 주변 풀 베는 부역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왜 안 나가겠어. 나는 누가 오라고 하기 전에 농민회에 스스로 나갔어”

농민집회가 열리면 맨 앞자리에서 경찰들에게 “비켜라 이놈들아, 왜 우리를 못 가게 막냐”며 소리치는 것은 오 회장 몫이었다. “내 목소리가 쓸만했나 봐, 농민회에서 행사만 있으면 나를 부르더라고.” (웃음)

목소리만 쓸만했겠는가? 주체적인 여성농민으로의 자각과 실천은 오회장에겐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수세 투쟁, 선봉에 서다


“농민 운동하면서 수세를 없앴지”

수세는 농지개량조합(이하 농조)에 조합원들이 납부하는 조합비인데 일제 강점기부터 수리조합에 의한 징세가 이어져 내려온 대표적인 반봉건 식민지 잔재였다.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농조는 부당하게 농민을 수탈하는 기관으로 군림했다. 조합 총회는 물론 대의원회도 구성하지 못하고 정부가 조합의 임원을 마음대로 임명하는 등 비민주적·반농민적 기구였다. 저수지를 사용하지 않는 농민에게도 수세를 물리는가 하면 조합비의 부당한 상승도 농민들의 삶을 옥죄였다. 조합으로부터 아무런 이익을 얻지도 못하면서 조합비를 내야 하고 체납할 경우 과태료와 차압 등으로 강제징수를 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들에게는 농민의 조합비가 아니라 '부당한 수세'일 뿐이어서 농민의 피해와 원성이 높았다.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농민들의 거센 저항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부당 수세 투쟁은 농민 대중들에게 최대 이슈가 되었고 마을, 시군으로 연결되는 농민 대중투쟁의 모범이 되었다. 결국 부당 수세는 폐지되었고 농민투쟁의 값진 승리를 일구었다.  

수세 투쟁 전면에 나선 오회장은 농조 직원들과 숱하게 싸웠다. 농조 직원이 수세를 받으러 오면 “썩은 대가리 같은 놈들아! 느그들이 일본 놈들보다 더 징허다. 하늘이 내린 저수지 물값을 왜 니들이 받아가냐?”며 악을 써댔다.

“저수지에서 새우를 잡으면 못 잡게 해서 싸웠어. 저수지에 물을 품으면 새우가 생기는데 하늘이 내려준 것을 왜 즈그들이 돈을 주라고 해? 수리조합 놈들에게 '눈 빠질 놈들아 내가 돈 있어도 수세는 줄 수 없다'고 하니까 농조 직원이 '아줌마 좋게 삽시다'하데. 내가 무섭기는 했나 봐”

오회장은 신방 저수지 근처 논둑에 심어놓은 콩에도 세금을 붙여 걷어가니 농민운동을 안 할 수 없었다.

집 근처 신방 저수지에서 20여 년 동안 가물치, 새우, 붕어를 잡아 소, 돼지 등 가축도 키우고 땅도 늘려온 오 회장은 수세 문제로 농조 직원들과 늘 싸워왔는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드디어 수세를 없앨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농민회가 함께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세 차압, 빨간딱지


“나락 쌓아놓은 창고 구멍에서 쌀 냄새가 났던지 농조에서 수세 안 낸다고 창고문에 차압 딱지를 붙였더라고” 오 회장은 그 길로 김강일 이장한테 가서 농조 직원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한다.

“창고에 방아 찧는 기계가 있는데 빨간딱지 붙여서 방아를 못 찧으니 아그덜 보듬고 석유 뿌려서 불을 확 질러 불 것이다. 내가 농민회원인데 나 죽으면 전국에서 난리 날 것이다”

이 말을 들었는지 농조에서 박주희 소장 등 몇 명이 내려왔다.

“차압 안 떼면 애들이랑 석유 뿌리고 죽어 불란다. 그러면 전국이 떠들썩할 거고. 내입으로 부당수세라고 씨부리고 죽지, 내가 그냥 죽것냐”고 했어.

나중에 김강일 이장은 농조 사람들한테 “이 아짐 성격에 그냥 안 있을 것”이라고 했단다.  

