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mma Dec 11. 2023

자기혐오의 굴레

나는 나를 더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하루하루를 나를 미워하는 일에 몰두하며 평생을 살았다. 


어떤 날은 내 얼굴이 미웠고, 어떤 날은 내 조용한 성격이 싫었다.

또 어떤 날엔 남보다 못한 내가 미웠고, 그렇게 누군가를 질투하는 내 모습조차도 싫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이런 내가 너무나도 가여워서, 

남들이 나열해주는 나의 좋은 조건들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절대적'으로 우수해야만 했다. 

잘나야만 했고, 그게 타인의 인정이든, 아니면 그저 객관적인 수치이든, 보이고 들리는 것, 아주 명징한 것들만이 비로소 나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준다고 믿었다. 








    <우리는 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 에서는 

사회에 종속당하고 지배당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인 즉슨, 사회가 바라는 어떠한 인간 군상이 곧 타인의 욕망, 그리고 나아가 나의 욕망이 된다는 것이다.

예시로 말하면 우리가 마르고 균형 잡힌 몸매를 아름답다 생각하는 것은 나의 본질적 욕망이 아닌, 사회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비롯된 욕망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사회의 욕망을 내재화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데 과연 온전히 벗어나는 게 가능할까? 

어쩌면 차라리 그 모든 욕망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 가깝게라도 도달할 수 있다면, 행복이라는 감정에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찰나에 들었다. 


그러나 평생을 어떠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이뤄내기 위해 애썼고, 

매 단계마다 그 목표를 이루었는데 어째서 단 한번도 그 상태에 머물러 살며 나는 행복하다, 는 감정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다음 단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자체로 이미 허상이고, 도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갈 수록 나아진다는 감정은 확실하다. 더 희망을 품게 되는 것도 맞다. 그러나 결과는 오래 가지 않는다. 오직 그 나아감 속의 '과정' 만이 나와 영속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 

다만 그 결과조차도 내가 온전히 원한 것이어야 행복하다. 맹목적인 노력으로 이룩한 학벌 같은 결과들 말고, 내가 내 선택으로 오롯이 택한 직업, 오롯이 택한 취미,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가 과정을 빛나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한 가지 위안을 찾았다. 나는 적어도 내가 온전히 좋아하는 것 하나 쯤은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운좋게도 그걸 업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법은 찾지 못했다. 내가 순수하게 욕망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밖의 욕망들은 여전히 타자의 욕망에 기댄 채로 살아가고 있어서일까. 


그러니 여전히 가여운 나에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을 만들어보고 싶다. 

내가 외면해온 나의 좋음들, 기쁨들, '객관적'인 잣대들로 평가될 수 없는 나의 고유한 것들 말이다. 

장점이라는 평면적이고 가치론적인 단어보다 더 깊숙한 단어가 있으면 좋겠다. 

이 또한 가치론적이라 느껴질 수 있으나 나는 '기쁨' 이란 단어로 감히 대체하고 싶다. 

나의 기쁨을 찾아나가야지. 나의 미움들 말고, 나의 기쁨들. 



나를 사랑하기 위한 나의 여정 또한 과정이기에, 그 과정 속에 행복과 자유가 함께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과 나의 좌절에게 바치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