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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ma Jun 26. 2022

[소년적니 (Better Days), 2019]

교육이란 목적 하에 자행되는 침묵 속 폭력




우리는 수많은 빛깔들로 세상을 본다. 색깔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게도 하고, 하염없이 우울하게도 만들었다가, 평온을 찾게끔 돕기도 한다.


영화에서 쓰여지는 색채의 의미는 그 때 그 때 다르지만, <소년적니> 에서의 "파랑"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것을 교육받고 체득한 수많은 청소년들을 의미한다.



주인공 첸니엔 반의 한 학생이 학교폭력을 당하다가 결국 자살을 한다. 피해자가 죽자, 첸니엔은 곧바로 가해자들의 다음 타겟으로 지명된다. 카메라는 이를 방관하는 학생들 얼굴 하나하나를 빠른 컷 전환으로 보여준다. 그 누구도 첸니엔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방관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거나, 그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다.




첸니엔은 도움을 요청해봤자 돌아오는 건 "참으라"는 대답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가오카오 (중국의 수능)가 끝나면 모든 게 끝날 거고, 너는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이에 분개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에 설득된 첸니엔은 공부에만 매진한다.





그렇게 벼랑 끝에 내몰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첸니엔은 우연히 길거리의 양아치 샤오베이를 만나게 된다.

마치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둘은 맞는 듯 안 맞는 듯 삐걱이다가 서서히 서로를 마음 속에 들이게 된다.


"꼭 베이징 대학에 가야 해" 라고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말하는 첸니엔을,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사는 첸니엔을 샤오베이는 지켜주기로 결심한다. 그저 멀리서, 자신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넌 계속 걸어. 네 바로 뒤에 내가 있을게"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걸 잃은 이들에게 붙잡을 것은 서로 뿐이었을 테니까


또다시 벼랑 끝에 내몰린 첸니엔을 위해 샤오베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킨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 씬에서도 샤오베이는 여전히 멀리서 첸니엔을 지킨다.

더이상 그때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모르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지 않고도, 당당히 낮에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중국의 학교와 한국의 그것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대학 잘 가면 다 해결돼.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면, 대학 잘 가면 네 인생은 달라질거야.


학교는 세상의 꼭대기에 서는 방법만을 가르친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하면 "좋은 어른"이 되는지는 그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다.

도움을 청할 때 제대로 된 손길을 내미는 어른은 없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어른도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사람도 허실을 숨기고 있으며,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존재하지 않는 게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망각하며 살아간다.

선악을 구분짓고, 타인의 도덕성을 비판하고, 사회에 다신 나와선 안될 존재라며, 갱생이 불가능하다며, 그렇게 타인을 비난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진다.


교육이란 뭘까. 학교는 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그 댓가로 무엇을 빼앗아가고 있는 걸까. 학생이 아닌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배움의 목적은 곧 인간다움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필수요건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공감이다. 한 명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들에 무감해지는 어른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참으라" 말하면서 아이들이 당하는 폭력엔 무책임한 어른들에게 던지는 말들 같아서 인상깊었던 첸니엔의 대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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