농조 직원이 온다고 하자 오회장은 화덕에 보리밥 한 솥 삶아 놓고 나갔다 왔더니 차압 딱지 뜯고 창고문도 열어놓았다. “이 아짐 한번 한다면 하는 양반”이라는 이장 말이 한몫했던 것 같다며 일부러 한 솥 해놨던 보리밥은 동네 청년들이 다 먹고 갔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 후로도 “우리도 밥통 떨어진다”며 수세 징수에 나선 농조 직원들과 실랑이가 오고 갈 때마다 “내입으로 수세 안 준다고 했는데 내가 주것냐?”며 호통을 쳤다.

오회장은 한번 마음먹으면 해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2년 동안 투쟁으로 결국 농민들을 괴롭혀왔던 부당 수세가 사라졌고 농민회는 대중투쟁에 우뚝 섰다. “해남에 오분임 같은 사람 하나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수세 투쟁으로 오회장의 이름도 높아갔다.


어린 오분임의 꿈


일제 식민지와 전쟁, 가난이라는 역사를 살아낸 오회장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식민지 가부장 문화가 극심했던 당시에 꼬마 여자아이에게 꿈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했을까?

“나는 그렇게 공부가 하고 잡았어. 근디 일본 놈들이 아버지를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서 내가 공부도 할 수 없었잖아”

어린 오분임은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 한이나 풀자며 시작했던 '강제징용자유족회'활동은 어쩌면 꿈을 빼앗긴 어린 오분임의 한이 더 크게 작동했을지 모르겠다.

창고 같은 큰 건물에 전 학년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수업을 했던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을 겨우 다녔던 어린 오분임은 한글은 뗐지만 여전히 받침 쓰기가 어렵다.

“내가 겁이 없고 호기심이 많았나 봐”

일본 순사 온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던 때였으나 오회장은 각반에 칼을 찬 순사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무엇을 하고 다니나’ 싶어 따라다녔다.

“일제 때 청결(청소) 조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도 없이 일본 순사가 아버지를 뚜드려 팼어. 그 뒤로 우리 집 옆 야학당에 각반 찬 일본 순사가 와서 뭘 조사하러 오면 나는 일본 순사 하는 짓이 궁금해서 따라다녔어” 엄마가 기겁을 하고 혼을 내도 소용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도 채 마치지 못한 오회장은 자식이 없었던 막내 이모네 양녀로 보내졌다. 완도 바닷가에 살았던 이모에게 오전에 학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바다에 가서 우무도 따고 청각, 미역도 묶고 일 많이 할라니까 학교만 보내달라고 졸랐다. 어린 오분임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을 보면 딱 죽것더라고” 어린 오분임은 학교 다니는 사촌들 책을 보면서 한글을 떼고, 혼자서 구구단을 외웠다. 그러나 한글 받침에 막히고 곱셈, 나눗셈엔 숨이 턱 막히더니 바닷일을 핑계로 점점 공부와 멀어졌다.

“농협 가서 글씨를 쓰려면 왜 이렇게 안 써지는지 몰러” 오회장은 드라마 연속극보다 책 보고 글씨 연습하는 것이 좋다며 오분임체로 가득 메운 공책을 내놓는다. 침대 옆 식탁에는 큰며느리가 보내주었다는 ‘좋은 생각’이 쌓여있다.

“다시 태어나면 공부 많이 하고 싶어” 더 어려운 시절에도 ‘나 묵을 치는 단속’하고 살아왔던 터라 돈 많은 사람은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다시 태어나면 공부가 하고 싶단다.

한국 근현대사를 오롯이 살아낸 여성들에겐 ‘배움에 대한 한’이 저토록 평생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신방 저수지에서 낚아 올린 순환농업


공부가 하고 싶었던 오분임은 방직공장에 다니면 돈을 번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마음이 동할 즈음 선자리가 들어왔다, 인근 마을 총각인데 4남매 중 형제 둘은 징용 가고 형이 하나 있는데 자립해서 시댁 때문에 성가실 것 없고 신랑 자리는 술도 안 먹고 성실하다며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남편이 잘 생겼다는 말에 오회장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한 마지기로 시작했던 부부는 땅을 불려 갔다.

빠르게 살림을 불릴 수 있었던 보물단지는 집 근처 신방 저수지였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았던 오회장은 농사일보다 물질이 손에 더 익었다. 신방 저수지에는 새우며, 가물치며, 붕어들이 많았다. 비가 오면 양동이로 붕어를 담아냈다. 된장 풀어 끓여낸 붕어 국은 집에서 키우던 소, 돼지, 개, 닭, 오리의 사료가 되었다. 짐승들의 똥과 오줌은 기름진 거름이 되어 논으로 나갔고 오회장네 논은 다른 집보다 소출이 더 날 수밖에 없었다. 복합영농, 순환농업의 다름 아니었다.

저수지 근처에 살았던 제부가 부부에게 저수지에 그물을 치라고 일러주었다. 사방 모서리 끝이 보이지 않은 신방 저수지에 큰 그물을 치고 작은 배를 샀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본격적인 저수지 농사가 시작되었다. 가물치, 장어, 붕어, 새우 등을 잡아 광주 대인시장으로 팔러 다녔다. “새벽 2시 되면 일어나서 아침밥 해놓고 3시에 저수지 가서 그물 당김서 고기를 거둬들여, 그란디 아그덜이 우는 소리가 내게만 들리는 거여. 그라문 집으로 쫓아와서 방문을 열어보면 아들 둘이 잘 놀고 있더라고” 여성이자 농민이었던 오분임은 집안일에 농사일까지 한시도 몸을 쉴 수 없었다.

오회장 부부에게 신방 저수지는 삶의 동아줄이었다. 맨몸에 성실함을 장착한 부부에게 저수지는 힘겨운 노동을 요구했지만 일한 만큼 땅으로 보상받았다. 1 마지에서 30마지기까지 땅이 불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연출이네(오회장 남편)는 방죽 밑에서 논을 콩 줍듯이 산다고 할 때였다. 저수지 어업이 농사짓는 큰 밑천이 되었으니 수세로 인한 분쟁은 시도 때도 없었다. 오회장이 수세 투쟁에 나선 중요한 운동 밑천도 저수지 농사였다. “가마치(가물치) 한 가마니 잡아 6천 원까지 팔아봤어. 지금 돈으로 치자면 백만원 돈 할 것이여”라던 오회장은 아들이 저수지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펄쩍 뛰며 말렸다. 돈은 되도 몸이 고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저수지에 매여 20여 년 살다 보니 마을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남편은 시름시름 앓더니 병원 출입이 잦아졌다.


농약중독, 남편을 잃다


결혼하고 5년 동안 아이소식이 없었다. 밥값 못한다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동네 사람들과 시어른, 친정식구 보기 민망했다.

오회장이 결혼한 동짓달 스무날에 5년 만에 큰아들을 낳았다.

오회장이 내놓은 사진 속 젊은 남편은 인물이 훤했다. “아들 델꼬 읍내 나가면 아따 연출이 아들 훤하다고 했제”

오회장은 아들 둘에 막둥이 딸이 하나 있다. “낳기는 다섯을 낳았어. 큰아들 낳고 딸을 낳았는데 며칠 만에 죽어버렸어. 그러고 둘째 아들 낳고 또 그 밑으로 딸을 낳았는데 죽었어”

사람들은 부정 타서 아이들이 자꾸 죽는다고 수근 댔다. 오회장은 애 낳으면 죽으니까 남편에게 부부생활도 하지 말자고 했다. 남편도 농약중독으로 시름시름 앓았다. 그러다 마흔 줄에 막내딸이 생겼는데 낙태를 하려고 했다. 한의원 하는 집안 동생이 형수는 하혈을 많이 해서 수술하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마지못해 늦둥이 딸을 낳았다.

막내 이모와 큰아들

돈도 땅도 없었던 남편은 농기계를 빌리는 대신 그 집 농약을 대신 쳐주었다. 마스크도 방제복도 없었던 시절 독한 농약을 그대로 삼킨 남편은 큰아들 3살 때부터 증상이 나타났지만 약으로 버티다 결국 50대 초반에 삶의 끈을 놓았다. 기계 살 능력도 됐는데 “그때는 왜 멍청이처럼 그 짓을 했는지...”

후회는 너무 늦었다. 병원 가는 걸 지독히 싫어했던 남편 고집도 한몫했다. 농약중독으로 많이 죽기도 한 시절이었다.

“막둥이 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그렇게 잘해, 매일 전화하고, 매일 엄마 먹으라고 뭘 보내” 막내딸 자랑이 한창일 때 전화벨이 울린다. “오냐, 막내냐? 뭘 또 보냈다냐. 천혜향 보낸다고? 알았다. 지금 여그 내 손님들 와서 이야기 중이다.”

엄마와 딸의 연대는 거리에 상관없이 일상화되었다. 아들만 둘인 나로서는 참으로 부러운 풍경이다.

한평생 한동네에서 살다 보니 죽은 자식 또래들이 고향을 찾을 때면 저만치 나이 먹었을 먼저 보낸 자식들이 생각난단다. 58살 먹은 오회장네 집은 그렇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있었다.


여성농민회 하면서 신이 났제


“사람들이 농촌사람들더러 시골냄새난다고 하는데 썩은 대가리들 이제. 시골이 없으면 되간디! 시골이 뿌리면 도시는 꽃밖에 안되잖아. 시골이 뿌리여” 20%대의 초라한 식량자급률로  농업, 농촌, 농민을 홀대하는 이 나라에서 오회장은 지금도 뿌리인 농촌이 잘 살아야 꽃인 도시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농민 운동하면서 수세 없앴지, 부당한 농지세 없앴지, 도로 주변 풀 베는 강제 부역이 없어졌어” 농민들한테 풀 베개하고 나오는 뒷돈을 받아먹었다는 소리도 있었다. 힘없는 농민들 부려먹다가 농민회가 생기고 여성농민회까지 만드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80년대 말 농산물 수입개방과 우루과이라운드로 농민들의 시름이 높아갔다.

오회장을 비롯, 해남농민회 활동을 하던 5명의 여성은 여성들의 주체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1988년 ‘해남여성농민교육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교육준비위원회는 군 단위 교육 2회, 면 교육 1회, 마을교육을 30차례 진행하며 여성농민들을 모아낸다. 수세와 토지 투쟁을 통해 여성농민들의 참여 숫자가 늘어나자 1989년 3월 25일 해남여성농민모임으로 명칭을 바꾸고 1990년 1월 18일 여성농민 42명이 교육을 받은 후 ‘해남여성농민회결성을위한준비모임(이하 준비모임)’으로 전환한다. 준비모임은 이후 6차례 회의를 갖고 1990년 7월 7일부터 9월 5일까지 14개 마을에 여성분회를 조직한다. 대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여름농활은 여성농민회 조직화에 거름 역할을 하였다. ‘교육활동-활동가 양성-마을 분회 결성’이라는 조직화의 기본기를 튼실히 다진 준비모임은 1990년 7월 30일 바닷가에서 300여 명이 모여 ‘해남여성농민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준비위원장에 오분임(현산면 신방리), 부위원장에 서현숙(옥천면 용산리), 총무에 김연숙(현산면 봉동리)씨를 선출한다. (엄영애, 한국 여성농민운동사, 나무와 숲, 2017)

53세 오분임 위원장은 결성선언문에서 ‘이 땅의 주인인 여성농민이 농민이기에 당하는 억압과 여성이기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농축산물 제값 받기, 수입 반대, 건전한 농촌문화 정착, 농촌 교육시설 개선, 봉건적 인습 타파, 사회 민주화 등 농민문제와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힘차게 나아갈 것’을 선언했다.

선언문 말미 우리의 다짐에는 ‘우리 농민 얽매이는 봉건 인습 고쳐보자, 여성농민 똘똘 뭉쳐 여성농민회 건설하자’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해남군 여성농민회는 4개면 17개 마을 분회, 1개 면지회라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1990년 12월 11일 창립했다. 오분임은 해남 여성농민회 초대회장에 선출됐다.

오회장에게 정광훈, 이종옥, 김종분은 여성농민운동을 만나게 해 준 징검다리들이다.

“내가 여성농민회에 미쳤었나 봐. 내가 빠지면 여농이 어떻게 될까 봐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나다녔어” 2대 전남여성농민회장이었던 오회장은 광주, 전남, 서울 등을 오갈일이 많았다. 해남 밖을 나가는 날이면 의례 전날 저녁 김종분 해남 여성농민회 총무 집에서 하룻밤 묵어갔다.

무안 수양촌에 모여 전남 각지에서 온 여성농민들과 공부도 하고, 농민대회, 연대활동을 통해 몰랐던 한국사회와 농업문제에 크게 눈을 떴다. 농촌 현장이 학교였던 오회장은 마을로 다니면서 강의도 하고 각종 농민대회 연사로 나서 인기몰이를 했다.

대학생들도 해남 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1991년 경찰의 폭력에 희생된 강경대 학생으로 시작된 분신정국에 전남대에서는 학생들 시위가 한창이었다. 전남 여성농민회도 쌀을 모아 학생들에게 지원했고 9월 2일 전남대에서 열린 투쟁에 참여해 같이 돌도 굴리다가 경찰에 쫓겨 학생들 손에 이끌려 도망가기도 했다.  

80~90년대 대학생 농촌활동(이하 농활)은 농민운동과 학생운동이 전면적으로 만나는 장이었다. 오회장 동네에도 농활이 들어왔고 큰아들과 또래 청년들이 농활 주체를 맡았다. 큰아들은 오회장의 적극적인 지지자였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청년회 활동에 열성을 다했다.  농민운동 열성분자(?) 모자 덕에 오회장네 아랫채는 매번 농활 학생들의 숙소가 되었다.  오회장은 지금도 장마로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채 물기 머금은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던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한번 시작하면 어디든 안 빠지고, 안 가면 궁금했던 오회장은 각반 찬 순사 뒤를 따라다녔던 호기심 찬 어린아이에서 여성농민 리더로 훌쩍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이래 뵈도 전국 여성농민회로 묶여 있는 사람인데, 처신을 잘해야지 싶어서 10원짜리 하나라도 항시 내 돈 내면서 댕겼어. 내가 여성농민회 다닌 거 남 보기는 어쨌을까 몰라도 세상 돌아가는 공부 많이 했어. 가만히 앉았으면 누가 알려주나?” 오회장은 지금도 나이 육십만 먹었어도 어디고 따라다녔을 거라고 한다.

오회장은 농촌으로 투신하거나 귀농해 여성농민회를 만들겠다고 애쓰는 젊은 활동가들이 항상 안타까웠다. 해남 여성농민회 재정사업으로 밤새 썰어 만든 유자차를 팔기도 했다.

해남 여성농민회는 농민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농민약국과 함께 마을 곳곳을 다니며 무료진료와 여성농민 교육을 진행했다.

“나는 여성농민운동하면서 다 좋았어”라고 회상하는 여성농민운동가 오분임의 삶은 눈이 부시게 찬란했던 듯하다. 모든 날, 모든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감옥에 갇히다


1990년 경희대에서 추수대동제를 한다고 해서 해남에서도 진도홍주, 무안 세발 낙지 고천암 쌀 등을 준비해서 서울로 출발했다. 그러나 해남을 벗어나기도 전에 경찰에 막혔고 군청으로 차를 돌렸다. 군청에서 농성을 하다가 해산하려 하니 가져갔던 농산물을 고스란히 농민들이 물어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오회장은 “너그덜이 막아서 우리가 손해 보게 생겼으니 물건값을 물어내라”며 농성을 했고 경찰은 오회장과 김영생 농민회장을 잡아가뒀다.

특수공무집행 방해죄로 한 달 동안 유치장에 갇힌 오회장은 “이 도둑놈들아 느그가 도둑이지 내가 왜 도둑이냐”며 문짝을 차며 투쟁했고 밖에서는 여성농민회와 농민회원들이 함께했다.

“마침 군대 갔던 둘째 아들이 면회를 왔는데 나를 죄인처럼 묶더라고, 그래서 나를 왜 묶냐고 했더니 법칙이 그렇다고 해. 기가 막혔지”

“나는 아들, 딸 낳고, 아들 둘을 군대도 보냈다. 내가 뭣을 잘못했냐? 농민들 살자고 농민운동한 것인데 왜 나를 가두냐? 난 조사받을 것도 없다”고 악쓰며 울었더니 조사하던 경찰들도 눈물을 흘렸단다. 결국 오회장은 물건 값보다 더 받아내고 당당히 유치장을 나왔다.

초등학교 다니던 막둥이 딸이 놀란 눈으로 한 달 만에 돌아온 엄마를 맞이했다.


야문 사람 오분임


집 한 채, 땅 한 뙤기 없던 오회장은 젊은 날 남편과 악착같이 마련한 땅을 살뜰히 보살폈다. “남편이 죽고 여성농민운동 시작할 때 아들들은 서울 등 외지로 나갔고 막내만 초등학교를 다녔어. 여성농민운동하면서 단돈 천원도 의지 않으려고 작심하고 살았어. 그때만 해도 남편 약값도 짊어지고 있어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

여성이 나다니는 것을 곱게 볼 리 없었던 농촌에서 여성농민운동을 하자면 얼마나 많은 하마평에 올랐을까 싶다. 부처도 예수도 동네에서는 대접받지 못했듯이 오회장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타고난 여성농민 선동가로 이름을 높였지만 동네에서는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전국을 내 동네처럼 다니면서도 오회장 논밭은 항상 깨끗했다. 내일 나갈 일이 있으면 밤늦게라도 농사일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차로 집을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동네 사람들에게 오회장은 “여성농민회 일 하니 하늘이 알아서 돕는가 보다”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오씨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북평면 농민회 총회에 가서 마이크 잡고 연설을 하니 집안 오빠들이 “네가 오분임이냐? 아버지가 누구냐? 고 물어 ”우리 아버지는 오장근이고 나는 오장근 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말만 안 했지 속으로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회장은 동네 안팎에서 ‘야문 사람, 똑똑한 여자’가 되어갔다.


마이크만 쥐면 기가 났제


마이크 잡으면 '기가 나는' 오 회장의 연설은 시원하고 쉬웠다.

오회장은 타고난 선동가다. 사실 여성농민들은 누군가 써준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이 더 고역일 수도 있다. 오회장에게는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알게 된 것을 여성농민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쉬웠다.

오회장은 마이크만 쥐면 ‘기가 난다’고 표현한다.

“내가 전라도 땅끝에서 여기까지 올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농산물 수입 말고 쌀값을 올려라. 농민들이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는 농민운동을 시작했으니 똘똘 뭉쳐야 한다. 다음에는 더 많은 숫자가 모이자.”

오회장이 발언하면 사람들 박수가 커졌다. 속이 시원했고 알아먹기는 더욱 쉬웠다.

“꽃만 보고 살 수 있나? 농사짓는 농촌이 뿌리이지. 도시 사람들은 그걸 알아야 해” 농촌 뿌리론은 오 회장의 지론이다.

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오 회장의 연설을 들었는지 “아짐 서울 가서 1등 났소?”라고 물으면 “1등 난 것은 모르겠고 여성농민운동은 했소”라고 한방 먹이기 일쑤였다.

“여성농민회 하면 밥이 나오요?”라는 비아냥에 “밥 나오지, 암만”이라는 응수는 여성농민운동가 오분임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수세 없애니 얼마나 좋소. 여성농민회 따라다니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요. 당신 농사는 짓소? 안 짓소? 수세 싸움 안 해본 사람은 이맛을 모를 거이다” 오 회장의 연설은 마치 노래처럼 흐른다.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암만, 다시 태어나도 여성농민회 해야제


보물단지 신방저수지 앞에서

“다시 태어나도 농사지어야지. 농사는 뿌리니까”

오회장은 다시 태어나도 농사짓고 여성농민운동판도 부지런히 쫓아다닐 거란다.

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와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많은 젊은 농민들이 땅을 떠나갔다. 그래서인지 지금 농촌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물으니 역시 ‘수입개방’과 ‘농산물 가격 보장’을 꼽는다.

“농민들이 더 똘똘 뭉쳤으면 좋겠는데, 요즘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속상해. 정치하는 것들도 일은 안 하고 지랄하고 자빠졌잖아”

30년 전 오회장이 전국을 돌며 외쳤던 구호 그대로여서 그런지 뒷맛이 쓰다.

오회장은 자식들에게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아버지 한을 풀려고 시작한 유족회 활동도, 수세와 농지세 등 부당한 농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여성농민운동 판에서도 오회장 표현을 빌리자면 ‘뼈 녹아지게 노력’하며 살았다.

여성농민운동가 엄마 밑에서 자랐으니 너희들도 기본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덕에 세 자녀 모두 잘 살고 있어 걱정 없다.

오회장네가 콩 줍듯 논을 사는데 공이 큰 신방 저수지 근처에 자리 잡은 오회장 텃밭엔 마늘이며 양파가 땅속에 꽁꽁 숨어 볕을 기다린다. 시금치는 파릇파릇 올라와 입맛을 돋운다.

그 많던 붕어와 새우는 저수지가 연꽃으로 가득 차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스라이 저수지 너머 마이크 쥔 오회장이 기가 나서 연설을 한다.

“농촌은 뿌리고, 도시는 꽃이라니까, 뿌리가 살아야 우리 모두 사는거이다. 이 썩은대가리들아”


동행취재 : 이종옥, 오은숙, 권미영, 이태옥

글 : 이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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